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CCK Night (2)
* * *
팀 아리아는, 처음부터 겨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 각을 재고 있었다.
한여름이 당당히 진겨울과 자신의 친분을 자랑한 탓에, 친구라는 것도 이미 알았으니까.
아리아는 시간 잘 맞춰보겠다고 이야기한 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겨울 선수 있잖아요. CMI 우승하면 코스프레 한다고 하셨잖아요.”
겨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아… 그, 그랬죠….”
“그거 저희가 도와주면 안 돼요? 진짜 잘해드릴 자신 있는데. 여름이랑 가을이 코스프레 해준거 보셨잖아요. 그거 저희 작품이에요!”
아리아의 쌍둥이 언니는 당당하게 자신의 강점을 어필한다.
어느새 튀어나온 휴대폰으로 포트폴리오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겨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건 콜라보를 향한 확고한 의지다.
“이거, 이거 어때요?”
“이건 노출이 좀.”
“그럼 이건요! 겨울 선수 같은 귀여운 이미지에 딱인데!”
“화장이 너무 과하지 않나요?”
이미 어느 수준의 인기에 다다른 이상,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방면으로 수익 창출을 위해 노력한 그녀들이 생각하기에, 진겨울과의 콜라보는 절대 넘어갈 수 없는 빅 이벤트.
한 방으로 인생이 역전되고 그런 건 아니어도, 사회라는 게 원래 서로 돕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탑승하는 순간 떡상이 예정된 추수기 코인을 굳이 그냥 둘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게. 그렇게 하면 너무 본격적인 게 아닌가…요?”
“당연히 본격적으로 해야죠.”
“그럼요. 진겨울 선수 외모 생각하면, 본격적으로 안 하는 게 더 이상하다니까요. 여름이랑 가을이 코스프레를 생각해보세요. 이게 전문가의 손길이 닿는 거랑 안 닿는 거랑 차원이 달라요.”
“… 아. 설마 완성도의 문제가?”
“그렇죠!”
완성도라는 이야기에 겨울이 깊은 고민에 빠진다.
혼자 보기 아까운 울이의 코스프레. 대충하고 넘어가는 건 성에 안 찬다.
‘울이 보고 하라고 하면 되잖아?’
설마 울이가 거부할 리는 없겠지. 코스프레 같은 경험을 또 언제 하겠냐고 약을 팔아 보자. 설득될지도 몰라.
“으음… 그럼 뭐… 부탁,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도 그림이 이상하니, 겨울은 이쯤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저희가 다 감사합니다.”
“맞아맞아! 우리 연락처 교환해요. 우리 인스타 맞팔도 할까요?”
“그… 그래요.”
팀 아리아의 쌍둥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진겨울 선수는 분명 앞으로 수많은 트로피를 따게 될 테고, 그럴 때마다 공약을 걸 확률이 높다.
팬 관리 차원에서 이런 이벤트를 주기적으로 보여줘야 하긴 하는데, 매일 하자니 귀찮고 부끄럽기도 할 테지.
그때 과연 누굴 찾겠는가. 연락처에 등록된 편한 사람. 바로 아리아다.
“겨울 선수 번호를 받다니~.”
“저희 말고 아무한테나 막 주시면 안 돼요?”
“달라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그럴 리가!”
“거짓말도 잘하셔.”
아리아는 겨울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척이나 말랑하고 보드랍다.
“진짜, 연예인 하셔도 잘 나갔을 텐데. 프로게이머 힘들지 않아요?”
“연예인 한다고 했으면 기획사에서 모시러 왔겠지.”
여자들에게 겨울의 모습은 그렇게 비쳤으리라.
쉽지 않은 남자들의 스포츠에 뛰어든 작은 거인. 그들과 같은 환경, 같은 조건에서 최고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대단한 소녀 말이다.
그러나 겨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게임 재밌게 하고 있어요. 저 누구 이기는 거 진짜 좋아해요.”
그 미소는 열정적이고도 순수했다.
‘하긴… 힘들어도 내색은 못 하겠구나.’
‘멋있다.’
그 멋진 모습에 감화된 쌍둥이가 겨울을 양쪽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선수 했네요.”
“맞아, 우리처럼 게임 못 하면 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요.”
겨울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나중에 같이 게임 하실래요? 시즌 시작하기 전에. 제가 캐리해드릴게요.”
쌍둥이는 물개박수를 치며 대환영 의사를 밝혔다.
게임 못 해서 게임 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던가. 그런 그녀들에게 진겨울이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저희가 짐 안 되게 최선을 다할게요.”
“야. 어차피 우리는 최선을 다해도 짐짝이야.”
“아. 그런가.”
“아하하…!”
*
이도진이 돌아오자 아리아는 도진과 함께 사진을 찍은 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아마도 영업을 위해서인 듯한데, 저분들도 참 바쁘게 사는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코스프레라….
결국 할 수밖에 없겠네. 진짜 하기 싫은데.
미리 노출 적은 걸로 골라놔야 하나. 그런데 도대체 뭘 하냐. 내가 할 게 있나…?
“겨울아,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자.”
“어디?”
“협회 리컨 부문장님 만나러.”
“으.”
또 재미없는 아저씨 만나러 가는구만.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려보지만, 의미 없는 짓이다.
분명 어딘가의 높으신 분들이지만, 알게 뭐람. 2회차 인생인 내게 중요한 사람은 울이와 봄이, 그리고 팀원들과 관계자, 친구들 정도인걸.
이렇게 제멋대로 굴고 싶어지는 건, 아마도 세 번째 운명을 선택했기 때문인가?
— 너 진짜 바쁘게 사는구나.
그래, 개썅마이웨이였던 우리 혼겨울 씨 말이다.
이제는 리컨을 켜지 않아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지만, 울이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개인방송실 같은 곳에 혼자가 아닌 이상 대꾸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슬쩍 울이를 데려와서 대신 앉혀 놓고 싶은 충동이 든다.
대신 재미없는 아저씨들 상대좀 하라고 하면 뭐라고 하려나. 혼나겠지 분명?
아무튼 코스프레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처지니, 평소엔 쓸데없는 말을 아끼자.
뷔페 테이블과 관계자석 몇 개를 지나치고 나니, 주변에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있는 아저씨 한 명이 튀어나왔다.
아, 저 아저씨. 기억난다.
분명 코리안 컵 때 시상하던 아저씨다.
“이도진 선수, 진겨울 선수도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그럼, 김 감독이랑은 아까 인사했어. 금방 온다길래 기대했는데 목 빠지는 줄 알았어.”
“얼굴이 더 좋아지셨어요.”
“으하하, 그래?”
오늘을 위해서 수염을 멋스럽게 다듬은 다부진 체구의 장년이 도진 뒤에 서 있던 겨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 우리 겨울 선수 덕이지. CCK 주목도가, 겨울 선수 덕분에 날이 갈수록 상승세야. 하하!”
이런 자리는 불편했지만, 내색해선 안 되겠지.
이도진도 어서 악수하라고 내게 눈치를 보낸다.
‘… 그래. 사회생활은 이도진처럼만 하면 손해 안 보니까.’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그가 모든 사람에게 인성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그만큼 천성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오라는 자리 마다하지 않고. 연습이면 연습, 광고면 광고. 책임질 건 훌륭히 해내고, 그런데도 폼이 떨어지지 않게 꾸준히 유지하는 선수가 이도진이었다.
레전드로 남을 수 있었던 데는, 그만큼의 노력과 수고가 들어갔던 것이다.
‘이놈에 비하면, 나는 진짜 이기적이긴 하지.’
선수들 광고 못 찍게 하는 것도 어쨌거나 그들의 폼이 떨어지면 안 되니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고.
우승을 향해 달리는 것도, 내 욕심과 더불어 봄이를 만나기 위해서가 되어버렸으니.
… 본의 아니게 경기 외적으로 내기까지 하고 있고. 괜히 이도진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해요, 겨울 선수. 우리가 적극 서포트할테니까!”
“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자, 도진 선수도 이제 가서 놀아. 어른들이 귀찮게 해서 피곤하지?”
“아뇨. 뭐 이러라고 있는 자리인데요.”
“… 그래. 고생이 많다. 몇 년 전만 해도 완전 어린애였는데, 도진 선수도 어른 다 됐어.”
조강혁 부문장은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 팀 자리로 돌아가면서, 나는 슬쩍 이도진에게 물었다.
“안 지쳐?”
그러자 이도진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물론… 게임 하는 것보단 피곤하지. 그런데 이것도 다 중요한 일이더라고.”
“…. 그렇구나.”
“뭐랄까… 어른들의 세계? 모르고 살고 싶지만, 어른이 되려면 거쳐 가야만 하는 그런 세계지.”
어린 우리는 생각한다.
그저 게임만 잘하고, 팀을 승리로 견인하기만 하면 프로게이머로서 할 일은 다 한 거라고.
그러나 프로게이머의 최종 진화 형태가 되어가는 이도진을 보면, 마냥 외부 일을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다.
외부 활동도 주기적으로 해야 하고, 인맥 관리와 이미지 관리도 필수다.
그래야 장재홍 같은 놈들을 미리 색출해서, 배도현처럼 혼자 바보되는 일도 피할 수 있다.
‘…. 물론 지금처럼 게임을 잘하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이도진을 따라 걷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닐 테다.
인성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으니.
원래대로라면 두 살 많은 나지만, 이도진을 보고 있으면 괜히 한참 어른처럼 느껴진다.
‘선배는 선배구나.’
이제 나보다 게임도 못 하고.
자꾸 나 귀찮게 하면서 바보 같은 짓을 일삼는 인간이지만.
분명 훌륭한 어른이자 선배였다.
게임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선 그만큼 본보기로 삼기에 적절한 사람이 또 없었다.
‘생각해보면, 마냥 장난만 치는 것 같은 김종하도 어른은 어른이었지.’
우리 팀 동생들 생각하면, 김종하의 위트도 어디까지가 장수 프로게이머로 생활하면서 생긴 게 아닐는지.
예전엔 욱하던 성격도 그나마 차분해진 건,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만 뒤처질 순 없지. 지금 주민등록상 나이는 열아홉일지 몰라도, 원래는 스물다섯이니까.
겉보기엔 아니어도, 알맹이는 이도진과 김종하보단 형이니까.
힘내야지.
무엇보다 항상 뒤에서 지켜보는 울이가 있으니, 이제 진짜 행동에 조심해야겠다.
**
침대는 편안하다.
특히 맨날 눕던 침대의 베개와 이불은 그야말로 천연 수면제다.
“지친다 지쳐….”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반쯤 감긴 눈으로 중얼거리니, 울이가 내게 물었다.
— 피곤하면, 좀 바꾸지 그랬어.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런 자리에 내보내.”
— 뭐? 오빠 말 다 했어?
“아니 맞잖아. 솔직히 너 그런 자리에서 차분히 있을 자신 있어? 없지.”
—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거 봐라.”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방에 놓인 전신거울 앞으로 향했다.
영의 운명을 결정한 뒤라 게임을 켜지 않았는데도 거울에 영혼 동화 UI와 울이가 함께 보인다.
여느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울이가 밝게 손을 흔들었다.
“너, 어떻게 할래? 이제 일주일에 한 번은 나 대신 생활해야 하는데. 당장 이번 주는 그냥 넘어갔다지만.”
— 그거, 꼭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사라진대.”
— 우와. 그거 괜찮네.
“미쳤냐?”
— 장난이야. 봄이 만날 수 있다는데, 사라질 생각 없어. 음… 그래. 언제가 좋을까…. 월요일?
월요일이라.
프로게이머 스케쥴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시즌 중에도, 국제 대회 중에도 보통 수요일부터 일요일이 피크이니 말이다.
“아니면, 너도 한 번 경기장 올라가 볼래? 어떤 곳인지 궁금하지 않아?”
— 무, 무슨 소리야. 됐어. 내가 왜.
“왜. 너도 나처럼 할 수 있잖아. 아니면 내가 뒤에서 도와줄게. 너 피지컬 하나는 자신 있지 않아?”
— … 글쎄…. 키보드 마우스 안 잡아본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럼, 가볍게 연습할 때 바꿔볼까? 너 게임 하고 싶지 않아? 막 근질근질하지 않아?”
— 오빠처럼 게임 폐인은 아니었거든.
“어우. 그거 재능충들이나 할 말처럼 들려서 기분 나쁘다 좀.”
— 뭐래.
그래. 월요일 좋지.
선수들도 한창 쉴 시간이니, 적당히 울이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녀가 전처럼 이도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딱히 둘이 수상한 짓을 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 내가 들어있을 때처럼. 친구 정도의 관계를 유지할 거야, 분명히.
— 오빠는… 내가 뭐하고 시간 보냈으면 좋겠어?
“나?”
— 응.
“어…. 뭐. 개인 방송실 가서 나랑 게임이나 할래? 너 하고 싶은 게임 뭐든 말해봐.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나만의 작은 스트리머 방송 보는 느낌 날 것 같다. 재밌겠는데?”
울이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소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래! 결정! 당장 다음주 월요일부터! 까먹지 마라?”
— 응! 안 까먹어…. 걱정 마.
뭐랄까.
울이가 전보다 귀여운 척이 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고깃집에서 일할 때 여자 알바생 하나가 분명 이런 식으로 분위기 잡다가 뜬금없이 생일선물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놓고서 바로 다음 달에 관뒀지.
내 생일까지 일주일 남았을 때라 똑독히 기억한다.
‘울이는 호랑이라 그런 짓은 안 하겠지 뭐.’
어쨌거나 울이가 빙빙 돌려서 말할 성격은 아니잖아.
면전에 대고 생일선물 내놓으라고 협박하면 또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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