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빌 메이든-178화 (178/296)

〈 178화 〉 87. 내기하나 봄 (1)

* * *

플랜 B.

사실 뭐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다.

이도진이 언제 손목이 나가버릴지 모르는데, 마침 유민재도 출전할 수 없는 상황.

3월 2일까지 앞으로 5주밖에 남지 않았지만, 원래 인간 만사, 무슨 일이 언제 멀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진겨울은 갑자기 닥쳐올 위기에 하재욱을 비밀 병기로 끌어오고자 했다.

사무국에서 반대할까 싶어 연습생 콜업보다는 하재욱을 데려오는 쪽이 팀 단합에도 좋을 거란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다행히 민청하의 입김 때문인지 반대는 없었고. 김동균 감독은 하재욱의 잠재력을 꽤 높이 평가했다.

미안하다, 연습생…. 팀에 탑라이너가 너무 많구나. 하지만 언제나 승진하는 자가 있으면 밀리는 자도 있는 법.

‘재욱이에게 걸릴 부담도 마냥 가볍진 않을 거고….’

솔직히 연습생 생활 오래 한 Poyan을 쓰더라도, 플랜 B의 위기 상황에 뭘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몇 주 안 되는 기간 동안 멘탈 탈탈 털리고 프로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하재욱이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겨울의 부름은 감당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어깨에 지는 것이기도 하다.

책임 없는 성장만 있을 수는 없다.

‘플랜 B를 버텨 내면 하재욱은 엄청나게 유명해질 테지만, 버티지 못하면 그대로 침몰할 수도 있다.’

다른 선수들은 뚜렷한 자기 포지션이 있고, 진겨울도 없어선 안 되는 존재이니 문제없지만. 그는 서브가 아닌가. 영영 다시 선발로 출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선수의 미래를 망치길 원하지 않으니 끝까지 책임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면 한계는 명확하다.

**

코리안 컵에서 만났던 Nowmad Gaming과의 일전이 있는 다음 날.

정상을 노리는 순위표 서부권 강자 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 현재 순위 – CCK Spring 2주 차 ]

─ 1. FAL ─ 4W 0L ─ 8/0 ─+8

─ 2. TU ─ 3W 0L ─ 6/0 ─ +6

─ 3. MB ─ 3W 1L ─ 6/2 ─ +4

─ 4. NMG ─ 2W 1L ─ 4/2 ─ +2

Nowmad Gaming이 승리한다면 2~4위의 승패를 동률로 만들 수 있다. 해설진들이 주로 쓰는 말을 인용하자면 맛있게 비빌 수 있는 상황이다.

반면 TU는 이번에도 세트스코어 2:0으로 승리를 거둬, 1위에 올라 있는 Falcon을 바짝 추격하려 한다.

TU가 2:0으로 이기는 경우, 다음 주에 있을 Falcon과의 맞대결에 더욱 기대감이 몰리게 된다.

4승 전승, 심지어 세트 무패 팀끼리의 대결이라니.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는가?

1세트. TU가 드디어 칼을 뽑았다는 말들이 리갤을 점령했다.

TU가 그간 스크림에선 썼어도 실전에서 거의 쓰지 않았던 공격적이고 주도적인 픽을 선보인 것이다.

바텀의 진겨울, 나아가서는 진겨울 뒤를 이어 바텀을 지켜야 하는 유민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금부터 상체에 무게를 두려는 심산이었다.

안 그래도 Magicbox 전에서, 바텀 위주 플레이만 하면 어떤 식으로 밴 당하고 카운터 맞는지. TU도 통렬하게 배운 바 있다.

“자, 3방향으로 공작 버프 두른 강화 돌격병들이 몰려옵니다!!”

“이러면 조니가 힘쓰기가 너무 힘들죠…!!”

“드레이든!! 한 번 긁고 들어가죠!!”

“으아아악 너무 아파요!!”

“쌍둥이 파괴되고─!!”

“넥서스 깨지면서!”

“GG­!!”

변주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이도진의 폼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TU 상체는 탑 아트로크와 정글 뤼신으로 탑쪽에 힘을 강하게 주면서, 상대의 크랙 플레이어인 Deguri를 압박했다.

거기에 이도진의 갈레오가 글로벌 궁으로 스플릿 운영과 사이드 잘라먹기를 도우면서, ‘칼챔’의 김종하가 잘 크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1세트, 현성이 기분 좋게 먼저 가져갔습니다.”

“Khal, 정말 엄청난 딜량이네요.”

“Doyoon의 뤼신이랑 손잡고 돌아다니면서, 선봉장 역할을 아주 제대로 했죠.”

“상대 Deguri를 초반부터 집요하게 억제한 것이 결국 승리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Doyoon 선수는 뤼신 잡는 날이면 날마다 아주 곡예를 펼치네요!”

*

1세트에 승리했지만, 까다로운 김동균 감독의 시선에서 봤을 때 완벽하진 못했다.

돌아온 그들에게 따가운 회초리가 날아든다.

“종하 너, 실수 줄여야겠다. 플레이는 전체적으로 좋았는데, 중간중간 무리할 때 실수가 잦더라.”

“넵. 근데 도윤이도 실수 많이 했어요.”

“말 돌리지 말고.”

“진짠데.”

그 말에 최도윤이 머쓱하게 시선을 피한다.

“도윤이도. 아까 아칼린 탑 텔로 복귀했을 때, 마음 급해서 종하랑 순서 안 맞았잖아. 좀 더 콜 확실히 하고, 실수 안 하게 주의해.”

“네엡.”

“거봐 최도윤, 잘하라고.”

“와. 형 다음 판 탑 안 봐준다?”

“맘대로 해라? 나 케어 안하면 Deguri가 이놈! 할걸.”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김 감독이 다음으로 시선을 돌린 건 도진이였다.

“도진이 아까 적 2차 뒤쪽에서 시베르 솔킬 낸 건 좋은데, 만약 그거 못 잡았으면 트롤링인 거 알지?”

“네.”

“전에도 말했지만, 각 확실하지 않으면 사리고.”

“괜찮아요. 겨울이가 컨펌해 줬거든요.”

“그래.”

김 감독이 슬쩍 겨울이를 보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든다.

그래. 이도진과 진겨울이 함께 승인한 사항이라면 자기들 딴엔 무리가 아니었다는 거겠지.

손목이 다시 점차 회복되고 있는 모양인지, 이도진의 불안정했던 폼도 함께 돌아오는 느낌이다.

플랜 B로 인해 잠시 흔들렸던 김종하도 오늘 아트로크를 플레이하는 걸 보니, 한동안 두 사람에게 능동적인 플레이를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도 이 상황이면, 플랜 B 실행할 일은 없겠지…?’

드림팀 소리 들어가며 Falcon과 1위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지금. 이도진의 부상은 꽤 치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른 선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로스터로 인해 메꿔야 하는 자리에 적절히 사용할 선수 풀이 부족한 게 문제였다.

‘단장님께 말씀드려서 내년엔 꼭 서브 풀도 꽉 채워 놔야겠다….’

그나마 2019년 스토브리그 전망은 꽤나 밝다.

현존 최강으로 꼽히는 신인 진겨울이 팀에 있고, 올해 이렇게만 성적 유지가 된다면 선수들도 팀 순위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과한 부담을 덜어낼 수 있게 된다.

그럼 TU의 이름값 때문에 입단을 꺼리던 선수들도 물망에 올라올 테고, 서브 풀까지 가득 채운 10인 로스터 운영도 꿈은 아니겠지.

김동균 감독은 멀뚱히 물을 마시는 진겨울의 등을 토닥였다.

“고맙다.”

“갑자기요?”

“그래. 짜샤. 여러모로.”

그러자 진겨울이 웃으며 대답했다.

“짜샤, 그거 좋네요. 저도 다른 오빠들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오빠라고 불러주면 좋겠지만, 나이 차이가 있어서 그건 좀 무리이려나.

김동균은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겨울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김동균을 부른다.

“동균이 형!”

그러나 겨울이는 19살 치고 너무 앳된 외모를 가지고 있다 보니, 어린 조카가 맞먹으려고 까부는 것처럼 보인다.

김동균은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안 되겠다. 그냥 감독님이라고 불러. 안 어울린다.”

“으악….”

세상을 잃은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는 진겨울은,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 같아서 무척 귀여웠다.

**

“이걸 어떻게 다 때려잡아요!!!”

“Freyja가 건재합니다. 이건 질 수가 없죠!!”

“넥서스 깨면서—.”

“GG─!!!”

매치스코어 4승 0패.

세트스코어 8승 0패.

TU는 2세트도 가져오며 Falcon과의 승패/승점 동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Nowmad가 계속해서 이니시를 시도했는데요, 그때마다 TU가 마크면 마크, 카운터면 카운터, 적절히 상대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결국 진입할 때 힘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탑에서 이렐리자와 제이크가 만났는데, Nowmad가 이렐리자 케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주도권이 처음부터 끝까지 TU, 그리고 Khal에게 있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Nowmad의 이니시는 ‘어쩔 수 없어서’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안 걸면 끌려 다니다가 지니까요.”

2세트 종료 후 공개된 딜량 그래프에 쌍두마차가 보인다. 탑 김종하의 제이크와, 바텀 진겨울의 이즈리언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즈리언 잘 쓰기로 유명한 Daddy선수가 경기 끝난 직후 SNS에 “진겨울 선수가 나보다 이즈리언 잘하네 ㅠㅠ”라는 글을 써서 화제가 되었고.

진겨울은 Daddy와 솔랭에서 만나 자주 친분을 다진 사람처럼, 거기에 우스갯소리로 멘션을 달았다.

thresher_jin —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거기에 Daddy가 이모티콘으로 센스 있는 답멘을 달며 두 사람이 꽤 두터운 친분을 가졌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 onair_daddy —

다른 팀이어도 선수들끼리는 대충 아는 사이인 경우가 많다.

천상계가 워낙 고였다 보니 솔랭 돌리다가 심심하면 만나고, 그 상태에서 전체 채팅이나 팀 채팅으로 이야기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게 친분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진겨울과 Daddy의 솔랭 채팅들이 뒤늦게 발굴되면서, 두 사람이 나중에 한팀으로 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올라갔다.

[리컨 갤러리][개념글][내년에 Daddy TU 가겠는데]

라봉이에 박대디에

내년에 TU 옾더레 볼륨 터지겠는디?

케미 기대된다 ㅇㅈ?

[전체 댓글 94개]

— ㅇㅇ : 박대디 게이야

— ㅇㅇ : 너 박민성이지?

— ㅇㅇ(39.7) : 게이야 가서 연습이나 해라 ㅋㅋㅋㅋㅋ

— ㅇㅇ : 응 대디 온에어 탈출 절대 안 돼

└ ㅇㅇ(191.41) : 이제 좀 놔줘라 불쌍하지도 않냐

└ ㅇㅇ : 좀 시발 승강전까지만 데리고 있게 해줘

└ ㅇㅇ(204.11) : 그건 ㅇㅈ이지;

└ ㅇㅇ(191.41) : 눈물의 온에어 팬 안쓰럽노…

— ㅇㅇ : 이랬는데 내년에 진짜 가면 레전드네

— ㅇㅇ : 나 물 떠놓고 떡상 기도해도 되지?

경기장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밴 안.

김종하는 이 글을 보고는 진겨울에게 소리쳤다.

“와. 진짜. 진겨울 저거 영업력 장난 아니네. 벌써 SNS 다른 팀 선수들이랑 친추한 게 몇 명이야.”

자랑스럽게 말한 적은 없지만, 진겨울의 인스타에 들어가 보면 그녀와 친구 맺은 현직 프로게이머만 해도 벌써 50명이 넘었다.

코리안 컵 이후 알음알음 진겨울을 찾아와 먼저 친추를 걸어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몇몇 선수들은 수줍음을 타서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진겨울과 친구 할 수 있다”라는 밈이 생길 정도로, 그녀의 친구 수락률은 프로게이머 한정 100%에 가까웠다.

“아니 너 외국 선수들이랑도 친구 먹었어?”

“아. 먼저 거시더라고…. 나 근데 영어를 못 해서 번역기로 간신히 말했어….”

물론 영어 잘했다고 그들과 넉살 좋게 이야기 나누진 않았으리라.

친구를 못 사귀는 건 아니지만, 진겨울이 또 그렇게 사교성이 엄청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뭣보다 이미 팀에 챙길 선수가 많다 보니,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와 주는 게 아니면 대화가 쉽게 이어지지도 않았다.

“겨울이가 영리한 거지. 템퍼링 같은 건 문제 되지 않게 조심하고 있지?”

“아 네. 계약 같은 이야기는 절대 안 하죠. 전 지금 우리 팀 선수들 케어하기도 벅차요.”

“그래 잘했다. 그러고보니 종하 너도 아는 사람 꽤 되지 않니?”

“쩝. 저는 또 이상한 말 지껄이다가 박제될 것 같아서 SNS 잘 안 해요.”

그 말을 들은 진겨울이 빵 터졌다.

“아. 맞지 맞지. 김종하 쓸데없는 소리 해서 박제 잘 당하지.”

“야. 아픈 상처야. 그렇게 쿡쿡 쑤시지 말아 줄래? 응?”

김동균 감독이 피식 웃더니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렸다.

“됐고, 오늘 4연승 한 기념으로 고기나 좀 조질까? 마침 주말이잖아.”

고기라는 말에 격하게 흥분하는 김종하. 오늘 2승을 챙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드러누운 백정 최도윤도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감독님. 믿고 있었어요.”

“뭐 먹을래. 삼겹살? 목살? 양념?”

하지만 소고기가 아니었다. 맨날 먹던 돼지고기라는 말에 최도윤이 다시 시트에 몸을 파묻는다.

“아니 왜? 맨날 소고기 먹을 수도 없잖아. 메뉴 정해. 미리 좀 구워 달라고 얘기해 놓게.”

고기면 뭐든 좋은 진겨울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눈빛으로 불만을 토로하는데도, 김동균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버렸다.

김종하는 이대론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대뜸 이도진에게 물었다.

“야 도진아. 그러지 말고 내기 소고기 어떠냐.”

“내기? 할까?”

“너 잘 생각해라. 최소 50만 원이다.”

“나 그 정도 돈은 있어.”

“웬일이래? 개짠돌이 이도진이.”

“한 번 먹을 때쯤 됐잖아?”

티격태격하면서도 소고기 내기가 착착 진행되어 간다.

감독 회식비에서 먼저 지출하고, 식사 후 높새바람 5:5 승부를 가리기로 룰이 확정되었다.

김종하, 이도진이 팀장이 되고. 나머지 네 선수와 감코진 세 명, 거기에 사무국 직원 한 분이 끼기로 결정되었다.

“팀원 뽑기 가위바위보 해야지.”

“진겨울 뽑는 팀이 무조건 이기는 거 아니냐?”

“챔피언 올랜덤 할 거라 그렇지만도 않아.”

“야. 장인이 챔피언 가리는 거 봤냐? 가위바위보!”

“…. 아니 이렇게 갑자기 하는 게 어딨어?”

“아 나이솨! 나 진겨울!!”

고작 진겨울 한 명이 라봉팀의 로스터에 올랐을 뿐인데도, 이도진의 얼굴엔 벌써 긴장감이 역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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