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1화 〉 外.힐러해요(4) (121/125)

〈 121화 〉 外.힐러해요(4)

* * *

10.

"■■■■■■!"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광인은 재차 도전자들을 향해 뭉툭해진 창 끝을 향했다. 흘러내리는 피는 달빛을 닮은 창백한 붉은색.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치사량의 피를 도전자들을 향해 헌납했음에도, 광인의 움직임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분노를 더해가증스러운도전이 자신의 주인에게로 향하지 못하도록 쓰러져있던 몸을 다시금일으켜 세울뿐.

너덜거리는 몸뚱이는 이미 한계를 알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창을 부여잡은 손이 풀리지 않는 것은, 오로지 광기에 가까운 신앙심이 그의 몸을지배하고 있기때문이었다.

눈앞에 적이 있다. 가소롭게도 존귀하신 그분께칼 끝을들이미는 도전자들이 눈앞에 서있었다. 그 간악한 무리가, 아직도 살아숨쉬며무기를 꼬나쥐고 있었다. 광인에게,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녀석도 이제는 슬슬 한계일 터! 슬슬 그릇이 무너지기 시작했다!이번에야말로정말로마지막인 게다!"

구경꾼인 하얀 소녀의 외침에 따라, 도전자들은 다시금 손에 쥔 무기를 고쳐들기 시작했다. 어휘를 구사할 지성은 남아있지 않았으나, 상황을 이해할 지혜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소녀의 말대로, 아마도 길어봐야 앞으로 수 분. 면목없게도, 오늘 이후로 더 이상 존귀하신 분을 보필할 수는없을듯했다.

그렇다 해도.이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다만지고하신초승달의 영광 아래에­

11.

­와, 3페이즈 스크립트 읽어보는 날이 진짜 오네.

­진짜 비구름님캐리력미쳤음;

"스크립트는 영상 찍어올릴 거니까봐야 된다고미리 말해뒀잖아.공지 좀읽어라."

­공대 운영에 강제로공지 같은 거나읽게 만들다니 폭거다 폭거

­리얼루~

"씹... 손님 계서서 참는다 새끼들아."

1.5L짜리 생수병을들이키고 있던소갈비의 손가락이 재차 키보드를 향했다. 꽤나 공들여 넣은 CG와 카메라워크로 그럭저럭봐줄만하다는생각이 들었던컷씬이슬금슬금 끝나려고하고 있는와중이었다.

연신 새빨간 빛줄기가 난발하던 모니터가, 잠잠해졌나 하는 생각이 들때쯤돌연 새빨간 섬광을 토해냈다. 소갈비가빨간 섬광탄이라도 터진 것 같다는 감상을품고 있자니대충 보기에도 '나 굉장히 화났다'라고 말하는 듯 새빨간 오라로 범벅인 창잡이의 모습이 한 박자 늦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컷씬끝나는 것 같은데, 다들 다시 긴장들 하시고."

­긴장은 탱커만 하면되는 게?

­진짜 이딜싸개들이탱커의 고통을알까요?

소소한 웃음소리가 한바탕보이스 채팅프로그램을타고서 흘러갔다. 다들 정말로 아무런 긴장도 하지않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그런 척만하고 있는것일까. 모니터 너머.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할지도 모를 아바타의 모습으로밖에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소갈비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희 공대가."

최소한 소갈비자신만큼은이들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이제 겨우 1페이즈 깨고 2페이즈 트라이 시작했다는데. 그것도 우리 공략 보고 1페이즈넘어온 거라는데.우리는 벌써 3페이즈컷씬을보고 있어요."

­갑자기 왜 분위기 잡고 그래요 형.

"시발, 무슨 말을 못하게 해."

소갈비의 입이 웃음을 머금은 채 희미하게 휘어졌다. 이 나이 먹고게임 같은것에서 성취감을 느낄 일은 이제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단순한 데이터 쪼가리. 단순한 가공의 일.그 정도로치부할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쌓아올라 온것은 단순한 0과 1로 이루어진 숫자의 배열이 아닌 추억이며 인연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들, 그것을실체 없는허상이라 누구도 생각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눈앞에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모니터 속에보이고 있는이 풍경은 필시 그런 쌓아올려온 것들에 대한 기념비일 것이다.

"고맙다고, 새끼들아. 같이 와줘서.존나빡세게 달려줘서."

­공대장 님, 손님 계신데 이미지 관리안 하세요?

"좆까.이미 늦었어. 괜찮죠 비구름 님?"

Cumulonimbus : ㅋㅋㅋㅋㅋ 평소처럼 하셔도 괜찮아요.

쓰러져있던 광인이 붉은 안개를 가로지르며 몸을일으켜 세웠다.스토리 도입부 때부터 성녀와 함께 플레이어들을 따라다니던 은발의 미소녀 캐릭터가 '무기를 고쳐 쥐거라!이번에야말로마지막이니!'따위의 말을외치고 있었다.

"성녀님 구하러 가봅시다!"

컷씬이끝났다. 톱뷰 시점으로 돌아온 화면 위로, 다시금 익숙한 인터페이스들이 하나 둘자리 잡아가기시작했다.

12.

­비구름님 진짜 기가 막히시긴 한데...!

마우스와 키보드를누르고 있을뿐인데 지칠 수 있을까. 티어를올려야 한다며8시간 동안게임만 했더니 체력이 부족하다, 따위의 말을 하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종종 들었던 생각이었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무언가를 소모할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피로감은 정신적인 것에 기인한 것. 게임이란 정신적 스포츠. 분명,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와, 누나 진짜 기인이야?"

"조용히 해. 버프 타이밍 놓치면 이후로 사이클 쭉꼬인단 말이야."

약 3초간의 유예.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얼빠진 표정을짓고 있던상현이의 모습을 흘겨보며, 되는대로 말을 내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상에rpg겜레이드에서 서포터가 스톱워치에 메모장 3개씩 띄워놓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

"여기."

슬슬 손목이아파올지경이었다. 눈동자가 뻑뻑했다.기분 탓인지아닌지, 숨이 가빠져오는 것 같았다. 단순히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다지 사람이 피곤해질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난 지쳐가고 있었다. 3페이즈 돌입 후 2분. 메모장에옮겨 적을틈도 없이, 눈으로 체크한 변화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평타 패턴의 간격이 4초에서3초로 줄어들었다. 6번째 평타 직후 특수 패턴이 나온다는 규칙은 동일. 다만, 줄어든 6초의 여유 덕에 신속의 문장을 이용해 재사용 대기시간을 줄이더라도6번쨰평타 패턴 직전까지 딜을 욱여넣는 전술은 사용할 수 없다.

Cumulonimbus : 그러니까

Cumulonimbus : 5번째에딜컷

Cumulonimbus :ㄱㄱ

­확인했습니다. 오더 흘려듣지 마라.딜컷하라 할 때 뺀다. 1,2페이즈 패턴 혼용으로 나오니까 갑자기 퍼즐 기믹 튀어나오면번호대로12시, 6시 뛰어가서 구슬밀어 넣고.

­5번째안 나오는거 보면퍼즐기믹은배제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모르니까 주의하라고 새꺄.그딴 걸로어리버리치다 터지면 우리 힐러님한테 죄송하잖냐!

더욱이 빡빡해진 버프 관리. 필연적으로 생기는 버프 사이의 공백.데미지감소의 연쇄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어쩔 수 없는데미지의누적.HP회복스킬에 전담하게 되는 만큼, MP 회복 스킬의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어 빠르게 포션 사용 횟수의리미트가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꽉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으로여러 가지경우의 수들이 시시각각스쳐 지나갔다.이 3페이즈라는 것이, 정말로 단순히 1,2페이즈의 혼합에 보스 몬스터의 스펙을 상승시킨 것일 뿐이라면. 그로기 패턴이 있다면. 없다면. 최악의 경우, 이 템포대로 3페이즈가 끝날 때까지 달려야 한다면.

­아 죄송!

­힐러님 시프힐업!힐업!탱커!삼대백!포션 빨아! 힐 쿨!8초 동안힐 없어!

­도트힐에포션으로감당 안되는데요!

통상 패턴을 운 나쁘게 정통으로 얻어맞은 딜러에게 반사적으로힐 스킬이 사용됐다. 탱커의 잔여 포션 사용 횟수는 일종의 보험.지금 걸로몇 개가빠진 거지?3개? 4개? 보스 몬스터가 힘껏 창을 잡아당기는 모션을 취했다. 찌르기. 5번째 평타.

­5번째! 6번째 모션 보이면딜컷하고빠진다!

HP 잔여량의퍼센티지.파티의 소모 정도. 이미 자잘한 실수로 생긴 구멍을 메꾸기 위해 몇 번이고 사이클이 꼬인 뒤였다.2페이즈까지는전체적으로 최대 수치에 가깝게 관리되던 파티창의 HP들이 70%. 낮게는50% 근처까지낮아져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딜러진의포션 사용은 그야말로 여차할 때를 대비한 최후의 수단. 남은 것은 미미하게 이어지는 광역 힐에 기대어 자연 치유라도 되듯 천천히 HP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 실수가 생기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일 뿐.

아직은 무너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무엇보다도힐러인 나 자신의 유예가 착실히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내 캐릭터의 MP가 바닥나면.딜러진의HP 포션이바닥나면. 그때까지, 레이드를 끝내지 못하면.

­6번째!

몬스터의 공격에 맞춰 탱커 캐릭터인'삼대백'에게일시적인 방어력 증가 버프를 시전한다. 이전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던MP 소모조차도압박감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무리다. 도저히 지금보스 몬스터의 HP가 깎여나가는 속도로는 클리어할 수 없다.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실패 2글자가 떠올리면서도, 눈으론 바쁘게 보스 몬스터의 움직임을 쫓았다. 1페이즈에서 보여줬던 십자 패턴이 나올까. 2페이즈에서 나왔던 부채꼴 공격에 더한 무작위 낙뢰? 아니면 도넛형?이번에야말로퍼즐 패턴? 아니면­

『초승달에 빼앗긴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가?』

갑작스럽게 검붉은 색으로 물드는 화면 위로 그런 처음 보는 텍스트가 떠오른 것은, 그 순간이었다.

13.

­... 비구름 님, 다시 한 번만 해보실래요?

Cumulonimbus : 네

단순히강화 패턴의연발만은 아니길 빌긴 했지만, 이런 상황은 정말로 상정 외였다.쉬지 않고돌아가던 스톱워치를 멈춰둔 채, 눈앞의 화면으로 다시금 시선을 향했다. 망가진 저택 내부가 아닌, 어딘가 탁 트인 평원으로 보이는 공간.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 홀로 서있는 캐릭터의 모습. 그리고, 초승달 모양의 그림자.

탁 트인 공간 위에 어색하게 뚫린 구멍처럼 나타나있는 그림자를 보고서 내가 취할 행동은 지극히 단순했다. 누르셔야진행돼요~라고말하듯 떠오르는 상호작용 버튼을 누르고, 클로즈업 되는 초승달 모양의 그림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테트리스라도 하듯 나타나는빛 덩이를그림자 모양에 맞춰 채우면 될 뿐이었으니까.

... 내가 할 행동은 그게 전부였지만.

­와 나,돌아버리겠네.

­이걸 타이밍을 어떻게 맞추냐.

­일단 카운터를 터트려봐야어떻게 되나알 수라도 있을 것 같은데,삼대백님이 버프 풀로 두르고 계속치고 있어보는 건어때요?

­3초면 갈려요 져.

­후... 죄송합니다, 비구름 님. 한 번만 다시 해봐주실래요?

Cumulonimbus : 네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별개의 공간에 날아와있는내 캐릭터가이 퍼즐을 완성시키는 시점에, 여전히 공대원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보스 몬스터가 짧은 유예시간 직후회피 불가능한 전범위 공격을 가한다는 모양이었다.

서로가보고 있는정보를 공유한 끝에 얻은 결과는, '혼자 떨어진 유저가 퍼즐을 완성시킨 시점에 카운터를 성공시키면 무언가 기믹이 발동되지 않을까?'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퍼즐을 맞추는 도중에는 시스템상 채팅을 칠 수 없고 나오는 조각의 모양이 랜덤이라 완성 타이밍을 재는 것도불가능하다는점이었고 말이다.

­비구름 님, 포션 몇 개 쓰셨어요?

Cumulonimbus : 이제 9개 째니까, 6개 남았어요.

­쓰읍...깨지는 못하더라도뭐 하는패턴인지는 알아 가고 싶은데.

시도할 때마다 내 캐릭터의 HP를 소모한다. 카운터에 실패하면, 나머지 캐릭터들에게도데미지가누적된다. 분명 이것만 해결되면 활로가 보일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왔는데.

Cumulonimbus :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어중간하게 잘린블록 같은빛 덩이가차츰차츰 초승달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1/3. 절반. 2/3.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이제 와서'이 정도만으로도충분히 즐거운 경험이었다'라며 만족할 수 있을까.

3조각쯤 남아있는 초승달의 공백을 바라보며,마른침을삼켰다.

마이크를 켰다.

이대로는 분명, 오늘 밤 편하게 잠들지 못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스쳐 지나갔고.

"2조각 남았어요."

­엗.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1조각."

마지막 남은 공백.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내 조작에 따라 유일하게 남은 빈 공간을 향해 떨어져내리는빛 덩이.여전히 맹한 표정의 내 캐릭터. 모니터 속의 풍경을 하나 둘 눈에 담으며, 나는 재차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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