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바람이 분다 (1)
* * *
한 사람이 분신술을 써서 5인분을 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조용한 팀 보이스.
그 속에서 다섯 챔피언이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먼저 포문을 연 건 놀랍게도 바르스였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듯한 번개 같은 앞 점멸 궁 이니시.
속박된 갈레오의 체력이 단숨에 1/3 이하로 떨어지고, 간신히 황금 시계로 버텼다.
동시에 겨울의 핑이 용 둥지 안쪽, 와드 박으라고 만들어 놓은 듯 푹 들어간 홈에 찍힌다.
먼저 용 둥지 안쪽에 들어간 최도윤이 간을 보며 상대의 제어 시야석을 지우고, 핑이 찍힌 곳에 제어 시야석을 세운다.
황금 시계가 끝나도 결국은 죽을 게 보이는 구도였던지라, 갈레오는 어쩔 수 없이 도발과 함께 정면으로 진입해 봤지만.
TU는 같은 극을 만난 자석처럼 유유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필이면 도발 맞아준 것도 가장 튼튼한 자르갈 4세였다.
갈레오의 움직임을 보고 모두가 다음 행동을 예측한 것이다.
갈레오를 살리며 전투 구도를 이어가고자 신드리아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W로 구체를 떨어트리고 새로 소환한 구체까지 해서 진영 붕괴로 상대를 기절시키는 일발 역전 각을 보는 신드리아.
하지만.
“진영 붕괴!!”
“으아아니! 다 피했어요!”
“무우우우비이이잉”
“TU 뭔가요. 무빙 살아있어요!”
TU의 선수들은 그것도 예측한 듯 가볍게 피해준다. 점멸을 써야 한다면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리고 그사이 용 둥지 안에는 겨울의 케렌이 도착했다.
“케렌 도착!”
점멸, 그리고 마법 벨트로 전진하는 케렌. 거대한 번개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상대 챔피언 셋을 붙들며 전장을 갈라버린다.
적의 비좁은 시야를 완벽히 활용한 플레이에, G1의 진형은 속수무책으로 붕괴하고 말았다.
“찌지직! 찌직!”
“으와아아아악!”
용 둥지 안쪽에서 각을 보던 최도윤이 벌린 입 안으로 들어온 신드리아와 갈레오를 궁극기로 예쁘게 가뒀다.
— 레마시아!!
“이제 집에 가라 쥐 원!!”
“결승전 경기장이 슬슬 보이죠오오오!”
“티유! 정말 완벽한 플레이! 완벽한 한타!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
[리컨 갤러리][개념글][프로TU스]
(4강_3세트_1.clip)
(4강_3세트_2.clip)
도대체 말도 안 하고 어떻게 저런 한타를 함?
친구들이랑 할 때는 다 얘기해 줘도 좆같이 하던데
그래 느그들 말야 이 시발롬들아
[전체 댓글 242개]
— ㅇㅇ(143.111) : 연습의 결과지
— ㅇㅇ : 추수기랑 도진이랑 유명한 연습괴물 아니냐 ㅋㅋ
— ㅇㅇ : 솔직히 저 연습괴물 사이에 끼어 있으면, 하기 싫어도 연습하게 될 걸?
└ ㅇㅇ : 경기에서 실수했는데 다른 사람들 다 잘하고 자기만 못한다? 바로 범인 지목되지 씹 ㅋㅋ
└ ㅇㅇ(39.7) : 튜갈 범인찾기 존나 무섭지 ㅋㅋ
└ ㅇㅇ : 나 튜갈인데, 이건 인정한다
└ ㅇㅇ(108.40) : 솔직히 다른갈이라고 다르냐? ㅋㅋ 이새끼들 뭐만하면 범인찾으면서 아닌척하노 ㅋㅋ
— ㅇㅇ(94.101) : 전에는 이도진 팬들만 신경쓰면 됐는데 이젠 추수기 팬덤까지 신경써야되니 연습을 어떻게 안하겠냐 ㅋㅋㅋㅋㅋ
└ ㅇㅇ : 나같으면 쫄려서 못한다 씹 ㅋㅋ
[리컨 갤러리][개념글][선생님… 와우가 하고 싶어요…]
(포기하면_편해.jpg)
김종하 보니까 추수당하고 갑자기 컨디션 회복했던데
Wander게이도 추수당하면 되지 않을?까?
[전체 댓글 195개]
— ㅇㅇ : 몰?루
— ㅇㅇ : ㅁ?ㄹ
— ㅇㅇ(39.7) : 이러다 진짜 두유노우 추수 할 날이 오겠군
— ㅇㅇ : 손발 오그라들기 전에 리컨 접어야겠노
— ㅇㅇ(108.101) : 와! 추수 아시는구나! 정.말.무.섭.습.니.다
└ ㅇㅇ : 솔직히 하나도 안무서움 ㅋㅋ
└ 겨울이노예 : 무서울 수가 없지 ㅋㅋ
└ ㅇㅇ : ㄷㄷ 노예게이 살아있었냐
한창 리갤 반응을 보던 김종하는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침실 밖으로 나가니 선수들이 먹고 치우지 않은 그릇들이 어지럽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룸서비스 불러서 치워달라고 하면 될 일이기에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연습에 몰두하는 중이지만. 유독 한 사람이 낄낄거리며 김종하를 반긴다.
“야. 너 연습 안 하냐?”
“난 다 했어. TL 픽밴 분석 중.”
“그런 건 감독님이랑 코치님한테 맡기고 챔피언 연습이나 해.”
“이미 메타픽은 다 잘 다루는데 뭘 더 연습해. 체력 보존하는 거야 체력 보존.”
“그럼 비장의 카드라도 준비하던가.”
“그건 연습할 필요가 없지 않나? 맨날 심심하면 솔랭에서 하는데.”
재수가.
없다.
김종하는 버티지 못하고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들어 겨울에게 집어던졌다.
겨울이 가볍게 허리를 틀어 피했지만, 날아간 쿠션엔 날개가 없었다.
포물선을 그린 쿠션이 한창 연습 중이던 최도윤의 뒤통수를 가격하고는, 그대로 튕겨 접시가 놓인 테이블을 건드렸다.
와장창.
테이블 위의 그릇 몇 개가 쿠션에 부딪혀 깨지고, 일부는 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아이 진짜. 뭐 하는 짓이야!”
겨울은 한숨 쉬며 바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선수들이 다쳐서 내일 경기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접시 위에 남아 있던 소스가 바닥에 흐른 탓에 누군가 밟고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진짜 못 산다. 김종하 인성 어쩔 거야 이거.”
“아오 야. 그걸 피하면 어떡하냐?”
김종하가 헐레벌떡 달려와 겨울을 도왔다. 휴지로 바닥에 흐른 소스와 음료를 닦아 내고, 접시 조각들은 조심스럽게 주워 테이블 위의 쟁반에 다시 올렸다.
게임에 집중한다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도진이 진행 중인 솔랭도 내팽개치고 겨울에게 달려왔다.
“너 손 다치면 어쩌려고. 이리 나와.”
“안 다치거든? 내가 애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리 나와. 가서 내 솔랭이나 대신하고 있어. 너 다치면 큰일 나. TL한테 지고 싶어?”
겨울이 어이없어서 한마디 했다.
“그 말은, 나 없으면 우리 팀은 북미보다 못하다는 뜻? 어떻게 북미잼에 비교를 할 수가.”
“와. 이도진. 너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냐?”
김종하가 씩씩거리며 이도진에게 초크를 건다. 늘 있던 두 사람의 힘 싸움이다.
“좀! 장난은 이따 치고. 일단 좀 치우고 하자. 내가 아니라 오빠들이 다치겠네.”
바닥에 아직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남아 있어서 위험한데, 도대체가 이놈들은 장난쳐야 할 때 안 쳐야 할 때를 모른다니까.
그러나 이도진이 계속 엉덩이와 어깨로 밀어내는 통에, 겨울은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못하다 보니 프런트에 전화 거는 것도 사무국 직원의 몫.
겨울은 주변을 서성여 봤지만, 갈 곳이 없어 결국 도진의 자리에 앉아야 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신 게임을 하는 겨울을 보며, 도진은 생각했다.
‘왜 저렇게 챙기는 거야…. 신경 쓰이게.’
방금도 굳이 그녀가 나서서 직접 치울 필욘 없었다.
선수들을 돕기 위해 나와 있는 사무국 직원이 항시 대기 중이었으며, 호텔 직원을 부르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그런데 자신의 역할은 팀원을 보조하는 것인 마냥 안절부절.
앞장서서 팀을 이끌어야 할 선수가 자꾸만 뒷선으로 물러나려 하는 듯한 불안감이 들고 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진이 은퇴하지 않겠다고 말해서일까? 그녀는 그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닐 텐데.
분명 도진에게 은퇴해도 괜찮다고, 자기가 이 팀을 책임질 테니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이야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갑자기 올해만 하고 그만둘 사람처럼 저러는 건지.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
결국 겨울의 행동이 신경 쓰였던 도진은 그날 저녁 겨울을 따로 불러냈다.
사람이 잘 찾지 않는 호텔 9층의 공중정원.
늦은 밤인데도 불어오는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연습해야 하는데 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쉬자.”
“…. 아주 살판났다 그치? G1 이겼으니까 게임 다 끝났지?”
“그런 거 아냐. 결승전 준비는 철저히 하고 있으니 걱정 마. 그냥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물어보고 싶은 거?”
짠 내 나는 바닷바람이 끈적하게 두 사람을 감싸 온다.
어둑한 하늘 아래 조경수가 바람에 흔들리는 동안, 겨울은 뚱한 시선으로 이도진을 응시했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이도진이 질문을 건네 왔는데, 그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너. 혹시 올해 지나면 어디 가? 아줌마랑 다시 미국 간다거나, 그런 거야?”
“… 뭐?”
“아니 좀… 뭐라고 해야 하지. 요즘 너, 이상할 정도로 욕심이 없잖아. 국제대회야. CMI라고. 오고 싶어도 못 오는 선수들이 수두룩빽빽한데…. 컨디션도 안 좋은 종하를 어떻게든 내보내려는 거 보면 이러다 팀을 그만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쏟아지는 말을 듣고 있던 겨울이 탄식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었다.
“아니… 내가 그만두긴 뭘 그만둬. 나 미국 안 가. 나 영어 못하는 거 알잖아?”
“출전 기회 양보하는 건. 그건 왜 그런 건데.”
“그거야 컨디션 조절할 겸…. 종하 오빠 국제전 트라우마도 고쳐줄 겸…. 겸사겸사….”
“… 핑계네.”
“핑계 아니야.”
“나한텐 핑계로 보여. 너. 정말 계속 프로게이머 하는 거 맞지? 나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
이도진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가 어디론가 떠나갈까 봐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왜 그러지? 딱히 게임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연습도 진지하게 잘했고, 필요할 때 출전해서 합도 잘 맞췄고.
단순히 김종하에게 출전권 양보한 것 두고 의심하기엔 뭔가 근거가 부족하지 않나?
“아니면. 봄이…. 네가 그 몸에 머물 기간이 이제 얼마 안 남은 거야? 그래서 그런 거야? 혹시 겨울이가 버티지 못할까 걱정스러워서. 미리 겨울이 없이도 굴러갈 수 있는 팀으로 만들려는 거야?”
“…….”
이제야 그가 왜 그렇게 나를 신경 쓰는지.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썼는지 깨달았다.
‘봄이로…. 봤다고? 날?’
— 헐….
함께 이 상황을 지켜보던 울이도 당황한 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오해가 생겼지? 봄이라고 느껴질 만한 행동은 딱히 한 적이 없을 텐데.
“저기 그. 오해가 좀 있는데. 나는 봄이가 아니고….”
“그래. 겉보기에는 겨울이지. 그런데 보면 알아. 지금 그 몸을 통제하는 건 겨울이가 아니잖아.”
“…아니 그러니까.”
“싱가포르에서도. 수영장 놀러 나갈 때는 겨울이었지? 둘이 번갈아 가며 몸을 쓸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원할 때만?”
“…….”
관찰력이 좋은 놈이라 분석이 빨랐던 걸까.
한 번 의심을 키운 뒤부턴 계속 나와 울이를 따로 보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차이가 났나? 그럴 리가 없는데?
“봄이 너. 물 무서워했잖아. 위험하다고….”
“… 아. 아니 그건 말이지.”
“그래서 겨울이가 그때만큼은 대신 나갔던 거 아냐? 겨울이는 놀고 싶었겠지. 그런 경험을 또 언제 하겠어.”
“아…음….”
큰일 났다.
이미 나를 완전히 봄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라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지경에 왔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내린 결정을 바꾸도록 설득하기는 어렵다. 확신을 가지기까지 수도 없는 검증을 거치며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내가 배도현이라고 확실히 증명해야만 납득할 분위기인데. 증명할 방법이 있나?
이미 죽은 사람인 내가, 그 사실을 밝힌다고 하여 이도진이 납득할까.
— 오빠.
내 고민을 지켜보던 울이가 말했다.
— 잠깐만… 바꿔줘. 내가 해결할게.
“… 뭘 어쩌려고.”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도진 앞에서 둘이 함께 있음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
— 봄이를 만나게 될지 어쩔지도 아직 확실치 않잖아. 오빠는 장재홍이 정말 숨기고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봄이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설마. 그럴 리가.
— 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 교활한 놈이라면…. 봄이의 존재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진 봄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지금 도진 오빠는 잘하고 있는데, 괜히 봄이 생각하느라 집중력 흐트러지면 곤란하잖아.
울이의 바람은 간절했다.
— 올해가 아니면. 도현 오빠가 도진 오빠랑 같은 팀인 올해가 아니면…. 언제 도진 오빠가 다시 빛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미 손목도 한 번 크게 다쳤고. 나 걱정 안 시키려고 은퇴 안 한다고 말했던 걸 수도 있거든.
전에도 항상 그랬다고.
자기 몸에 문제가 생겨도,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싫어 숨기던 사람이 이도진이었다고.
울이는 나를 설득했다.
— 그러니까…. 내게 맡기고. 오빠는… 미안하지만 봄인 척해주면 안 될까? 여기까지 잘 왔잖아. 타이밍이 이래서 진짜 좀… 그렇긴 한데. 서머 시즌 끝날 때까지만. 봄이를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까지만이라도.
봄의 연기를 해달라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도진의 올해를, 봄이 되어 함께 빛내달라고.
— 미안해. 이런 부탁만 계속해서 미안. 그렇지만 봄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라….
“됐어.”
진짜 겨울아.
넌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
그래도 이번 일로 내게 빚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먼저 목숨을 빚진 것도 나고.
그 덕에 난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었으니.
“네 말대로 할게. 겨울이 네가 도진 오빠랑 이야기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