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12.무부여망(3)
* * *
6.
"형."
"어?"
"나, 오빠라는 말들어보고 싶다같은 소리 엄청신경 쓰고있었나봐."
준석이 형의 손에 들려있던컵이 기우뚱 기울어지다 속에 든 우유가흘러넘치려던 직전에 간신히 원래의 균형을 되찾아갔다. 멍하니 그런 컵의 모습만을바라보고 있다가,뒤늦게 비척비척 시선을들어 올려형의 표정을 확인했다.
며칠 전노래 부르는모습을 보았을 때보다 한층 괴상해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뭐, 그렇겠지.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퍽어처구니없는소리였으니. 듣는 입장에선 저런 영문 모르겠다는 해괴한 표정이 나오는 것도 별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오래간만에끓인 커피를 호로록 넘겼다. 물을 너무 많이 넣은 모양인지,블랙커피라는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밍밍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 어, 음. 그러니까 윤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물어봐도 대답안 해줄 거야."
"이번에도말해주면 안 되는내용이라서?"
"아니..."
느릿하게 말꼬리를 늘렸다. 수강신청이 끝나고개강까지약3주 정도가남은 시점의황금 같은주말이, 그렇게 느긋하게 늘어지는 말꼬리를 따라 하염없이 늘어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로 별가치 없이가라앉아가고 있다는의미에서.
아닌 척하면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형의 표정을보고 있자니나도 모르게 비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더 끌면 진짜로 혼날지도 모르니, 뜸은 그만 들여야지.
"그냥 설명하기 귀찮아서."
당연하다는 듯, 머리 위로 꿀밤이 떨어져내렸다.끔찍할 정도로아프니 앞으론 정말로 형한테 장난치는 건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인데."
"아니,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토요일이라고 딱히 출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형은 내 묘하게신경 쓰이는태도를캐어보기위해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확실히,비몽사몽 한정신에씻는 둥마는 둥하는 것만 아니면 그다지 시간이 부족할만한 때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까. 매번 부지런을 떨어서 그렇지, 사실은이 정도의여유는 부릴 수 있는 사람인 게 아닐까.
"새삼 좀 그런 걸 느끼게 될만한 일이 있었어."
"그일이란 게뭔데?"
"친구랑 노래방간 거."
"... 노래방에서 무슨안 좋은일이라도 있었어?"
설레설레고개를 내저었다.그러고 보니,친구라고 말했다는 거 알면 시현 씨 화내려나. 문뜩, 이런 센티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원인을제공한정신불안자의얼굴이 떠올랐다.안 좋은일이었느냐 하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었다고 말해야겠지... 그건. 최소한, 나에게 있어선.
"나보고 노래못부른대."
"... 그게 어떻게 조금 전의 이야기로 이어지는지 이 형님은 도통 모르겠는데."
"정확하게는, 분명 목소리도 괜찮고시키는 걸이해는 하는 것 같은데 노래만 부르라고 하면여자 같은목소리를 내려고 한대."
이번에는 형의 고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야무슨 소린가싶겠지. 솔직히, 나도 100%이해하고 있는건 아니기도 하고. 아마 이런 진단도 나름대로... 아니, 꽤나심도 있게배운 사람이라서 내릴 수 있는진단이었을 테고.
"네 사정을알고 있는친구야?"
"응."
"그런 친구가, 네가 노래 부를 때에 이상하게 여자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그렇지."
"... 그래서 결국, 그거랑 아까말한 거랑무슨 상관인데."
아아, '여자 같은목소리를내려 한다'라는말 자체는이해 못하더라도 상황 자체에 대해선이 정도말해줬으면 어련히 알아서 눈치 채주면좋을 텐데.
"하아..."
"묘하게기분 나쁘다,그 한숨?"
"... 커피가 뜨거워서식힌 건데."
다시금 머리가욱신거려오는것 같아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다시금 커피를 홀짝였다. 밍밍한 주제에 물을 많이 타버려 양은 또 평소보다 많아서 도통 줄어드는것 같지가않았다.
"... 그걸 듣고,내가 무의식적으로 '여자 다운 일을 할 땐 여자처럼행동해야 해'같은강박관념 같은걸가지고 있는 게아닐까 생각했어."
"노래라는 게 꼭 여자만 부르는 건아닐 텐데."
"새삼 생각해보니, 선곡도 죄다 여성 보컬의 노래로 했더라고."
"... 으음."
"그런 생각이 들고나니, 뭔가 나 평소부터 이런 거 엄청신경 쓰고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리라든지..."
"내가 오빠 소리들어보고 싶다말했던거라든지?"
헛헛한 웃음과 함께 이어진 준석이 형의 목소리. 그것에 긍정도 부정도 할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채, 단지 커피만을 조금씩 조금씩 삼켜갔다. 뒤늦게, 괜히 부담감이나 죄책감 같은 걸떠넘긴 게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버린 탓이었다.
"... 아직도, 성별이 변해버린 것. 불쾌하고 불편하다 생각해?"
"... 요즘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하는데?"
커피잔을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애써 웃는 표정을짓고 있는형의 표정이 더더욱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지나치게 이기적인 성격인 것일까.
"... 그것도, 무의식중에그래야 한다고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싶어서."
"으음..."
"이제 굳이, 혼자 끌어안고서 끙끙거리다 이전처럼 속으로 곪아 터지고그러진 않기로 했으니까."
"하필 가족 중 첫 상담 상대가 나라니, 어깨가 무거운걸."
"부모님껜 절대로 말씀못 드리지.어머니, 같이 요리할 딸이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형도 알잖아?"
떠오르는 풍경이 있는 모양인지 나지막한 감탄사와 함께 형의 고개가 느릿하게 끄덕여졌다. 그야, 요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그냥 즐거운 취미가 하나 늘었다 정도가 아니라 새 생명을 얻었다 같은 느낌이니까. 나도 모르겠는 내 속마음이야어찌 됐건,문제가되지 않는한은 어머니는 그대로 지금을 즐기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었다.
"요리하는 거싫어?"
"... 솔직히, 요즘은 좀 재밌는데."
"노래하는 건, 억지로하던 거야?"
"... 그것도 음. 솔직히 시작은 반쯤타의였긴 한데,배우다 보니꽤 재밌었지."
"오. 배우러갔던 거야?"
"전문가 거든.친구가."
"그래서,노래 부르는건재밌었다는 거지?"
"노래 부르는것도, 꽤 나쁘지 않더라고."
"오빠라고 부르는 건?"
"오빠? 뭐부르려고 하면못 부를 것까지야..."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웃겨 죽겠다는 듯 부들부들떨리고 있는형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이나마 보이지않고 있는것은 최후의 양심일까.
"... 난 나름 진지하거든."
"아니, 대충 봐도쓸데없는고민인데."
"또 나중에 혼자서 발작하듯이 터져버리면어떻게 해."
딱히 호탕한 웃음소리가터져 나오거나하지는 않았다. 뾰로통한 내 목소리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잠시 어깨를 들썩거리던 형은, 흣... 흐읍... 하는 헛바람 삼키는 듯한 소리를 몇 번 내더니 어찌어찌 고개를들어 올렸다.여전히 입가에 남아있는 웃음기가 꽤나 고깝게 보였다.
"생리 때 말고는 딱히그런 적도없지 않았나. 그것도, 뭐 공감은 못해도 대충그럴 수도있는 상황이라고생각하고 있고."
"가족들안 보는곳에서 꽤나 여러 일이 있었지.술 마시다울었다던가."
"푸흡."
"... 웃었지 지금?"
"아니. 전혀."
숨길 생각도 없군, 이 사람.
"... 아무튼, 형은 모를지 몰라도 난 당장에 떠오르는 전과가 몇 개나 있으니까. 불안하거든. 나도 예상 못할 타이밍에 대뜸 나도 모르던 스위치가 눌려서펑 하고터져버리는 거."
내려두었던 커피를들어 올리며,야트막한 한숨을 흘렸다. 내뱉은 만큼되삼키는느낌으로 들이킨 숨에는, 밍밍한 맛과는 어울리지 않는 꽤나커피 같은커피향이 풍겨왔다. 그럴듯하게 표정을 관리하나 싶던 형은, 그러고도 한참을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얕고 짧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오빠라고 한 번만 해줘봐."
"싫어."
"왜?"
그리고, 그런 침묵이 꽤나 길게 이어진 끝에. 간신히 열린 형의 입이 퍽이나어처구니없는소리를 흘려댔다.째릿눈살을 찌푸리자, 오히려 형 쪽에서이해가 안 된다는듯 반문해오는 통에 오히려내 쪽이당혹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 왜냐니, 싫으니까싫은 거지.새삼왜 그렇게당당하대."
"그러니까, 왜 싫은데?"
왜싫냐니...그야.
"... 그야, 부끄럽잖아, 그런 거. 새삼 호칭을 바꾼다는 게."
"그것 봐. 역시 별로신경 쓸일도 아니잖아."
"... 이번엔내 쪽이,도대체 이것과 조금 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싱긋웃음 지어 보인형이, 기름기 묻어있는 수저와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싱크대로 향하는 뒷모습을, 대답을 기다리듯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싫다, 역겹다 도 아니고 부끄럽다 정도면. 날 때부터 남매였던 녀석들 사이에도 종종 있어. 오빠한테 오빠라고 부르기 부끄럽다고 야, 라거나 이름으로 부르거나 하는 경우."
"... 아?"
"내가 보기에 네 고민이라는 거, 딱그 정도라는거야.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뜨거운 물 쪽으로휙 돌아간 손잡이가 슬쩍들어올려졌다. 차가운 물을 내뿜기를 잠시. 곧이어 김이 피어오른다 싶었을 때, 손잡이가 다시금 휙. 아래로 내려졌다. 김 날 정도로 뜨거운 물을 울컥울컥 토해내던 헤드가, 뚝. 입을 다물었다.
"나도 여자팝송 같은거불러보고 싶은곡 많아. 원키로 시원하게 고음 지르면서. 멋있잖아.너도, 굳이이제 와서새로운 곡을 찾기보단남자였을 때부터불러보고 싶었던곡들로골랐을 테고."
... 확실히, 썩 고민안 하고좋았다 싶었던 곡들로골랐었기야하지.
"이제 나름 여자가 됐으니, 상상했던 것처럼 멋지게불러보고 싶었겠지.근데 난, 네가 옛날부터 노래랑은 영 연이 없는 녀석이었다는 걸알고 있거든."
"윽..."
"남자인 채로 남성부 노래를 불러도 넌 지금이랑 똑같았을걸. 괜히 당치도 않게 남자다운 목소리 내보겠다며 목소리 깔다가 비웃음이나 당하고. 뻔하지 뻔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굳이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싱크대를 등진 형의 발걸음이 느릿하게 부엌의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엄청 단순하게 말하네."
"그야 단순하게 생각하는 쪽이나을 테니까."
형의 발걸음이 잠시멈춰 섰다.슬슬 출근 준비를 해야겠다는 듯, 형의 표정은 어느샌가 평소와 같이 적당한 피로감에 찌든 썩봐줄만하게생긴 회사원의 그것으로 돌아가있었다.
"아니면 또 어때. 즐겁고 재밌었다며? 이참에 즐겨버리면 그만이지. 진짜로 즐겁고 재밌는 일만 하는데, 기분 상할 일이야 있겠어?"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다시금 형의 발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여준 미소는, 기껏 해봐야한 손가락으로샐수 있는차이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연륜이 느껴지는 그런미소였다...는생각이 들었다.
"... 오빠, 좀 멋있네."
"어? 뭐라고?"
"형 출근 늦겠다고. 벌써 25분인데."
"오쒯."
한껏폼 잡으며느릿하게 멀어지던 형의 뒷모습이,멀어져 가는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조금 전에 내뱉은 말을 되새기듯,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어보았다.
역겹고 혐오스럽고 그런 것보다는...
"... 응. 들키면 좀, 많이 부끄럽겠다는생각뿐이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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