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빌 메이든-135화 (135/296)

〈 135화 〉 69. 돌파구를 찾나 봄

* * *

대부분의 이도진 팬들은 말한다.

마지막으로 한번. 그가 세계 대회에서 멋지게 활약하는 걸 보고 싶다고. 그 뒤엔 깔끔하게 은퇴해도 여한이 없을 거라고.

안타깝게도 2018년 현성 유니버스의 성적을 보고 난 뒤 그런 팬들의 꿈은 반쯤 접혔다.

하지만 2018년 연말의 코리안 컵.

합류한 겨울 군단, 그리고 베테랑 김종하와 성공한 현성맨 이윤호의 활약을 보면서. 팬들은 다시금 행복회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도진, 앞으로 최소 3년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TU가 앞으로 세계 대회 몇 번은 더 이겨 주지 않을까?

다소 과한 것 아닌가 싶긴 해도, 팬들 행복회로 돌아가는 게 어디 국내 대회에서만 끝나겠는가. 최소 국제대회 우승까진 가야지.

그렇다 보니, BHQ 전이 끝나고 나서 진행된 이도진의 그 인터뷰는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직접 가르친 후배보다 못하면 확실히 여러모로 힘들긴 하겠네.’

‘그런데 잔소리한다는 거 보면 인게임 오더도 진겨울이 하는 거냐?’

‘이도진 진짜 은퇴하나?’

항상 은퇴 은퇴 입에 달고 살던 팬들도, 이도진이 진겨울에게 중요한 오더를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 듯한 인상을 주니 긴장한 것이다.

코어 팬층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일부는 이도진의 뉴튜브에 달려가 아직 은퇴하지 말아 달라는 댓글을 도배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팬들도 대충 눈치챈 것 같은데.”

“… 그러네요.”

“그러니까 왜 그랬냐 도진아…!”

“아악 악.”

김동균은 이도진의 바보 같은 짓을 나무라며 그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빙빙 돌렸다.

“형 믿고 좀 차분하게 가자니까. 왜 평소답지 않게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 보이고 그래?”

그야 겨울이 때문이죠. 라고 말했다간 김동균 감독이 뒤집어질 테지.

“아니 뭐. 팀 합이 잘 맞으니까,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렇죠 뭐.”

“흠….”

“아무튼, 바라시는 대로 겨울이가 부담 없이 말하기 시작했어요. 어째 저 욕하는 사람은 더 늘어난 것 같지만.”

“그만큼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많아졌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이도진은 멋쩍게 웃는다.

예나 지금이나, 지지해주는 팬들이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왔다. 그들이 보내주는 사랑에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드려도 모자라다.

“아무튼, 겨울이 쪽 문제는 일단 해결됐고. 문제는…. 스프링 때 로스터를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이제 TU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3월까지는 진겨울이 원딜러로 출전하지만, 그 후 다시 서브로 돌아온 진겨울에게 주어진 라인은 두 곳이다.

“종하 서브로 쓸지, 아니면 도진이 네 서브로 쓸지. 그걸 아직 결정 못 했지.”

이도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냥, 양쪽 다 보내는 건 어때요? 제가 부진할 땐 미드로. 종하 형이 부진할 땐 탑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로스터에 등록만 되어 있으면 그녀가 탑으로 가든 미드로 가든, 얼마든지 교체 기용이 가능하다.

당장 2019 스프링에서도 그녀는 로스터 상 원딜 포지션이겠지만, 교체는 전라인에서 다 가능하다.

하지만 가능성이 열려 있음에도 팀들이 이런 전략을 꺼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식스맨으로 투입되는 선수의 융화력. 그것이 항상 교체 전략의 발목을 잡는다.

원래 미드만 서던 선수를 임시로 탑으로 보내 봐야 본인 전력의 90%나 내면 다행이다. 그렇기에 이론상으론 가능해도, 식스맨을 탑과 미드에 번갈아 내보내는 것을 실현한 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겨울은 어떤가?

그녀는 프로로서 첫 데뷔전을 원딜 포지션에서 치렀으며. 두 번째 경기까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모습을 보였다.

공격적이지만 수비할 때는 확실한 유민재의 스타일을 그대로 계승함은 물론, 서포터인 이윤호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미리 캐치한 탓인지 라인전은 유민재가 출전할 때보다 더욱 강력했다.

오히려 유민재 쪽에서 배워야겠다고 말이 나올 정도다.

그녀를 탑과 미드에 보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탑에선 김종하, 혹은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고수하면 되고. 미드에서는 이도진의 스타일을 계승하면 된다.

심지어 미드는 부담도 적다. 그녀는 원래 미드라이너였다.

“가능은 하겠지만…. 겨울이가 엄청 부담스러워하겠네.”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텐데. 이도진은 코웃음 치며 김 감독에게 다시 말했다.

“아뇨. 겨울이라면, 그렇게 내보내도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여줄 거라 믿어요.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요?”

“왜?”

“이목이 끌리잖아요.”

이미 진겨울은 수많은 어그로를 끌었다. 전 세계의 꽤 많은 리컨 팬들이 진겨울을 안다.

CCK 최초의 여자 선수로.

이도진이 인정한 선수로.

주 라인이 탑인데도 바텀에서 날아다니는 선수로.

게임 잘하는 선수로.

그런데 얼굴도 예쁜 선수로.

게다가 진겨울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겨울이가 말을 안 해서 모르겠지만, 제 은퇴에 대비해 나름대로 준비하는 것 같아요.”

“그래?”

“지금, 어떻게든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는 것 같지 않아요?”

다른 선수들이었으면 부담스럽다고, 자기는 못 한다고 거절할 수도 있는 원딜 포변 제안을 선뜻 수락한 것은 물론.

요즘도 심심하면 이도진이나 김종하 대신 라인에 서서 팀랭에 참여한다.

“요즘 솔랭 돌리는 패턴을 한번 쭉 봤어요.”

“아. 그거 나도 봤어.”

“요즘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미드랑 바텀만 돌리더라고요.”

솔랭 돌릴 때 포지션 두 개를 선택할 수 있는데. 요즘은 주라인을 바텀으로, 부라인을 미드로 선택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간 제 자리를 완벽히 대체야 한다는 걸요.”

탑으로 데뷔했으니 당연히 탑 라이너로 정점에 서고 싶어 할 만도 한데. 진겨울은 굳이 탑라이너로만 지낼 생각은 없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팀이 원하면 뭐든지 하겠다는 프로 마인드가 과할 정도다.

“그렇지만, 그러면 겨울이 주관이 너무 없잖아. 겨울이 원래 저렇게 수동적이었어?”

수동적이라고 봐야 하나. 인게임에서는 능동 그 자체인데.

“환경을 딱히 고려하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수동적이라기엔 좀.”

“그런가. 흠. 그래도… 뭐라고 해야 하나….”

이도진은 겨울이를 과하게 의식하는 중이라 못 느꼈지만.

그녀를 데려온 이래로 계속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김동균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어린애치곤 너무 삶에 달관한 태도를 보여서 가끔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려던 이도진마저 그 말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고 있지 않은가. 진겨울의 몸속에 자신의 여동생이 함께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게임 중에 참다 참다 폭발하는 것도…. 다분히 봄이가 억누르다가 겨울이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고.’

선수들은 ‘분노조절장애’ 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내막을 아는 이도진에겐 좀 더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

“뭐, 괜한 걱정이겠지. 아무튼 다음 경기 준비 잘 해라 도진아. 이번엔 진짜 긴장해야 해. 이번엔 저번처럼 겨울이 반응 끌어내겠다고 무리하게 던지지 마라.”

“…. 장담은 못 하겠네요. 저는 안 던진다고 생각했는데 겨울이가 보기엔 쓰로잉일 때가 종종 있어서.”

망나니 여동생을 봄이가 통제해주는 건 다행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갑자기 겨울이를 여자로 보기 어려워졌다.

전에는 이도진 혼자만의 추측이라 흐릿했던 봄이의 이미지가, 방금 김동균 감독의 말로 또렷해진 것이다.

‘오히려 잘 된 건가.’

국제대회 타이틀 딸 때까지 겨울이를 방해해선 안 된다.

자꾸만 솟아오르는 겨울이에 대한 소유욕을 억눌러야 하는 참이니, 봄이를 떠올리는 게 도움이 될지도.

차라리 전처럼 아예 지랄맞으면 오죽 좋아. 요즘 겨울이는 이성적으로 지랄맞다 보니 자꾸 경계심이 풀어져서 문제다.

**

같은 날.

내일 예정된 Nowmad Gaming과의 2라운드 8강 경기를 준비하면서, 김종하가 진겨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 겨울이 네가 Deguri라고 생각하고 날 한번 패 봐.”

“…….”

그리하여 뜬금없이 시작된 모의 라인전 연습. 다른 플레이어를 곧잘 따라하는 겨울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아니, 내가 Deguri 선수도 아닌데 이런다고 도움이 될까?”

“야, 당연히 되지. 솔직히 너 나랑 미러전도 가능하지 않냐? 진짜 김종하 대 미친 김종하.”

“아니 어이가 없네. 왜 내가 미친 김종하야?”

“솔직히 또라이 파워에서 내가 지지. 인정?”

“존나 노인정.”

“캬하하!”

그렇지만 김종하가 마냥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진겨울은 유민재의 스타일을 카피해 바텀 라인에 서고 있지 않은가?

탑 라인은 그녀의 주 라인이니 그저 Deguri의 공격적인 라인전 스타일을 덧씌우기만 하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진겨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로 난색을 보였다.

“쩝…. 강제로 실력 너프해야 돼서 어려운데.”

“오. 내 스타일을 쉽게 흡수했다는 건, 나는 너프가 아니었다는 뜻?”

“아니 아직 흡수 중인데. 오빠 다 흡수하려면 스프링 시즌 끝나도 안 될듯.”

“아오 이거 진짜. 오빠한테 한 마디를 안 지네. 너 그래서 메이드복 언제 입을 건데?”

“아 안 입는다고!”

“팬의 사랑을 무시하기야!”

“메이드복 보낸 팬은 팬이 아니야. 안티지.”

“오…. 그 멘트 뭔가 마음에 드는데. 나중에 나 갠방할 때 써먹어야겠다.”

그래도 김종하가 워낙 편하게 대해주는 게 있어서 그런가, 다른 어떤 선수를 상대할 때보다도 마음이 가벼웠다.

이윤호는 묘하게 진겨울을 배려하고.

이도진은 꽤 불편하게 진겨울을 의식하고.

최도윤과 유민재야 이젠 별로 신경 안 쓰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신경하게 대할 순 없어서 진겨울 쪽에서 불편하다. 오해한 전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김종하와 이야기하다 보면 리컨 좀 하는 남자 놈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 된다.

심지어 팀의 맏형이라서 이도진도 함부로 못 대하기 때문에 좀 어울려도 전혀, 전혀 문제가 없다.

이윤호랑 같이 바텀 라인 서야 해서 좀 친해지려니까, 바로 견제 들어오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자 아무튼. 간다!”

1라운드에서 Nowmad의 탑라이너 Deguri가 꺼낸 카드는 총 세 장으로, 각각 우르고트, 빅투르, 라이스였다.

아마도 김종하는 밴픽 전략상 내일도 우르고트를 픽하게 될 확률이 높으니, 일단 빅투르를 픽했다.

이도진이 리산드리아 말고 다른 픽을 해야 김종하가 우르고트를 안 할 텐데.

아니다, 그러면 더더욱 우르고트를 해야 하나? 반반 가야 하니까?

여태껏 계속 우르고트만 했으니 저러다 칼챔 금단증상이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어 뭐야, 너 너무 킬 각 주는 거 아니냐?”

Deguri처럼 해달래서 해 줬더니 바로 저런 말이 나온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본인도 본능적으로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Deguri 선수의 라인전은 파괴적이지만, 그만큼 그는 공격적인 포지션을 자주 잡는다.

적에게 절대 여지를 주지 않는 진겨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상대가 이판사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악물고 들어오게 만든 다음 맛있게 요리해 먹는 게 진겨울이라면.

Deguri는 대놓고 허점을 드러낸 채로 상대가 들어오면 정직하게 맞받아친다. 그런데 그 펀치가 너무 세서, 오히려 공격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허점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김종하는 지금 Deguri의 약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빠도 킬 각 너무 주는 거 아냐?”

“내가? 내가 언제.”

“지금도.”

그렇지만 김종하가 Deguri의 스타일을 빨리 이해한 건 이미 한 번 스크림에서 만나 털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며.

김종하와 Deguri의 라인전 스타일은 개괄적으로만 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 노련미가 생겨 운영에 좀 더 힘을 싣는 거지, 김종하는 원래 힘으로 찍어눌러서 푸는 라인전을 잘하는 선수였다.

“푸하! 야 못 죽였지? 점멸만 낭비했지?”

“방금 정글러 왔으면 오빠 죽었어.”

“아?”

1:1 연습도 좋지만, 실전은 다르다. 진겨울은 지금 상대 정글러인 Carryon의 평소 스타일까지 염두에 둔 라인전을 했던 것이다.

“Deguri가 공격적인 만큼, 상대도 그걸 노리는 플레이를 자주 했겠지. 그러니까 Carryon도 알 거야. 만약 Carryon이 라인 커버하러 온 타이밍에 방금처럼 싸웠다?”

“오….”

그런데 어째, 진겨울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김종하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칵. 이렇게 되는 거야.”

“아, 아아! 야 이게! 오빠 머리털을, 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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