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빌 메이든-100화 (100/296)

〈 100화 〉 52. 운명이 교차하나 봄 (1)

* * *

시상식이 끝난 직후 진겨울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배정웅 코치와 선수들의 입단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야. 이거 봐봐.”

공제현이 진겨울 단독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선수들에게 묻는다.

“니들은 이거 보면 뭘 느끼냐.”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유민재가 눈을 반쯤 뜬 채로 되물었다.

“예쁘네. 평소처럼.”

실제로 사진 속의 진겨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해맑게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였다.

“아니, 너는 진겨울 시한부까지 생각했던 놈이 이걸 몰라봐? 최도윤 너도 모르겠냐?”

시한부라는 말에 유민재가 크악, 하고 소리 지르며 공제현의 목을 졸랐다. 그러면서도 사진 속 진겨울의 표정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핀다.

“어… 좀 더 밝아진 느낌이네?”

“그렇지? 그렇지?”

드디어 내 마음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며. 공제현은 유민재의 손을 떨쳐내고 젠체했다.

“뭔가 누님이 드디어 좀 사람다워진 느낌이랄까.”

“듣고 보니 좀 그렇긴 하네.”

최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전에는 ‘프로 데뷔, 프로 데뷔’라고 반복적으로 같은 말만 내뱉던 목표밖에 모르던 영혼 없는 인간처럼 굴었다면. 사진 속의 진겨울은 그야말로 뭔가를 성취해 기쁜,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이렇게 행복하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야 거의 처음이야.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누님이 우리 앞에선 항상 엄근진모드였잖냐.”

“하긴.”

어느새 이불킥의 고통에서 벗어난 유민재가 다가와 한마디 거들었다.

“시한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급했던 건 맞는 것 같아. …뭐가 그렇게 급해서 그런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제 입으로 시한부라는 단어를 꺼내는 걸 보니 멘탈 회복은 어느 정도 된 모양.

공제현이 이죽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뭐. 사실 프로게이머라는 게 그렇잖아. 한 철 장사지. 최대한 돈 빨리 땡기고 부자 돼서 은퇴하는 게 다들 목표 아냐?”

그 말에 모두의 날 선 시선이 날아들었다. 발언에 담긴 의미를 인정하고 현실에 순응한 듯 착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한 사람, 하정욱뿐이었다.

아까부터 우쭐한 태도를 견지하는 공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유민재의 일침이 날아들었다.

“나는 최대한 많은 타이틀 따는 게 목표야. 형처럼 그렇게 돈에 미친 게 아니고.”

공제현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누굴 돈에 미친 사람으로 아네 이게.”

“내기에서 맨날 돈 잃으면서 꼬라박는 거 보면 미친 게 맞는 것 같은데.”

“…. 그건 할 말이 없다.”

시무룩해진 공제현이 고개를 숙이니, 관중석에서 날아드는 따가운 시선이 그를 반겼다.

가오슝에서의 첫날. 그리고 이틀 전 첫날 경기 후에 자신에게 3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의 계약을 제안했던 남자.

장재홍이 저만치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제현을 부르고 있었다.

“나, 화장실 좀.”

“갔다가 숙소로 와. 코치님이 다 같이 관광이나 좀 하자더라.”

“어, 알았다.”

그는 빠르게 무대 옆에 난 길을 돌아 장재홍에게 향했다.

여유로운 표정의 남자가 반갑게 공제현을 맞이했다.

“마음의 결정은 내렸나요?”

“…. 계약서를 보여주세요. 저도 바보는 아니거든요? 일단 제대로 된 계약인지 확인해야 결정을 내리든 말든 하죠.”

공제현이 내놓은 요구는 꽤 합리적이다. 세상에 누가 계약서도 보지 않고 대뜸 계약한단 말인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발생하는 손해는 오로지 서명한 계약자 본인의 몫이다. 그렇기에 항목 전체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필수고.

의심 가득한 공제현의 눈동자가 메고 있던 백팩을 뒤적거리는 장재홍을 바삐 살핀다.

잠시 후 계약서를 꺼내 들며 다시 정면을 향하는 장재홍의 시선 속에서 오늘도 보이는 천사.

‘도대체 뭐지?’

확실히 그의 행동을 통해 눈동자 속 존재의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달까. 한참 동안 계약서를 읽어 본 공제현은 깨달았다.

장재홍이 건네준 계약서는 그 어떤 독소조항도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의도의 결정체. 천사가 건넬 법한 계약서였다.

네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 줄 테니, 나의 손을 잡고 날아오르란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반면 진겨울은 어떨까. 공제현은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지내 왔던 시간을 떠올리며 미래를 예상해 봤다.

‘있으면. 갚아줄 거야?’

‘고민 좀 해보고.’

진겨울이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다. 고민이야 좀 하겠지만, 그녀는 아끼는 팀원을 도와주기 위해 거리낌 없이 손을 보탤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엔 악마가 잠들어 있다. ‘은퇴할 때까지 나와 같은 팀에 있어라’ 따위의 고약한 조건을 내걸겠지.

그래도 마냥 나쁜 제안은 아니다. 진겨울만큼 게임 잘하고 예쁘기까지 한 선수 곁에서 계속 함께할 수 있다? 이름값을 알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명성을 얻게 될걸.

“… 완벽한 계약서네요.”

그렇지만.

진겨울은 한때 공제현이 첫눈에 반한 상대이기도 했다.

1:1 대결을 펼쳐 본 순간 실력으로 그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녀에 대한 마음을 그 즉시 폐기해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아한다. 신경 쓰고 있다. 마음에 두고 있단 말이다.

평범함은 공제현에게 붙잡을 수 없는 별 같은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그의 집 사정은 팍팍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서, 아무리 혹독한 삶이라도 버틸 수 있었다.

남들 앞에서 조금 비굴해지면 어떻단 말인가. 돈 한 푼 두 푼에 목매면 어떻단 말인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인 걸 어쩌란 말인가.

문제는 그런 그조차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초라해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떠안고 있는 2억 5천의 빚과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계신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큰돈이 필요하다. 나와 몇억 단위의 계약을 해 달라.

이런 비참한 말을 진겨울 앞에서 어떻게 하냔 말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공제현은 확실한 결심을 내렸다.

“장재홍 선수는 이도진 선수를 싫어하죠? 진겨울 선수도 싫어하는 것 같구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

장재홍은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다 좋지만. 이 계약으로 제게 목줄을 걸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우리는 정정당당한 계약을 한 거니까요.”

제아무리 커다란 돈을 빚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계약일지라도.

공제현은 자신의 가치를 믿으며 당당하게 주장했다.

“이 계약서 어디에도, 장재홍 선수의 요구에 따라 제가 그 두 사람을 방해해야 한다는 말은 없잖아요? 제 말이 맞죠?”

장재홍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여전히 그의 눈동자 속엔 천사가 기도하고 있다.

“맞죠. 공제현 선수의 말이 옳아요.”

그러면.

“그런 걸로 알고. 부탁 하나만 더 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계약금. 4억으로 올려 주세요.”

집안의 빚과 엄마 병원비를 감당하는 데는 3억이면 충분하지만.

“저한텐 꽤 중요한 문제에요. 올려 주시면 이 계약. 받아들일게요.”

계속 함께 가자고 제안해 온 누님과의 신뢰를 저버리려면 3억 가지곤 부족했다.

여전히 신뢰하지만, 흔들릴 수밖에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금액. 공제현은 그런 합당한 핑계가 뒷받침되어야만 진겨울을 떠나 당신의 손을 잡겠다 선언한 것이다.

장재홍의 눈동자 속 천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띤다.

“네. 좋습니다. 올려드리죠. 이미 한 번 운도 띄웠겠다. 못할 건 없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제안하는 장재홍. 공제현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한국 귀국해서 바로 봤으면 좋겠네요. 저희 팀 사무국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거기서 다시 뵙죠.”

“네.”

“공제현 선수가 우리 Falcon에 합류하게 되어 무척 기쁘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에 그가 지은 미소는 천사라기보다는 타락한 루시퍼에 가까웠지만. 어차피 악마 진겨울과 계약하려던 공제현이다. 그런 게 신경 쓸 단계는 지났단 소리다.

“CCK는 세대교체가 필요해요. 우리 함께. 2019년 CCK를, 그리고 전 세계를 뒤집어 보자고요.”

장재홍이 아무리 악마를 모방하려 들어도, 그는 절대 누님이 가진 오라를 따라 할 순 없을 테지.

공제현의 마음속에 진겨울은 그만큼이나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

호텔 옥상 정원 위의 하늘은 강가에서 터지는 색색의 불꽃으로 아름답게 물든다.

그곳에서 진겨울은 아이허 강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바삐 통화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 빚이 있다고….”

— 응. 그리고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으신가 봐.

“어디가 아프신데?”

— 백혈병이신가 봐.

“…….”

집안 사정이 많이도 안 좋았구나.

턱 밑에 대어져 있던 진겨울의 손이 이마로 향한다.

“아직… 치료를 제대로 못 하셨겠지? 집안 형편이 안 좋으니까.”

—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셔서 완치가 안 된 모양이더라고.

제대로 비용을 지불해 확실한 치료를 받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병이 백혈병이다.

차가을을 통해 대략 확인해 본 공제현의 집안 사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도 몇천만 원에 달하는 치료 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워, 소극적인 치료만 받으며 병세 악화만 간신히 막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왜 이 녀석은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거지?

진겨울은 그와 보내온 시간을 되짚기 시작했다.

그러자 괴롭힘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머리채 붙잡고. 장난치고. 돈으로 후려치고.

‘… 이런 씨….’

말 안 할 만 했잖아. 진지한 이야기 꺼내기 어려운 환경을 구축해 놓고 먼저 말해 주길 바랐단 말인가.

배도현으로 살 적에는 하지 않았던, 진겨울이 되어 누리게 된 호사에 푹 빠진 나머지 제멋대로 굴다가 발생한 실수였다.

… 진겨울 성격도 한몫했고.

“공제현 그놈 성격상…. 내가 돈 준다고 하면 안 받겠지?”

수화기 너머의 차가을이 한숨 쉬며 대답했다.

— 그렇겠지. 음….

이어서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가 대충 얼버무리는 차가을.

진겨울은 공제현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걸 듣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말이라도 해 봐야 하나….”

— 응.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해야겠다.”

대만 올 때와 다르게, 돌아가는 비행기는 이코노미석 배열이 2/4/2다.

원한다면 공제현을 옆에 앉혀 놓고 진득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단 소리다.

어차피 다 같이 저녁 관광하는 동안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가능성은 적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과거처럼 주변 사람들을 챙기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진겨울은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펑펑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느낌상 정욱이도 그만둘 것 같고….’

모두가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히 마음 한구석이 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강바람을 타고 날아온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났다.

**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다른 선수들과 약속한 대로 가오슝 관광을 해야 하니 숙소에 돌아온 진겨울.

나갈 준비를 하며 무심결에 리컨 클라이언트를 확인한 진겨울은 당황스러운 결과를 목도했다.

【 영혼동화??化 】 【 비활성 】

─ 현재 기억 침식도 “진겨울, 50.74%”

─ 특정 추억록 달성으로 숨겨진 영혼동화의 부작용이 일부 드러납니다!

─ 기억 침식도가 50%를 넘어 '영의 운명'이 활성화됩니다.

분명 50%가 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50%가 넘어가 있는 기억 침식도.

추억록부터 확인해 보니 달성된 목표가 하나 있었다.

【 동행령(진겨울) ─ 추억록 】

─ 동행령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대신 해결했습니다. [4/8]

└ [4회/완료] 기억 침식도 +1.0% ***

└ [2회/완료] 기억 침식도 +0.5% **

└ [1회/완료] 기억 침식도 +0.2

도대체 뭘 해결했다는 건지.

혼겨울이 원하던 이봄에 대한 단서를 찾은 것도 아니다. 향초를 얻으려 했지만 그건 장재홍에게 빼앗기지 않았는가.

‘대통령배 대회, IeSF 월챔 우승한 거? 그래서 프로에 가까워진 게 문제 해결인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결과였다. 진겨울은 서둘러 떠 있던 알림을 하나씩 확인했다.

【 영혼동화 부작용 ─ 동행령(진겨울) 】

─ 이따금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 동행령의 습관이 몸에 배게 됩니다.

【 영의 운명 ─ 동행령(진겨울) 】

─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동행령의 습관이 몸에 밴다는 부작용이 추가되었고, 영의 운명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이 새로 나타났다. 능력은 아닌 것 같은데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니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심지어 조건 미충족이라 내용 확인도 불가능하다니.’

뭐 이런 불친절한 시스템이 다 있는지.

그러나 한편으론 다행이다. 50%가 되는 순간 뭔가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진겨울이 아닌가?

딱히 의식에 큰 뒤틀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몸에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회도 끝났고, 쉴 겸 울이랑 대화나 좀 할까….’

하지만 기껏 찾은 향초도 장재홍에게 빼앗긴 마당에 선수들도 있는 숙소에서 향초를 피워 혼겨울과 대화하다간 미친년 취급받지 않을까? 분명 울이가 한 소리할 텐데.

역시 집에 돌아가서 해야겠다고, 진겨울이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짧게 한숨 쉬던 그때였다.

— 나 불렀어?

“…….”

— 뭐지? 뭔가 전보다 주변이 맑게 보이는데…?

혼겨울의 목소리. 그러니까, 진겨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뭐야. 여기 대만이구나? 혹시 향초 찾았어? 응?

아. 착각이 아니구나.

“야, 너 어떻게 말하는 거냐?”

당황한 진겨울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최도윤이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나… 난 원래 말할 수 있는데?”

아차 싶어 진겨울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혼겨울이 당황한 듯 뇌까렸다.

— 나도 몰라. 무슨 일이야? 향초 피웠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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