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26. 겨울도 따뜻할 수 있나 봄
26. 겨울도 따뜻할 수 있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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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컨 갤러리][이번 대통령배를 봐야 하는 이유.jpg]
(사진)
무려 여자 챌린저(예쁨)가 대회에 참가하기 때문
ㅇㅈ?
천체 댓글 77개
— ㅇㅇ(213.43)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ㅇㅇ(54.124) : ㅇㅋ 이유 합리적
— ㅇㅇ(114.134) : 예쁜건 인정이지 ㅋㅋㅋㅋㅋㅋㅋ
— 브라운 : 대리나 그런거 아님?
└ dd (43.114) : 본인 맞다는데
— ㅇㅇ(124.133) : 그냥 아이디 같은거 아니야?저렇게 예쁜 애가 챌린저를 단다고?
— ㅇㅇ(227.133) : 요즘 챌린저들 다 좁밥이노 ㅋㅋ 혜지한테 다 따였노
└ ㅇㅇ : 응 다음 브실골
└ ㅇㅇ(220.101) : 응 쟤랑 붙으면 0/3/0
└ ㅇㅇ : 0/3/0은 무슨 ㅋㅋㅋㅋ 0/30/0이겠지 ㅋㅋ
인터넷이 시끄러워졌다.
비단 진겨울의 외모가 뜬 것만 아니라, 그녀가 과거 화송고 대회에서 했던 발언까지 재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진겨울은 일순 리갤의 반짝 아이돌로 떠올랐다.
물론 중계되는 대회까지 아직 기간이 남아있다 보니 그것도 잠깐.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2018 CCK 서머 시즌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이번 시즌에도 이도진이 몸담고 있는 현성 유니버스가 성적을 죽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진겨울의 소문에 날개를 달아줬어야 하는데, 이도진이 이슈를 다 끌어모으다 보니 진겨울에게 쏠릴 시선도 연기처럼 날아가버렸다.
그래서 오늘도 리갤은 장재홍을 칭송하고, 이도진을 까느라 정신없다. 양 팬덤이 나뉘어 죽어라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 진겨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별 거 없었다.
리그 오브 컨실 플레이.
그리고 매주 월요일에 있는, 이도진과의 행동 교정 연습이었다.
“인터뷰 예상 질문을 해볼 테니, 적절히 대답해봐.”
“응.”
교정이 이루어지는 곳은 주로 진겨울의 집이었다.
이도진이 그래도 나름 유명세가 있다 보니, 괜히 바깥에서 만났다가는 시선이 쏠려 귀찮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배 리컨 아마추어 대회 전국본선에 진출하게 되셨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진겨울은 첫 질문에, 그간 연습한 걸 토대로 자신있게 답변했다.
“여자로서는 처음 진출했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그저 리그 오브 컨실을 좋아하고, 즐기고, 사랑하는 유저 중 하나였으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제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명의 사랑받는 프로게이머가 되어 CCK 우승트로피, 더 나아가서는 월드 챔피언십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거죠.”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무척 깔끔하고 완벽한 발언.
진겨울은 짐짓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조금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 말을 들은 진겨울이 이도진에게 핀잔을 주었다.
“에이. 요즘 이 정도는 기본 아니야? 네가 너무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지. 좀 자신감넘쳐도, 그런 게 파이팅이라니까.”
“또. 너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아차.”
사실 인터뷰 쪽에선 그렇다할 문제가 없었다.
혼겨울의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지, 배도현까지 그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모은 것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지만, 배도현은 기본적으로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뇌지컬이 훌륭하게 탑재된 탑라이너가 배도현이었다. 그가 조리있게 구성된 말을 못 하는 것이 더 이상했다.
다만,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배도현은 남자였고, 20년 넘게 남자로 살았다.
“오빠.”
“…….”
그래서 오빠라는 단어는 부담스럽다. 언니도 마찬가지고.
진겨울은 손사래를 치며 대체어를 말했다.
“이도진 님.”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아……. 그게 좀.”
이도진은 의아할 따름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오빠라고 잘 불렀으면서.
심지어 기억도 되찾았는데 이제는 왜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단 말인가?
“오빠라는 단어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
어렵다고.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고.
진겨울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
애초에 형, 오빠, 이런 손윗사람 부르듯 하는 호칭을 쓸 필요도 없을 텐데. 그야 배도현의 원래 나이는 스물 중반이었으니 말이다.
“형 같은 소리 하네. 괜히 튀면 곤란하다고 말 했잖아.”
“아……. 진짜 싫은데.”
만약 진겨울이 데뷔하게 되면, 그녀는 원치 않아도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리갤에 상주하는 인간들은 심심한 사람들이다. 굴릴 떡밥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익숙한 떡밥을 찾게 되는 이들이 바로 리갤러들.
만약 진겨울이 유별난 모습을 보이면, 그건 무척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다.
이도진 떡밥이 벌써 몇 년째 굴러가고 있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이도진과 아는 사이의 여자 챌린저가 등장했다? 이미 떡밥 최적화 그 자체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진겨울을 물고 뜯고 씹고 맛볼 것이다.
그야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는 프로게이머들 특성상, 선을 완전히 넘어버린 댓글이 아니고서야 제재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빨리. 지금 연습 안 해두면, 분명 문제 생겨.”
“어떤 문제?”
“다른 윗사람들한테도 야, 너. 이렇게 부를 거야?”
“대부분 다 직함이 있잖아. 누구누구 감독님. 누구누구 코치님. 누구누구 선수. 그런데 오빠라고 부를 일이 뭐 얼마나 있다고?”
그 말에 이도진이 흠칫 하고 놀랐다.
진겨울답지 않은 지독히 논리적인 반박이었다.
“아 그… 친해지면! 다들 오빠 동생 하잖아. 그러니까 미리 연습하라는 거지. 너 만약에 같은 팀 멤버 중에 나이 많은 사람 있으면. 무슨무슨 선수, 이렇게 부를 거야? 그건 아니지. 팀원끼리는 서로 편하게 말해야 하잖아.”
“그럼 야라고 부르면 되잖아.”
“그건 안 된다니까?”
이상하게 오빠를 강조하는 이도진. 진겨울은 그를 보고 있자니묘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오빠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거야?’
예상가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도진과 혼겨울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오빠 동생 사이.
심지어 혼겨울은 이도진을 좋아해서인지 시도때도 없이 그에게 구애를 했다.
그러니 이도진에게는 혼겨울이 “오빠!” 하고 달려드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오빠라고 부르라 하는 것이다.
형, 또는 다른 호칭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 놈 이거…. 그렇게 밀어냈다더니, 사실은 오빠라고 불러주는 걸 좋아했던 거야…?’
괜히 이도진의 약점을 잡은 것 같아 진겨울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어쩌면 이걸 잘 이용하면, 그를적절히 구슬려 원하는 대로 이용해먹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빠라는 호칭을 쓰는 건 정말 싫지만, 그걸 이용해 이도진이라는 거물 프로게이머를 자유롭게 조종할 수만 있다면야.
진겨울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로 결심했다.
“오빠!”
“… 어. 그래. 좋네.”
이도진의 얼굴이 순간 붉어지는 걸 보며, 진겨울이 속으로 웃었다. 그를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게임밖에 모르는 어린아이라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한 번써보니 그닥 부담되지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혼겨울이 워낙 자주 썼다 보니 혀와 입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빠.”
“어?”
“오빠. 오빠.”
게다가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이도진이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거리를벌린다.
진겨울은 아주 좋은 무기를 획득한 게이머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알지도 못한 사이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씩 약점을 쥐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최도윤에겐 사랑의 감정. 공제현에게는 공포의 감정. 유민재에게는 안타까움의 감정. 하정욱에게는 동경의 감정. 그리고 이도진에게는, 친애의 감정.
모든 사람들을 상대할 무기를 하나씩 쥐었지만, 그 중 유일하게 이도진을 다스릴 방법만을 제대로 깨달았다고 할까.
“게임하자.”
“… 그럴까.”
그래도 역시 오빠라는 단어를 여기저기 마음대로 쓰기엔 거북하다.
혼겨울도 이도진 외에는 오빠라고 불렀던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닐 런지.
그게 아니고서야, 유독 이도진에게만 호칭이 자유로운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니 말이다.
**
진겨울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 이도진은 갑작스러운 감정의 격류와 마주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좋긴 한데. 뭐랄까, 전에는 느끼지 못한 달콤한 향이 느껴졌달까.
진겨울이 아까같은 표정을 짓는 것은, 이도진도 처음 봤다.
어릴 적 진겨울은 한 마리의 개 같았다.
욕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정말 개처럼 달려들었다.
이도진이 보이면 일단 껴안으려 들고, 이도진이 온다고 하면 바로 현관 앞으로 달려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이도진이 간다고 하면 발목붙잡으며 가지말라고 질질 끌려가고.
그게 개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그때는 한창프로게이머로서 연습과 팀 관리에 온 정신을 할애해도 부족할 시기였다.
진겨울은 순수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겠지만, 그 시기의 이도진에겐 그것만큼 부담스러운 것이 없었다.
본업에 집중하려고 하면 실망했다는 듯 토라지고.
그렇다고 관심을 가져주자니 이도진에게 할애할 시간이 부족하고.
그러나 성격이 지랄맞은 그녀를 완벽히 방치하기에도 어려웠다.
한 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한 번 기억을 잃고 난 뒤부터는 사람이 변했다.
성격 개판에 제멋대로, 연습하라고 해도 연습도 안 하던 애가. 정말 이봄의 인격이 씌인 것처럼, 지독하게 차분하고 착실해졌다.
그뿐만이랴?
조금 전, 그녀로부터 오빠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었을 때.
이도진의 가슴 속 시들어가던 꽃나무에 다시 새 잎이 돋아났다.
이 나무는, 사실 오래 전부터 이도진의 마음 속에 뿌리내렸다.
정확히는 아주 어릴 적, 이도진과 진겨울이 처음 만났을 아주 어릴 적부터.
그러나 잘 자라던 꽃나무는 그가 프로게이머로 데뷔함과 동시에 커다란 돔 형태의 껍데기 의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졌다.
그렇게 햇빛을 차단하고, 물도 안 주기를 몇 년.
이도진은 여동생을 잃었고, 그의 마음이 크게 뒤틀렸다.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 크나큰 지진으로 인해, 진겨울이 키웠던 꽃나무를 가둬둔 쉘터의 벽이 박살났을 줄은.
그 박살난 틈으로 진겨울의 따스한 햇빛이 다시 날아든 순간,죽어 가던 꽃나무가 바닥에 더 강하게 뿌리를 내릴 줄은.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불러달라 했던 ‘오빠’라는 호칭. 그것이 이도진의 가슴에 또 한번 지진을 일으켰다.
쿵. 하고 뒤흔들리는 쉘터의 벽.
오빠,오빠, 오빠 하는 몇 번의 거대한 충격이 쉘터를 완전히 무너트렸다.
[진겨울]
— 진겨울 : 다음 주에 봐
— 진겨울 : 힘내고
— 진겨울 : 저번 주 경기는 좀 보기 그렇더라. 라인전 최악이던데?
— 진겨울 : 요즘 되게 집중 못 하는 느낌이긴 한데, 알아서 잘 할 거라 믿어
— 진겨울 : 집중 좀 하라고
평소에는 익숙한 동성친구처럼 털털하면서도, 헤어진 뒤에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마음관리.
이도진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써야 했다.
‘… 어른이 됐네. 확실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요즘 진겨울의 발육상태도 남달랐다. 애써 무시했기에 몰랐는데, 올해 18세의 진겨울은 이미 여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여름이라 이도진을 보러 올 때마다 얇은 티셔츠와 짧은 3부 바지만 입고 오는데, 그 때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벅지로 향하는 것을 막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뿐만이랴. 이상하게 좋은 냄새도 났다. 어른의 향기라고 해야 할까. 뭔가 보드라우면서도 코 끝을 간질이는….
그러나 이도진은 속고 있다.
진겨울이라는 사람이 이도진에게 사적인 감정과 애정을 가질 리도 없을 뿐더러.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도진을 어떻게 이용해먹을지에 대한 고민 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