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빌 메이든-226화 (226/296)

〈 226화 〉 CMI/그룹 스테이지 1라운드, vs G1 Esports

* * *

베트남 현지에 도착한 팀들이 훈련 캠프를 꾸린 지 약 1주일.

치열했던 플레이­인 스테이지를 돌파한 세 팀이 합류하며 그룹 스테이지 플레이어 여섯 팀이 최종 확정되었다.

2018 CWC를 제패하며 1부 리그로 우뚝 선 CC China의 Eye Gaming.

한국에서 한국 팀 없는 결승전을 만들어 낸 2부 리그 CC Europe에서 탄생한 이단아이자 말썽꾸러기, G1 Esports.

4부리그 소리 듣지만, 그런데도 과거의 영광이 남아 플레이 인이 아닌 그룹 메이저 티켓을 거머쥔 CC Korea의 TU.

여기에 예상했던 대로 CC North America의 Team Limited와 CC SEA의 Flash Tigers가 메이저리그의 품격을 보여주며 합류.

마지막으로 개최지인 CC Vietnam의 Phong Buffalo가 토너먼트 패자전을 뚫고 올라와 최종 6팀째를 구성했다.

모두가 우승 후보라는 평가를 받기에, TU의 어깨에 걸린 부담은 상당하다.

당장 1부 리그임을 다시 증명하느냐, 못 하느냐가 걸려 있으니 말이다.

그런 중압감 속, 티저 영상 촬영이 있었다.

팀별로 둘 또는 세 선수가 출연했다.

TU는 올드비인 이도진­김종하를 내보낼 계획이었지만. 김종하의 컨디션이 영 좋아지질 않다 보니 결국 진겨울이 당첨.

겨울은 결국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며 툴툴거렸지만, 내심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레이션은 전문가인 이도진이 맡았다.

덕분에 진겨울은 걷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촬영 동선을 따라 이동하는 게 전부였다.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하니, 촬영은 금세 끝났다.

후덥지근하고 습한 현지에서 팀의 상징과도 같은 후드를 계속 입은 탓이었을까.

촬영 마치고 차에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렇게 고생해 가며 찍은 영상은, 그룹 스테이지 첫째 날 공개되었다.

TU의 파트는 가장 마지막 부분이었다.

작년과 비교해 훨씬 연기가 숙달된 이도진의 모습에 팬들이 놀란 것은 물론이요. 그의 곁에서 모델처럼 아름다운 워킹을 선보인 겨울에 대한 관심도가 엄청났다.

국제대회에서 얼굴을 비춘 적이 없어 겨울을 인지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영상 속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영상 말미에는 도진과 함께 트로피를 바라보는 구도의 장면이 사용되었는데.

이때 팔짱 낀 채 도진의 뒤에서 싸늘한 표정을 짓는 겨울의 포스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원숙하다는 반응이 상당히 많았다.

그녀가 CCK를 제패한 TU의 핵심 플레이어이며, 지금은 Plum보다 우위에 선 게이머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해외 팬들은 뒤늦게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그룹 스테이지 첫날, 경기 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김종하에게 닥친 문제는 단순히 척추 관절통 때문은 아니었다.

“약간… 트라우마 같은 게 있어.”

“트라우마?”

“뭐. 넌 알겠지만. 내 국제전 성적이 항상 그랬잖냐.”

리컨 판 밈을 꿰고 있었기에, 그의 말이 마냥 엄살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가 여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고. 커리어도 순탄치 않았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뭐 약간. 저주? 그런 건데. 중국 쪽에 이적한 다음부터 음식도 그렇고 여러 이유로 엄청 고생했거든. 그러다가 한국 와서 인생 좀 폈단 말야? 잘 되는 줄 알았어. 근데 국제전 때문에 출국할 때마다 몸이 개판이 되는 거야.”

한 마디로, 중국에서 고통받은 경험으로 생긴 트라우마가 치료되지 않고 있단 뜻이다.

한국에서는 미쳐 날뛰는 그도, 이상하게 비행기 타고 외국만 나가면 자기 몸 통제가 좀처럼 안 된단다.

“평소엔 잘 들리던 오더도 안 들리고, 판단력도 흐려지고. 그냥 게임 자체가 잘 안 돼. 늙어서 그런 것도 아니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국제전에서 고전했구나.

팬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겠지. 괜히 약한 모습 보여 봐야 엄살 부린다고 질타만 늘었을 테니.

작년에 인성 논란으로 죽어라 까였으니 괜히 가슴 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괜히 공감이 가서, 나는 무심결에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 아차.’

그리고 아껴둬야 할 봄의 기운을 그에게 써버렸단 걸 뒤늦게 깨달았다.

국제대회가 처음인 애들 떨면 쓰려고 신경 쓰고 있었는데, 이런 실수를.

그래도 위기가 닥쳤을 때 똥꼬쇼 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 겨울이 있으니 선수 하나의 실수 정도는 커버할 수 있다. 핵심은 이도진이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그간 내 연습보단 선수들 상태 점검, 그리고 상대할 팀들의 인게임 플레이를 분석해 얻어낸 결론 덕분에 마음은 편하다.

밴픽에 문제만 없다면, 지금의 TU는 겨울이 1인분 이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팀들을 이길 수 있다.

“이게, 내가 이상한 건진 모르겠는데. 네가 머리 잡아줄 때마다 마음이 엄청 편안해 진단 말야? 트라우마 때문에 허리도 같이 아픈 건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죽을 것 같다가, 머리 잡히면 갑자기 상쾌해져. 진짜 이상해.”

뒤늦게 깨달았는데, 생각에 집중한다고 아직 김종하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놓으며 슬쩍 물러섰다.

“… 착각이겠지.”

“그렇지? 시발. 나 진짜 정신이 이상해져 가나.”

“아무튼, 빨리 회복 좀 해 봐. 기껏 여기까지 나왔는데 한 경기도 못 뛰고 돌아가는 건 에바잖아.”

“그렇긴 한데…. 나 나가 봐야 동생들한테 괜히 폐만 끼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말에서, 동생들에게 폐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언제까지 뛸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기도 바쁠 텐데.

트라우마를 겪고 있으면서도 유쾌하게 팀원들의 화목을 다지느라 애쓰고 있었다니.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다.

김종하나 이도진을 보면, 선수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음의 병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다.

고질병이다.

성적에 목매게 되고, 공인인 만큼 말도 가려 해야 하고 팬들 눈치도 살펴야 하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았다. 겉보기에 괜찮다 느껴질지 몰라도, 항상 신경 쓰며 선수들을 관리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민폐 끼치기 싫으면, 평소 폼대로 하면 되잖아. 뭐 어려운 거라고.”

“말이 쉽지.”

“머리 잡히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며? 그때를 떠올리면서 게임해보던가. 그럼 도움 될지도 모르잖아.”

“음….”

김종하는 피식 웃었다.

“그거 좀 변태 같아서 싫다.”

“… 아. 그런가.”

김종하는 얼마나 갈증이 날까.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이도진과 비슷한 반열에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좋게 오래오래 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따위의 생각들로 자신을 채찍질하다 보니 마음의 골병이 든 건 아닐까.

“아무튼. 우리 올해 이렇게 겨우 만났는데…. 이대로 그만둘 거야? 도진 오빠처럼 올해만 하게?”

“그놈 은퇴할 생각 없어 보이던데.”

“그럼 오빠도 은퇴하면 안 되지. 오빠가 꿀릴 건 또 뭐야.”

그를 보면 자꾸만 전생이 생각난다.

기회비용이 아까워서, 희망 고문당하며 어떻게든 뭔가를 일궈보려 했던 바보 같은 남자가 떠오른다.

사실 배도현은 아무것도 해낸 게 없는 불쌍한 인간이라, 김종하에게 비교하기엔 부끄럽지만.

더 위를 향해 나아가고 싶은 열망.

더 많은 것들을 손에 쥐고 싶은 욕망.

그런 감정에 충분히 공감한다.

“팬들이 좋아할 거야. 와, 내수용 Khal이 국제전에서 이런 폼을?!”

“야. 내수용이라고 시발 니가 직접 말하는 건 어?”

“아 뭐 어때. 나니까 하지 또 누가 하겠냐?”

“진짜 네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아, 아아! 지금 내 머리 잡았냐?”

김종하가 스스로 악순환의 굴레를 끊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제 그가 없는 TU는 상상하기 어렵다. 나와 더불어 선수들이 잘 융화될 수 있도록 가장 큰 공을 한 게 김종하니까.

게다가 내가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했어도, 솔직히 스프링에 김종하가 없었다? 리그 1위는 물 건너갔을 수도 있다.

플랜 B를 실천할 때도 그렇고, 그 이후 이도진이 없을 때도 그렇고.

항상 탑에서 확실한 지분을 챙기며 든든하게 버텨 준 맏형이 아닌가.

이번 CMI는 김종하가 자신의 한계를 넘을 좋은 기회다.

그를 출전시켜 만족스러운 승리를 얻게 만들자.

따스한 봄바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암튼 빨리 회복해라. 오늘은 일단 내가 출전할 테니까.”

“힘내고.”

“나랑 비교당하기 싫음 알지?”

“넌 꼭~ 그렇게 한마디를 더 해서 문제야.”

그룹 스테이지 개막전 상대는 혼란한 유럽을 제패하고 올라온 절치부심의 강자 G1.

나야 분석을 워낙 오래 해서 CCE에서 뛰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지만, 다른 선수들에겐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이 팀은 전 미드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를 원딜러로 기용하다 보니, 스왑 전략으로 상대를 혼란하게 만드는 데 능하다.

마치 스프링, 겨울이 바텀에 섰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팀이랄까.

도깨비 같은 팀이긴 하지만, 그것도 내 앞에선 무용지물이라는 걸 보여줘야겠다.

생각이 뻔히 보이거든.

저격 밴이 여럿 들어오겠지만, 챔피언 풀이 넓고, 모든 챔피언 숙련도가 높은 나로선.

도무지 라인전에서 패배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

ESTN 파워 랭킹의 1위와 2위는 누구였느냐.

바로 Eye Gaming의 TheSin, 그리고 Mookie 선수였다.

작년 CWC 우승팀의 탑과 미드라이너인데다가, 스프링 시즌에도 변함없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당연했달까.

한국 팬들에게도 그들이 보여준 2018년 CWC에서의 압도적인 플레이가 각인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ESTN이 나름 합리적인 랭킹을 짰구나, 뭐 그런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2부 리그 소리를 듣는 유럽 팀. G1에겐 예외였다.

“진짜 어이없지 않아? ESTN 랭킹.”

“어이없지. CCK는 망했어. 이번에도 그럴 거고. 화끈하게 보여주자고.”

“좋지. 박살 내 버리자.”

유럽의 악동 G1.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 싸움을 만들고, 상대가 이리저리 휘둘려 다니는 동안 이득을 취해 CS 수급이 밀려도 게임을 끝까지 쥐고 흔드는 무서운 팀이었다.

노림수는 밴픽 때부터 시작됐다.

미드라이너 출신인 Parkzoo 선수가 바텀라이너로 뛰고 있어 밴픽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상대 팀이 ‘이 챔피언은 당연히 어떤 라인이겠지?’ 생각하고 있으면, G1은 그 예상을 완전히 받아쳐 오히려 카운터 라인을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라인전부터 카운터 챔피언으로 라인전을 이기면서 다른 라인으로 로밍 다니면, 전쟁 의회는 어느새 G1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곤 했다.

“Wander. 너 저 꼬맹이 이길 수 있지?”

“당연하지.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한테 질 이유는 없다고. 내 근육 안 보이냐?”

“넌 새꺄. 리컨을 근육으로 하냐?”

“됐고, 빨리 끝내자. 나 돌아가서 와우 해야 하니까.”

“지랄 났네.”

“뭐 어때. 빨리 이기자고.”

겨울과 상대하게 될 탑 라이너는 Wander.

타칭 천재 소리 듣던, 유체탑*이었다.

(*A체B : A에는 ‘세’계, ‘한’국, ‘유’럽 등 리그 이름을. B에는 ‘탑’, ‘정’글, ‘미’드 같은 포지션 이름을 넣어 어느 지역의 어떤 라인 최강자를 표현할 때 쓰는 말.)

실제로 그는 2019 CCE 스프링에서 리그 내의 모든 탑라이너의 재능을 몰아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게임 천재다운 면모를 선보였다.

압도적인 천재성으로 인해 노력이 부족했고, 자신도 그걸 알았지만.

그걸 굳이 극복하려 하지도 않았다. 극복하지 않아도 세체탑 소리 듣곤 했으니 별수 없었다.

하지만 2019년 초반, 한국에서 대격변이 일어나고. Freyja라는 여자 선수가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하며 그는 점점 ‘세체탑’ 보다는 ‘유체탑’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렸다.

진겨울의 폼이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도진의 부상으로 인해 스프링 시즌을 미드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탑라이너로서의 그녀는 두뇌와 피지컬을 모두 갖춘 괴물이라 불렸다.

겨울이 역사적인 탑 라이너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커뮤니티에 우스갯소리로 정말 많이 돌아다녔다.

떡밥을 굴리는 사람 중에는 Wander도 있었지만, 그는 다분히 조롱 섞인 의미로 밈을 애용했다.

한국 리컨 리그가 망해서 저런 여자아이까지 내세운다는 식으로 말이다.

“Wander. 스왑해서 탑 베린 괜찮겠어?”

“문제 없지. 저런 여자애를 남캐로 때릴 순 없잖아? 인터폴이 페도필리아로 잡아갈 지도 몰라.”

“진짜 병신같은 소리다.”

“아무튼 믿어봐! CS 안 먹어도 존나 때려줘야지. 죽을 때까지 괴롭혀준다.”

과한 자신감을 보이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코치가 한 마디 했다.

— Wander. 무조건 네가 아칼린 찍어눌러야 된다. 탑베린 준다고 미드랑 바텀 상성이 별로 안 좋아.

“아! 맡겨만 주세요!”

그러나 자신감 있게 게임을 시작한 Wander는, 10명의 선수 중 처음으로 흑백 화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 First Blood! ]

[ TU Freyja ▶ G1 Wander ]

겨울의 아칼린이 6레벨 찍자 마자 발생한 어시 하나 없는 솔로킬.

타워 근처였기에 절대 킬각이 나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한 Wander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 건 덤이다.

“왓더…. 도대체 뭐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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