소설리스트

〈 47화 〉 6.현가불철(8) (47/125)

〈 47화 〉 6.현가불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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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눈을 떴을 때에 가장 처음 느껴진 것은,오래간만에푹 잤다는 상쾌함이 아닌기분 나쁜 나른함이었다. 아직 흐릿하게 남아있는 통증의잔재.멍한 정신을 더듬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몇 시지.불현듯 들어온 그런 생각에,침대맡을더듬으며오늘따라 유독 손에 잡히지 않는 스마트폰을 간신히집어 들었다.오후 4시 반. 대체 몇 시간이자버린 걸까.

"...시간 아깝게."

돌연 울컥 짜증이 일었다. 기껏 쉬는 날인데. 기껏 전날에 결심을 세운 참이었는데.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무섭게, 나도 모르게 툭 스마트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이러는 거야.제길.

"으우우우우우­!"

그대로 이불에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소리가 되지 못한 갖가지 불평과 불만들이 괴상한소음이 되어이불에 파묻혀있던 머리를 울려댔다. 그 간질거리는 감촉이 마음에안 들어서,또 한동안 침대 위를 뒹굴었다. 결국 진이 다 빠진 기분에철푸덕몸이 엎어질때쯤이되어서야 몸을 멈췄고 말이다.

"... 하아..."

무기력감과는 다른 묘한 기분. 무거운 무언가라도매달고 있는듯 끊임없이 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침대로부터 빼냈다. 이대로 계속 침대 위에 있어서야 같은 짓만반복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땀에 절어서 끈적하게 달라붙어오는 티셔츠의 목덜미 부분을 붙잡고선 신경질적으로 펄럭였다. 그래. 일단 샤워부터 해야겠어. 아니그전에물부터 마실까.

잠에서 덜 깬 듯한머리가 도통제대로 된사고를 하질 못했다. 어떻게해야 될지알 수 없어져서, 그냥 발걸음가는 대로몸이 움직이도록내버려 두기로해버렸다.

비척거리는 몸을 이끌고서 복도를 지나쳤다. 정신 차리고 보니부엌이 더가까운 위치였기에, 목부터 축여야지 하는 마음에새어 나오는조명을보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느릿느릿 부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갔다.걷는다기보다는발바닥을 끄는 듯한 느낌. 발바닥에 뭔가거슬 거리는감촉이 닿을 때마다 또다시 울컥거리며 짜증이 일었으나 바닥을 쿵쿵거린다거나 하는 짓은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불이켜져 있다는건 상현이가 일어나있다는 거려나. 방송어떻게 하지.갈까, 말까. 이제 몸이 막 아프고 그러진 않은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부엌에 고개를 들이밀자, 역시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있는 상현이의 모습이 보여왔다.

식탁과 전자레인지 사이의 좁다란 길목에 선 채 스마트폰을들여다보고 있는모습. 정수기 앞으로 가려면, 상현이 쪽을 피해 탁자를 따라 크게 빙 둘러돌아가야 하는상황.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우뚝 발걸음이멈춰 섰다.돌아가야 한다,라는생각이들자마자'말을 걸어야겠다'라는 생각보다도 먼저 덜컥 입이 열렸다.

"상현아."

"... 으엉? 오, 형일어났­"

"비켜줄래? 방해되잖아."

생각해보니 당연한 걸지도. 굳이 돌아가기보단 상현이가 비켜주는 쪽이 낫잖아. 몇 걸음만 물러나주면되는 거고.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에 묘한 충족감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도,우웅 거리며돌아가는 전자레인지 소리만이 부엌을 맴돌았다. 뺨에 달라붙어오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샐쭉 상현이 쪽을 바라보아도, 뭔가못 들을말이라도 들은 듯 굳어있는 상현이의 몸이 움직일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괜히 2번씩 말하게 하기는.

"못 들었니?비켜달라니까."

"어? 어! 어, 어..."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말을건네자,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란 상현이가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겨 길을 터줬다.아픈 건난데 왜 네가 그렇게 얼을 타. 그렇게 한바탕 말을 쏘아주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입을 열기도 귀찮아져,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바라보고 있는상현이를 잠시 지그시 노려보고는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충 '앞으로는 이러지 말라'라는 뜻 정도는 전해지지 않았을까.

"... 저기, 형?"

"왜?"

컵을 꺼내들고서 정수기로 물을받고 있자니,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상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처럼 하지, 아프다고신경 쓰는 건가.그럴 거면처음부터 잘하던지.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굳이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흡. 하는 헛바람 삼키는 소리에 녀석이 대충 어떤 모습을하고 있을지는상상할만했다.

"그... 몸은, 좀 괜찮고?"

"걸어 다니는거 보면,걸어 다닐 만은한가 보네."

"으, 으음..."

어정쩡한 대답에 또다시 짜증이 몰려왔다. 왜.물어보는 데로대답해줬잖아. 그 미묘한 반응은 뭐야.신경 쓰지않으려 했는데. 또다시 치솟는 불평에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려 상현이를 노려봤다. 우물쭈물거리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으로 아닌척하면서도내 모습을 힐끔거리는 상현이의 모습에, 무어라 말을 쏟아내려 달싹거리던 입술을 끝나 질끈깨물며다물어버렸다.

지금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벌어지던 입을 억지로 닫아버렸다.

"... 그,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고."

"방송해야 되잖아너."

"그, 그건 그렇긴 한데. 도와줄 수있는 한도와줄 테니까."

형용하기 힘든 답답함에, 벌어지려는 입에쑤셔 넣듯물을 들이켰다.한 번에지나치게 많은 양을흘려 넣어식도를 억지로 타고 넘어가는 감촉이욱신거리며느껴졌으나, 갈증이 잦아드는 기분에 중독이라도 된 듯 2컵째를비울 때까지 그렇게 계속해서 물을 벌컥댔다. 그 모습이 또 마음에 걸린다는 듯 안절부절하는 상현이의 모습이 자꾸만 시야한켠에밟혔다.

"... 하아."

"형...?"

"네 일에 좀 더 책임감을 가져. 남걱정하지말고. 그런 거,시청자분들한테예의가 아니잖아."

"어..."

우물거리는 대답에 신경질적으로 겁을 싱크대 속에 쿵! 내려찍었다. 그제야 움찔 몸을 굳힌 상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나지막하게'예...'라고 대답을 흘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 말이다.

"응. 그럼,지나가야 되니까좀 비켜줄래?"

이번에는 두 번 말할 필요 없이 슬그머니 몸을 비켜서는 상현이. '처음부터 좀 멀찍이 나서있었으면 좋았잖아'같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이 정도면뭐 괜찮을까.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뒤늦게 땀에 젖은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 하아."

우선 샤워부터 하고 생각해야지.

20.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린 층적운의 머릿속에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던 윤서의 모습이스쳐 지나갔다.차라리그뿐이면다행이랴. 몇 분 전에는 갑작스럽게쿵쿵쿵문을 두드리더니 문 너머로 새삼하지 않던'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같은 말을 하며 가기도 했고,화장실 가는척 힐끗 살펴보았을 때에는 거실에서 tv를 켜둔 채 혼자 소파를 향해 꾹꾹 주먹을 눌러대고 있기도 했고...

­진짜무슨 일인데아ㅋㅋㅋㅋ

­우리도 알려달라고!!!!!

"아무튼 안됩니다. 어쨌든 지금 저희 집에는 저밖에없는 겁니다.그렇게 아십쇼!"

여간 해서야시청자들의 요청에 시도 정도는 해보려고 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다지도 완고히 불가능을 선언하는 경우는, 정말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시청자들은알고 있었다.이건안되려나 보다.뭔가 사정이있나 보다.오늘은, 층적운놀려먹는 걸로만족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슬금슬금 시청자들 사이에퍼져가고 있을때였다.

쿵쿵쿵문 두드리는 소리. 움찔 굳어지는 층적운의 몸. 이변을 느낀 시청자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채팅창이 연달아 올라오는 물음표로 가득메워졌다.그리고 누군가제대로 된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빠르게, 층적운의 몸이 의자로부터 쏘아지듯 일어서고는 문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캠의송출 화면에적나라하게비쳤다.

­상현아 문 열어봐.

"아니, 누님 또 무슨 일로..."

­열어 보라니까.

느릿하게 열리는 문. 그에 따라,어둡다 싶은 생각조차 드는 옅은조명뿐이던방 안으로 밝은 조명이 비스듬히새어들어오기시작했다. 문 밖에 선 채 조명을 등지고 서있는 인영은, 짙게 드리워진 음영 탓에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시청자들 또한 익히알고 있는인물이 분명한 듯 보였다.

"상현아.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 했잖아."

"아니, 그. 그래도방송 중인지라..."

"매번 그렇게 소리 질러가며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네 방송은 실력파 게임 방송이라면서."

문이열림에 따라한층 선명하게 들리는,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 또한 익히알고 있는목소리. 하지만, 그 어투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조금 더 냉담하다고해야 할까.조금 까칠하다고해야 할까.연신 이어지는 소녀의 목소리에, 연거푸 이어지던 물음표의 행진이 눈에 띄게 느려져갔다. 그를 대신하듯, 중간중간' ㅜㅑ'따위의감탄사들이 비중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그건 그렇긴 한데."

"나 힘든 거 알잖아.이 정도배려도 못해줄 정도로 어린 것도 아니고."

"으, 으응..."

"내가 너무 과분한 부탁을 하는 거야?"

"아니지, 아니지. 응."

짧은 침묵. 팔짱을 낀 채검지로팔뚝을 툭툭 두드리던 소녀가, 이내 깊숙한 한숨과 함께 빙글 몸을 돌렸다.

"착한 아이라는 것도알고 있고,내 상황에 맞춰달라 해서 미안하긴 한데 그래도 해줄 수 있는 만큼은 노력해줬으면 좋겠어."

"아니...미안하긴... 응, 내가 더 미안하지... 하하하..."

층적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뒤돌아선 소녀의 모습이 캠 화면에서 벗어났다. 희미하게 들리는 발소리가 서서히멀어져 갔다.다시금 닫히는 문. 어떻게해야 될지모르겠다는 듯 잠시 닫힌 문 앞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있던 층적운이, 이내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모니터 앞으로 되돌아왔다.

"... 보였고 들렸죠?"

­모임... 대체 모임...?

­무슨 일이일어나고 있는 거임 ㅋㅋㅋㅋㅋㅋㅋ

"보셨다시피...그, 저희 누님께서 좀 상태가안 좋으시기때문에."

­더 줘!

­매도해주세요눈나!!!!!!!

­매도 모드눈나 ㅜㅑ...

­왜 너만 봐!!!!! 우리에게도 네가본 것을보여줘!!!!!!!!!!!

"...어허허허허허허.대체 쌍으로 나한테왜 이러실까...."

들끓는채팅창의반응에 재차 어이없음에 정신을 놓아버린 층적운이 다시금 방송을 진행하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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