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CCK 스프링/결승전, vs Falcon (5)
* * *
사실 결승전 하면, 트래시 토크를 빼놓을 수 없다.
양 팀의 선수들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평소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거나, 때로는 좀 과장된 표현을 곁들이는.
결승전에서만 볼 수 있는 팬들을 위한 별미랄까.
그러나 재밌게도, 장재홍에게 특별한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그의 일상, 프로게이머 생활 자체가 트래시 토크,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수준이었으니 별수 있었겠는가.
모든 프로게이머, 나아가서는 전 세계 많은 팬이 사랑하는 선수에게 은퇴하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선수는 그가 유일했다.
[Chocobi : KDA, MVP 이런 것보다, 게임을 더 잘하고 싶어요. 사실 Freyja 선수 나오기 전에, Plum 선수 무섭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보통 이 정도 도발이면 “오오~” 하고 반응이 나와야 정상인데.
다음 장재홍의 인터뷰가 얼척이 없어서 팬들도 놀라다 만다.
[Odin : 이도진 선수, 내기하실래요? 결승전 이기는 사람이 연봉 절반 주기.]
[Plum : 제가 너무 손해 아닌가요?]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가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장재홍. 평소와 달리 은퇴 이야기가 없으니, 모두가 싱겁다는 반응이다.
[Chocobi : 저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스타일이라서, Freyja 선수처럼 육각형 플레이어에겐 약한 것 같아요. 아마 이건 Plum 선수나 Loki 선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 같아요.]
[Plum : 동감합니다.]
[Loki : 미드에서 만나기 싫죠.]
이후엔 Freyja를 만나기 싫어하는 세 미드 라이너의 토크로 금세 분위기가 회복되었고.
양 팀의 대들보인 두 사람이 남긴 코멘트를 끝으로 경기가 시작되었었다.
[Freyja : 미안합니다. 하필이면 저랑 같은 시기에 프로게이머를 하고 계시네요….]
[Odin : 쉬다 왔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장재홍은 별다른 의견 피력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복귀를 준비하며, Falcon 프런트는 그가 허리가 좋지 않아서 회복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해명했다.
해명이 늦으니 민심은 최악. 민심 회복을 위해선 플레이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데.
— 부활이 힘들듯 보이죠!!
— 이러면, 1세트를 TU가 가져갑니다!!
— 쥐쥐!!
제일 중요한 결승전 1세트 패배.
그것도 진겨울이 없는 TU 상대로 졌다.
충격받은 장재홍은 헤드셋을 벗어던지듯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 씨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봄이의 조소가 뒤따랐다.
— 질 줄 알았다.
장재홍은 분노에 차 회장실을 향해 뛰었다. 선수들이나 감코진과 이야기해 봐야, 좋은 꼴 못 볼 게 뻔했다.
마지막 한타.
장재홍답지 않게 팀을 믿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믿어 봐라! 좀!’
그래서 그들에게 싸움을 맡기고, 장재홍은 바텀으로 뛰었다.
‘… 아.’
‘아오. 씨. 미안하다.’
‘와. 자쿠 반응속도 뭐냐 진짜.’
하지만 본대는 패배했다. 상대의 스킬 샷과 임기응변이 너무 뛰어났던 탓이다.
설상가상. 장재홍도 김종하와의 일기토에서 패배했다.
점멸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오랜 연습의 공백이 결국 발목을 잡은 셈이다.
얕봤던 김종하는, 진겨울과 지속된 특훈으로 어느새 연습 안 한 장재홍과의 1:1 대결에서 챔피언 상성도 극복한 승리를 거둘 정도가 된 것이다.
— 연습 한 번도 안 하고 두 달을 보냈는데. 온종일 두 달을 연습한 애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진겨울은 없었잖아!”
— 걔만 연습해?
“말도 안 돼. 영혼 동화는 개인 능력이야…! 그게 팀원에게 전파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 너 진짜 멍청이냐?
“뭐?”
— 내가 언제, 영혼 동화 때문에 TU가 강해졌다고 말한 줄 알아?
Falcon의 선수들이 장재홍에게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깎아 냈듯.
TU의 선수들은 진겨울에게 발맞춰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단련했다.
그것이 선수들을 성장시킨 것이다. 옆에 놓인 훌륭한 참고서가 시도 때도 없이 쫑알거리니. 그걸 잘 듣고 따라하기만 하면 됐다. 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처음엔 구체적인 말로.
그다음엔 간단한 말로.
그다음엔, 핑과 더 간단한 말로 소통해서.
지금 이 단계에 이르렀다. 수많은 노력을 갈고닦아서.
적어도 이봄이 알고 있는 배도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 너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애가 뭘 알겠어.
“……. 크으윽.”
장재홍은 분을 삭이며 주먹을 움켜쥔다.
쾅. 화장실 칸막이 문이 크게 떨린다.
“나도. 노력했어…. 팀원들 이야기 들으려고 노력했다고…!!”
— 더 해.
“어떻게 더 해!”
— 뭘 어떻게 더 해. 넌 이미 방법을 알고 있잖아.
“…. 내가 안다고? 내가 뭘?”
장재홍이 팀원들의 의견을 존중한 순간,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기억 침식도 100%.
영의 운명까지 선택을 완료한 두 사람은, 사실상 한 사람과 같다.
이봄의 성격이 장재홍에게 물들고.
장재홍의 성격이 이봄에게 물들어 지금의 두 사람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장재홍도 할 수 있다.
— 더 들어. 계속 들어. 지더라도, 문제가 생기더라도 계속 듣기만 해.
“….’
— 나는 그랬어. 겨울이가 얘기할 때마다 들었어. 자기밖에 모르는 애였지만, 나랑 이야기할 때만큼은 즐거워했으니까. 그래서 들었어. 걔가 웃는 게 좋았으니까. 내 친구였으니까. 내가 맞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를 위해 자기 몸 던져 가며 지켜 준 친구니까.
“우리 팀 선수들이 뭐, 나를 위해 그 정도로 희생한 선수들은 아니잖아?”
— 아니라고?
봄의 목소리는 상당히 냉소적이다.
— 넌 아직도 네 페이스에 맞춘다고 잠 줄여 가며 연습한 게 희생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건 당연한 거야. 나 같이 게임 잘하는 사람한테 버스라도 타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 노력과는 별개의 희생이 있었어. 말하고 싶어도, 반대 의견을 내고 싶어도 계속 참았을 거 아냐. 그게 얼마나 고역인지 몰라? 정말 몰라?
안다.
장재홍은 말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사람이니.
천성이 소시오패스인데도, 말하는 것 하나는 참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항상 그랬다.
— 네가 말하고 싶은 거. 내가 들어줄게. 그러니까 선수들 앞에서는 그냥 들으라고. 어차피 올해까지만 할 거라며. 내년에 게임단 해체한다며.
달콤한 제안은 좋다.
하지만 장재홍은 그 뒤에 숨겨진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 너 무슨 꿍꿍이야.”
— 내가 뭘?
“솔직히 말해. 왜 이렇게까지 해 가며 날 경기장에 내보내려는 건데? 진겨울이랑 배도현, 이도진 보려고 그래?
— 아니.
봄이의 목소리는 말끔했다.
그 어떤 숨긴 의도도 없다는 듯.
— 너. 내 부탁 아직 완수 못 했잖아.
장재홍에겐 인정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계약만을 믿는 소시오패스이기에.
그러나 달리 말하면, 계약은 절대 어기지 않는 것이 장재홍이다. 그는 계약 완수에 목을 맨다. 완수할 수 없는 계약은 해선 안 된다고 아버지에게 배워 왔기 때문이다.
장재홍과 이봄은, 중요한 계약을 했다.
— 분명 약속하지 않았어 우리? 네가 날 몸에 품는 대신, 내 부탁 들어주기로.
“….”
하나. 이도진을 은퇴시켜달라.
둘. 배도현이 리컨을 그만두게 해 달라.
하지만 장재홍은 둘 중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는 경기장에 나가야만 한다.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 올해 말까지야.
“안 돼.”
— 시간 연장은 없어. 올해가 지나면, 나는 널 떠날 거야.
“안 돼!”
— 번복은 없어. 장재홍.
“야! 가능할 것 같아 그게? 이도진은 이대로 가면 은퇴 안 할 거고. 배도현은 진겨울 몸 차지하고 신났는데 리컨을 그만하겠어?”
— 어쩌라고.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건.
“야!!! 이…. 이. 자기밖에 모르는…!”
— 너도 그렇잖아? 우린 닮았잖아. 그런 면에서.
이봄은 진겨울을 아끼며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지만.
그 시작은 큰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진겨울은 모른다.
민청하가 봄과 도진을 지원해준 덕에 사람처럼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그래서 진겨울의 말만큼은 모두 들어줬다는 걸.
… 그녀 앞에서는 천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걸.
하여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진겨울이 피폐해지는 게 싫었다.
죽음이 몇 년이고 이봄을 괴롭힐 게 뻔한데도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우겨대는 감정적인 친구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장재홍의 손을 잡고 운명에 정면으로 맞섰다. 어차피 언젠가 맞아야 할 매라면, 빠르게 맞자는 생각으로.
— 물론 너랑 나는 결정적인 면에서 다르긴 하지.
장재홍이 방어적이고 소극적이라면.
이봄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이봄이 배도현 근처를 맴돌았던 이유.
그건 게임하느라 바빠서 자신을 챙기지 못하는 이도진 대신. 오빠와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프로게이머가 되어 다시 보면 좋겠다고 말한 이유.
그렇게 말하면 배도현이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떠나야 할 시기가 다가왔으니까.
더는 이승에 있을 수 없었으니까.
자기가 없어도 배도현이 잘 되길 바라며 했던 말이다.
게임을 잘 몰랐던 이봄은 배도현이 노력만 하면 충분히 이도진처럼 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배도현이 여전히 아마추어 레벨에도 못 미친다는 걸, 무려 반년이나 지나서야 장재홍을 통해 깨달은 그녀는 부탁했다.
헛된 꿈을 향해 치닫고 있는 배도현을 그만 멈춰 달라고.
— 약속 지켜. 나 사라지는 꼴 보기 싫으면.
“진짜 네 멋대로구나.”
— 너도 네 멋대로잖아.
“씨발….”
분명 봄이가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무척 쉬운 부탁이었을 테다.
그러나 배도현이 진겨울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도진은 은퇴시켜야 할 정도로 피폐하지 않으며.
진겨울은 승승장구하며 CCK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중이다.
대회에 나가면 봄이의 관심이 겨울이에게 쏠리니까. 그게 싫어서 프로도 관두고 게임단도 없애려고 한 건데.
얼떨결에 장재홍은 올해 말까지 어떻게든 리그에 남아 TU를 무너트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장재홍도 알지만. 이봄을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인간이기에.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소시오패스는, 마침내 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결승전, Falcon의 탑라이너로 돌아온 건 그런 변화의 일환이었다.
“그래 씨발…. 더 들으면 되잖아. 듣고, 알려달라는 것만 알려주면 되잖아. 좋아, 못할 거야 없지. 왜냐면 나나 걔나 실력은 비등비등하니까. 결국 팀원 문제라면, 팀원을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되는 거 아냐…!”
점점 변화하면 된다.
뭐가 됐든. 장재홍이 절실한 마음으로 승부에 매달리기만 하면 된다.
이건 주제넘게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으려 했던 이기적인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는, 이봄의 마지막 선물.
바로 사랑했던 세 사람의 올해를 더욱 빛나게 해줄 장재홍이라는 이름의 들러리다.
— 잘 해봐. 그런다고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이런 찌질이 소시오패스에 비하면, 배도현은 정말 멋진 사람이다.
목표로 한 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
당한 건 꼭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 꾸준함과 열렬함으로 주변인마저 감화시키는 사람.
죽음 앞에서 조마조마하게 살아가던 이봄은 가질 수 없는 삶의 태도에 반해서.
이봄은 배도현을 응원했다.
그가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
“할 거야. 절대로. 너만… 너만 사라지지 않는다면. 할게. 뭐든지 다 할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런 배도현과 이도진이 한 팀이 되었는데. 이런 한심한 놈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봄은 담백하게 말했다.
— 재홍아. 내가 알 바야?
그나마 장재홍보단 사람 같던 이봄이고. 장재홍도 그 인간성에 물들었지만.
— 징징대지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죽음에 달관한 이봄은 차가운 심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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