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왜 이렇게 빨리 끝내나요
* * *
겨울 군단 출신 젊은 피가 합류하고 나서 TU의 게임 스타일이 확연하게 바뀐 건 맞지만.
상대하는 팀에 따라, 전략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선수들 역시 다양한 게임 플레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A라는 선수가 있다고 치자.
이 선수는 공격을 굉장히 잘하고, 피지컬과 맵리딩이 뛰어나 혼자 라인을 부수며 게임을 캐리하는 데 능하다.
자연스럽게 B라는 팀은 승리를 챙기기 위해 A라는 선수를 서포트 하는 쪽으로 다른 선수들을 운용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팀들도 손 놓고 놀지 않는다.
B팀을 상대하기 위해 X라는 팀은 다양한 전략을 연구했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A 말리기를 떠올린다.
강팀이라면 A를 말린다고 하여 팀 전체가 무너지진 않겠지만, 만약 A 원툴 팀이라면 쉽게 무너질 테지.
하지만 만약 A 말리기가 통하지 않는다?
이제 X팀은 새로운 전략을 시도한다. 다른 라인 말리기다.
A가 아무리 잘 성장해도 혼자 다섯 명을 상대할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때 밴픽으로 A가 캐리할 수 없는 픽을 쥐게끔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괴물 같은 선수들은 주류픽이 아닌 캐리 픽을 어디서 꺼내와 게임을 지배하곤 하는데. 그런 슈퍼 플레이어는 흔치 않으니까.
이 과정에서 A라는 선수에 대한 모든 데이터가 사용된다.
점멸은 주로 언제 쓰는지.
무빙 방향은 주로 어느 쪽인지.
어느 타이밍에 합류해 싸움하는지.
CS 수급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등등.
데이터가 정리되고 압축되어 선수들이 성공적으로 A를 억제하면, 이것이 사례가 되어 점차 리그 내 다른 팀에게 퍼져나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강팀이라면 이때 다른 라인이 캐리해주며 게임을 원점으로 돌리지만.
A 원툴인 팀은 점점 성적이 나락으로 간다.
여기서 A를 진겨울, B팀을 TU, X를 TU와 상대하는 다른 팀이라고 바꿔 보면.
코리안 컵 시작 전 각 팀의 감코진이 TU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하던 전략이 상술한 내용과 비슷했다.
이도진도 있으니 투탑 체제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대부분 팀에서 제일 위험한 요소를 진겨울로 꼽았다.
작년에 장재홍이 파란의 전학생으로 리그를 휩쓴 덕도 있었고, 이도진의 2018년 폼이 좋다고만은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전부 Freyja 때문이었다.
애초에 탑라이너로 출전하지도 않았고.
플레이가 획일화되어있지도 않았던데다가.
순간순간 최적의 플레이를 펼치기에 버릇도 없었으며.
코리안 컵 막바지. 모든 라인을 다 돌아다니며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펼치기까지 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선수였다.
관계자 중 하나가 조커 카드 같다고 말한 것처럼, 탑에 가면 탑라이너가 되고. 미드에 가면 미드라이너가 됐다.
누군가의 플레이를 모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세히 파헤쳐보면 그 디테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리플레이를 복기하면 복기할수록 나오는 그녀의 순간 판단력은 입이 쩍 벌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습관적인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
매 순간순간이 판단의 연속이었으며, 아무리 급박한 순간에도 최적의 판단을 놓치지 않았다.
‘진겨울이 라인에 존재하는 TU는 과연 이길 수 있는 팀인가?’라는 질문에 결론을 낼 수 있는 팀은 Falcon을 제외하곤 없었다.
물론, 그런데도 리컨은 팀플레이가 필수고.
진겨울조차도 아주 가끔이지만 패배를 겪었다.
그를 통해 다른 팀들은 확신했다.
TU를 이기려면, 겨울을 상수로 두고 그녀가 없는 라인을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고.
하여 겨울이 서는 라인의 반대로 가서 함께 이득을 취하는 방식이 주로 쓰이게 되었다.
겨울은 무적일지 몰라도, 다른 선수들은 무적이 아니었으니까.
이마저도 겨울이 미드에 서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그들은 잠깐이나마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EG 역시도 그 이론에 근거해 TU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대 PB 전에 진겨울 대신 김종하가 출전해 무난한 폼을 보여주긴 했지만, EG전은 중요하니 당연히 진겨울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온갖 조합을 연습해봤고, 어떻게 하면 쉽고 빠르게 바텀을 터트릴지 집요하게 연구했다.
“소라타다 이거.”
“준비했던 대로 하자.”
그러나 겨울은 출전하지 않았고. TU는 뜬금없이 소라타 조합을 들고 왔다.
후반 지향적이고 꽤 오래 드러누워야 하지만. 제대로 눕기만 하면 후반 파괴력이 말도 안 되는, 코어 템만 제대로 나오면 뚫는 게 불가능한 바텀 듀오 말이다.
하지만 EG는 CMI에 소라타 조합이 최소 한 번은 나올 것이라 예상했고.
오래전부터 이 조합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릴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상대는 진겨울 없는 TU,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완전히 압살해 버리자. 그러면 쟤들도 깨닫겠지. Freyja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맞지. 이기자!”
“자신감 깎아 버리자!!”
*
— Mickeylove가 문제에요!
— Mickeylove가 퍽 퍽!
— 트리플킬….
— 왜 이렇게 빨리 끝내나요 EG?!
— 16분대!!
— 이거는 역대급인데요!!
— 끝났습니다.
— 15분 55초, 15분 56초…!!
— GG!!
처음 밴픽 전략에 대해 김 감독에게 들었을 때 다소 걱정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 게임이 심하게 망가질 줄은 나도 예상 못 했다.
“진짜 큰일났네….”
“진짜 시원하게 망했네요.”
“와… 미치겠네.”
김동균 감독은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 어쩔 줄 모르고 계속 손톱을 물어뜯었다.
도대체 16분 안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
인베 들어오던 상대 서폿 너틸러스의 갈고리 미스.
그걸 보고 기회라 여긴 TU가 싸움을 건 순간 모든 스노우볼이 시작되었다.
2019년 TU의 체질 변화로 생긴 공격성이 소라타 조합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갈고리가 빗나갔어도 그렇지, 상대는 인베 싸움에서 유리한 조합.
심지어 드레이든이 아닌가. 스노우볼에 최적화된 처형인. 킬이라도 먹었다간 게임이 망한다는 그 수염쟁이 말이다.
우려한 대로 인베 상황에서 드레이든이 킬을 먹고. 미드와 바텀 점멸이 우르르 빠졌다.
그때부터 EG는 미드와 바텀 위주로 TU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시야 페이크를 사용한 2렙 갱킹으로 이도진이 죽고.
미드에서 이도진이 죽자 스노우볼은 그대로 바텀으로 이어진다.
TU 바텀 듀오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에서 이어진 다이브로, 또 드레이든 킬.
바텀이 터지자, 이번엔 또 미드.
점멸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도진은 이런 속도를 예상하지 못한 듯 또 킬을 내준다.
EG는 그야말로 복서처럼 바텀과 미드에 번갈아 가며 연속 잽을 날렸고.
초반부터 터지기 시작한 게임에 정신 못 차리던 TU는 깜짝 놀라 얻어맞기 바빴다.
눈 뜨고 보니 게임 시작한 지 7분 만에 드레이든이 핵심 코어템인 혈귀검을 뽑아 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텀 타워는 없어졌고, 이미 글로벌 골드 차이는 4천.
김종하는 눈 떠보니 팀이 져 있는 나름 그리운 경험을 했다. 나름 탑에서 분전하고 있었지만, 잘 누워야 하는 팀원이 망해버리니 답이 없었던 것이다.
절망적인 전쟁 의회의 모습은 그가 과거 씹모타니까 호의 선장이라 불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을 것이다.
김종하나 최도윤은 뭐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게임이 터졌으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고.
이도진도 이런 패배로 멘탈 무너질 선수는 아니니 괜찮은데.
민재와 윤호가 문제였다.
그들의 멘탈을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영향이 계속 이어질 정도로 걱정스러웠다.
이거 봐라. 리갤 서버 터졌다.
— 어떡해 저거….
울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작게 울린다.
나는 숨죽여 말했다.
“이도진 걱정은 안 해도 돼. 걘 이런 패배보다 2017년 CWC 결승전 때가 더 힘들었을걸.”
— 그런가…? 아니 도진 오빠는 둘째치고. 다른 선수들 엄청 힘들겠네….
“걱정 마.”
울이가 선수들 걱정을 다 하고.
경기장 한 번 안 나가보겠냐고 물어봤을 땐 거절하더니, 싱가포르에서 신나게 놀고 나서 선수들과 은근히 정든 모양이다.
하긴, 매일 오전에 수영장에서 티격태격하며 잘 놀았던 걸 보면. 내가 선수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부러웠던 걸지도.
‘윤호 멘탈은 도진이가 케어할 수 있을 거고… 민재를 내가 챙겨야겠구나.’
덤으로 김종하의 상태도 확인해 봐야겠다.
EG전 이전의 상대인 PB가 정신없는 난전을 선호하는 아웃파이트 복서였음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자기 플레이를 잘해주었다.
아마 봄의 기운 덕분이겠지만, 트라우마도 어느 정도 극복된 것 같으니 확인할 겸 이야기를 나눠 보는 수밖에.
**
함께 경기를 시청하던 모든 스트리머의 채팅창이 터지고.
공식 중계방송 채팅창이 1557로 도배되는 건 물론이요.
커뮤니티와 선수 개인 SNS에까지 침투했다.
그야말로 1557의 날이었다.
대회 중간에 이런 일이 터진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2일 차의 마지막 경기라 파급력이 엄청났다.
공식 중계방송에선 1557 도배가 너무 심하다 보니 금지어 설정을 하고, 1$$7 등의 파생형 도배도 일일이 차단했지만.
이미 모래성 무너지듯 처참히 털린 TU의 경기력에 뿔난 팬과 이때다 싶어 대거 몰려온 분탕충이 뒤섞여 만들어진 아수라장이었다.
그래서 다분히 TU 편파적으로 보이는 대처는 타오르는 불을 높이는 휘발유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CCK 멸망의 날이었으며, 동시에 TU 팬들에게 좌절과 공포의 날이었다.
대가리 깨져도 TU와 선수들을 지지한 팬들조차도 감싸고 돌 수 없는 졸전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인베 단계에서 빠진 아군의 점멸을 체크한 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미드와 바텀을 완벽하게 터트렸다.
초반 TU의 판단 미스가 크긴 했지만, 밴픽 때부터 차근차근 압살당했다.
EG가 워낙 잘 대처한 바람에 7분이 지날 무렵 TU의 승리 확률은 1%도 안 됐다.
소라도, 타린도.
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고가 터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게임이 끝나 버렸다.
“괜찮은 전략이긴 한데, 지금 우리 스타일엔 역시 안 맞는다.”
“…. 누나도 그렇게 생각해?”
“응. 영 못 써먹겠던데?”
민재는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경기가 워낙 크게 터지다 보니, 10분이 지날 때쯤부턴 행복 버튼을 누르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찢어진 부분을 봉합하려 할 때마다 더 크게 찢어졌으니, 경기하는 선수들 입장에선 답이 없었을 듯하다.
합류 싸움을 보려 했더니 Mickeylove의 드레이든과 말이 통하질 않았거든.
“우리 그래도 후반 지향형 픽 몇 번 하지 않았나?”
“근데 소라타는 그중에서도 제일 심한 후반 지향형 픽이니까. 솔직히 힘들긴 했어.”
2019시즌에 초중반 노림수와 국지전이 중요한 걸 아니까 이도진도 어떻게든 복구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런 노력이 오히려 스노우볼을 더 크게 굴려 15분 57초 게임을 만들었다.
미드에서 공격적으로 라인 압박 하다가 당한 두 번의 갱. 그게 게임 터지는 데 준 영향이 엄청났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움 됐을까? 싶다가도. 아무것도 안 했어도 비슷하게 졌을 것 같더라고. 드레이븐 혈귀검 뜬 순간부터 답이 없었어. 이딴 조합 진짜 다신 안 할 거야.”
“사실 그 조합 내가 감독님한테 추천했는데.”
“…….”
민재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미간을 찡그린 채 나를 노려봤다.
항상 리스펙 가득, 차분한 표정이던 그가 처음으로 보인 격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장난이야. 사실 감독님이 우겼어.”
“……. 진짜야?”
“아니? 사실 잘 몰라.”
“뭐냐고. 하나만 해….”
“혹시 밴픽 때문에 패배했다. 그런 생각 가지고 남 탓으로 돌리고 싶은가 싶어서 물어봤어.”
“뭐래. 밴픽 탓은 아니야. 그냥 우리가 제대로 못 한 거지.”
민재는 크게 탄식하며 머리를 북북 긁었다.
“솔직히 말해서 홀가분하긴 해. 뭐랄까. 그룹 스테이지 시작하고 나서 관중들이랑 눈 마주치면서 게임하니까 부담감 장난 아니었거든. 지면 큰일 나겠다. 무조건 이겨야겠다. 이거 못 이기면 어떡하지…. 겨울 누나보고 대신 뛰어달라고 하고 싶다.”
“뭐라는 거야. 내가 네 존재감을 지워주길 바라는 거야?”
“… 장난이고.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차이로 시원하게 지고 나니까 오히려 낫네.”
그래. 이겨 보려고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잖아?
초반에 판단이 아쉬웠고.
조합과 선수들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으며.
상대가 너무 강해서 눈덩이가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불어서 그렇지 뭐.
“근데 내가 엔트리에 있었으면 50% 확률로 이겼을 것 같아.”
“…. 아 그러셔?”
“응. 그러셔.”
“짜증나니까 말꼬리 물지 마.”
“야. 너 누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내가 너만큼은 믿었는데.”
“아 몰라!! 다음 경기 바텀 박살 내 버릴 거야. 나 진짜 화났어.”
올해 데뷔해서 세계 무대가 처음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패배를 겪었음에도 차분하게 다음을 준비하는 민재가 기특해서.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담뿍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박살 내라. 기대할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