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39. 강제로 쉬게 되었나 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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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강제로 쉬게 되었나 봄 (3)
성미 급한 진겨울에게는 하루 반나절도 너무 길었다.
그녀는 다음날 최도윤 몰래 유민재를 불러냈다.
“누나, 미안. 늦었지.”
“아냐. 제때 왔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진겨울은 혹시 유민재를 쫓아온 사람이 없는지 한참 동안 주변을 살폈다. 그녀가 쉬는 날인 걸 최도윤이 모를 리가 없는데, 유민재가 쉬러 나왔으니 당연히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다행히 한참을 둘러봐도 최도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진겨울이 다시 유민재에게 돌아왔다.
“누구, 더 올 사람이라도 있어?”
“아냐. 가자.”
마음이 급해지니 발걸음도 빨라졌다. 뒤따르는 유민재를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은 채, 진겨울은 목적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짧은 거리를 주파해 도착한 곳은 평범한 피자 뷔페였다. 조금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키는 사이, 한발 늦게 도착한 유민재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 급해!”
“아무도 안 쫓아왔지?”
“이렇게 뛰었으면 당— 악!”
진겨울의 손이 유민재의 손목을 잡아 매장 안으로 이끌었다.
몇 분이냐고 묻는 점원의 질문에 검지와 중지를 펼쳐 대답한 진겨울이 빠르게 앉을 자리를 물색했다. 사람들 많은 곳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이미 어제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었다는 걸 몸소 체험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유민재의 인상은 상당히 독특한 편이라 같이 있으면 어그로가 두 배로 끌린다. 그러니 구석, 최대한 구석으로 가야만 한다.
“여기가 좋겠네.”
“음식 나오는 데랑 너무 멀지 않아?”
“전혀.”
이 정도 거리야 움직이면 소화되고 딱 좋지. 진겨울은 휴 하고 긴 숨을 내뱉은 뒤 대뜸 유민재에게 물었다.
“민재야.”
“응?”
사뭇 진지한. 그야말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결의에 찬 표정이다.
유민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프로 데뷔가 가까워지는 와중, 진겨울에게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걸까 싶어서.
그러나 그녀가 대뜸 던진 말은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 도윤이가 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 어? 어. 대충은?”
메뉴를 물으러 온 점원을 통해 주말 뷔페형으로 결제를 마친 뒤, 진겨울은 눈앞에 내려지는 둥근 접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말렸어야지. 너 정도면 알고 있었을 거 아냐.”
“… 아.”
도윤이 신경 쓰는 것도 내 일이었나? 유민재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유민재도 다소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분명히 진겨울과 너무 가까워져서 좋을 것 없다고 최도윤에게 경고하지 않았는가? 그걸 무시하고 계속 진겨울에게 앵긴 것은 최도윤이다.
“그… 안 말린 건 아닌데. 미안해 누나. 내가 좀 더 확실히 이야기했어야 했나?”
“… 아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아.”
“아냐. 누나 지금 대회랑 연습에 집중하기도 바쁜데, 내가 미처 신경을 못 썼네. 내 잘못이야.”
“아냐. 아냐아냐. 아냐….”
뭔가 이 답답한 감정을 토로할 곳이 없어 그나마 믿음직스러운 유민재에게 털어놓은 것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정답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진겨울은 괜한 말을 했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최도윤 그거, 내가 자기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더라.”
흥분한 진겨울의 말을 듣던 유민재가 허, 하고 탄식했다.
계속 같은 팀에 있어서 알고 있다. 단언컨대 진겨울은 단 한 번도 최도윤을 유혹하거나, 그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황당했는지 유민재의 입술 틈으로 말이 새어 나갔다.
“…. 어떻게 하면 그런 오해를 하지.”
“낸들 알리?”
팔꿈치를 테이블에 받친 채로 손으로 이마를 토도독, 토도독 두드리는 진겨울의 매끈한 손가락. 나머지 한 손은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걔 상처 안 받게 오해 풀 수 있을까?”
그렇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척 급박한데도, 어떻게든 팀원만큼은 챙겨주고자 하는 저 마음이 자애롭기까지 하다.
삶에 미련이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세상을 마주하지만, 그런데도 그 검은 낯빛 뒤에는 따뜻한 마음씨를 품고 있구나. 그렇기에 모두가 그녀를 겨울로 알고 있으면서도, 다가올 봄에 이끌려 이 팀에 들어왔구나.
생각의 정리를 마친 유민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오해였다고 말해 주면 금방 풀릴 거야.”
“… 정말? 저번에 보니까 나를 조금 좋아하는 게 아니던데.”
“괜찮아. 첫사랑도 아니고. 이미 전에도 비슷한 일 겪어본 적 있어서 괜찮을걸.”
의외로 최도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구나. 진겨울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실 유민재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을 뿐이다. 학교에서 올해 초에 최도윤이 저지른 바보짓은 이미 전교생이 다 알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전에도 크게 오해한 적 있거든. 같은 반 여자애한테 누가 몰래 초콜릿을 선물했는데, 걔가 먹을 생각 없다고 마침 옆에 있던 도윤 형한테 줬단 말야. 그런데 걔가 학교에서 손에 꼽는 미인이었고… 그때부터 오해가 시작됐지.”
아름다운 미소녀는 의미불명의 초콜릿을 먹고 싶지 않아 짬처리했고. 그걸 받아든 최도윤은 제멋대로 그린라이트를 켜고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태운 행복회로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예쁜 애가 내게 초콜릿을? 마음이 있지만, 나같은 평범한 애한테 대놓고 주긴 어려우니까, 적당히 핑계를 대는 거구나! 하고.
오해는 한 달쯤 지나서 풀렸다. 최도윤이 그녀에게 전교생 보는 앞에서 고백한 덕분이었다.
진겨울을 좋아하기 시작한 이래로 최도윤이 직접 뭔가를 말하지 않고 겉돌기만 하는 건, 그때 느꼈던 쪽팔림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진겨울이 직접 좋아한다고 말해 줄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틸 생각이었던 것이다.
“진짜 황당하네.”
“…. 같은 일을 두 번이나 목격한 나는 어떻겠어. 그래도 이번엔 사정이 좀 나아. 최소한 형이 고백은 안 했잖아?”
“그랬으면 주먹부터 나갔을 것 같다.”
다짜고짜 죽빵을 날렸을 거라는 진겨울의 말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앙다문 입술을 보아하니 정말 때릴 생각이었다.
“일이 안 커져서 다행이네.”
유민재는 최도윤의 오해가 이 정도에서 끝나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러나, 유민재에게도 확인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얼마 전 노래방에서 알아낸, 진겨울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뭐 그건 누나가 말해 주면 풀릴 테지만… 누나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건 왜?”
“아니. 전에 노래방 갔을 때 노래 불렀던 거…. 뭔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꽤 애절했잖아.”
봄이를 그리면서 불렀던 그 노래를 말하는 거구나. 진겨울은 대답을 고민해야 했다. 대뜸 소꿉친구를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이야기하면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던 진겨울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는 제멋대로 생각을 확장할 수 없는 완벽한 대답을 떠올렸다.
“아 그거. 도진 오빠 말하는 거야. 근데 이제는 안 좋아해. 그래서 부른 거야. 난 이제 누구랑 연애할 생각 추호도 없어.”
다시 생각해도 정말 최고의 대답이었다.
실제로 혼겨울이 이도진을 좋아했었고, 이제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 제목이 ‘끝사랑’이었으니 다른 누군가를 더 사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에도 딱이었다.
진겨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민재를 바라봤다.
“아… 그렇구나.”
그러나 그 말은 유민재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도진 선수를 아직 좋아하는데… 자기가 곧 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가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기에 그 측은지심이 진겨울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유민재.”
“… 어?”
5개월 전쯤 헤어졌으나 지금도 계속 그에게 집착하는. 유민재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뭐야. 송유라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너 따라왔다. 어쩔래.”
“아니 그러니까 날 왜 따라오냐고.”
진겨울은 뜬금없이 벌어지기 시작한 유민재와 송유라의 실랑이에 눈을 끔뻑였다.
전 여자친구인가?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는, 어차피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게다가 밥 먹을 시간이라 허기지기도 하고, 고민하던 것도 해결되어 만족스러운 상황. 진겨울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민재야 나 먼저 먹고 있을게. 할 이야기 있으신 것 같은데 이야기 나눠.”
“… 누나? 누나?!”
유민재가 황급히 진겨울의 손목을 낚아채려 했지만, 그녀는 히죽 웃으면서 절정의 피지컬로 슬쩍 피해 뷔페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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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재와 헤어진 지 오늘로 4개월 하고도 몇 주. 계속 참고 참았지만, 오늘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지금 송유라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유민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게 바보 같은 집착이라는 것을 안다.
미련하고 답답한 행동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질척거려 봐야 나빠지는 건 본인 이미지라는 걸 알면서도, 집착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걸 어떡하겠는가. 송유라에게 유민재는 그만큼이나 다시 만나기 어려운 훌륭한 남자친구였다.
꼬박꼬박 중요한 일정 잘 챙겨주고, 뭔가 하자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주고, 무뚝뚝하긴 해도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야말로 좋은 남자친구의 표본이었다.
‘유라야, 이제 헤어지자.’
‘왜. 왜?’
‘내년까지 프로가 되어야 하는데, 연애하면서는 안 될 것 같아. 하루 종일 연습만 해도 힘들 것 같거든.’
갑작스러운 연애 종료 선언을 들었을 때도. 뭐든 맞춰주겠다고. 석 달에 한 번 만나도 괜찮으니, 헤어지는 건 싫다고. 그렇게 애걸복걸했었더랬다.
‘미안해. 어쩔 수 없어. 내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때 다시 만나자.’
‘그, 그때…. 그때 네 옆에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만약 그렇다 해도. 네가 그때도 날 좋아한다면. 다시 사귀어 줄게.’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더 붙잡냐고.
송유라는 눈물을 머금고 유민재를 보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더 멋진 여자가 나타나도, 유민재의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다시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목덜미를 간질이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유민재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다 보니 결국 이런 광경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둘이 사이좋게 피자 뷔페? 다른 팀원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단둘이?
그뿐만이 아니다. 유민재의 파트너는 학교에서 외모로 손에 꼽히는 송유라를 애호박으로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반짝거리는 카키색 눈동자를 덮은 풍성한 속눈썹. 살가운 미소를 띠고 있지 않은데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눈매와 고혹적인 인상. 천연의 밝은 갈색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매일 관리하는지 촉촉하게 찰랑거린다. 보고만 있는 데도 초콜릿 향이 날 정도로.
“유민재.”
“… 어?”
이렇게 된 이상 송유라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팀에 이렇게 예쁜 선수가 있다는 건 최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여자와 유민재를 그냥 두었다간, 송유라는 절대 유민재와 다시 연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위험해 보이는 여자였다.
“뭐야. 송유라 네가 왜 여기 있어…?”
“왜? 너 따라왔다. 어쩔래.”
“아니 그러니까 날 왜 따라오냐고.”
송유라는 굳게 마음먹었다.
저 여자와 사귀지 않을 것이며,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다시 너와 사귈 것이라는… 유민재의 확답을 이 자리에서 반드시 듣고 말겠다고.
그런데.
그래야 하는데.
마주친 여성의 시선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게다가 그녀는 입가에 송유라를 가소롭게 여기는듯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내가 우습나? 나 같은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이건가?
“민재야 나 먼저 먹고 있을게. 할 이야기 있으신 것 같은데 이야기 나눠.”
“… 누나? 누나?!”
심지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의 할 일을 하겠다는 듯한 저 위풍당당한 태도까지.
예상 못 한 공격에 분노한 송유라는, 건드려서는 안 될 위험한 여자에게 싸움을 걸고 말았다.
“야!”
앙칼진 목소리가 홀 안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진겨울은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걸음은 당당하고도 고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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