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평범한 진겨울입니다
* * *
퇴근 시간이라서 날아갈 듯 기쁜 게 아니다.
사장이란, 자고로 퇴근 후에도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자리이니.
그러면 어째서 기쁜가?
계속 겨울이 옆에 눌어붙어서 그녀의 인생을 방해하던 놈이 드디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 누굴 닮았는지… ]
— 누굴 닮았는지… : 우승하면 돌아가는 비행기 비즈니스 해주기로 한 거 안 잊었지?
— 누굴 닮았는지… : 약속 어기지 마
— 누굴 닮았는지… : 재밌는 일이 벌어질걸
진짜 누굴 닮았는지.
엄마 아빠는 친구 이하에, 어른은 무서워하지도 않던 그 겨울이가 돌아왔다.
혹시나 해 계속 카톡을 보내봤더니, ‘우리 이렇게 자주 연락할 사이 아니잖아’라며 톡 쏘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 이거야.
이게 겨울이지.
원래 이 집안 피가 망령을 잘 끌어당긴다.
성인이 되기 전에 몸에 세 들었던 유령들은 전부 사라지지만, 그전까지는 무슨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조심해야 했다.
‘… 그래도. 일 하나는 참 열심히 하던 애였는데.’
뭘 시키면 군소리 없이 따박따박.
사업가로서 부하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로 착실한 청년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TU의 리그 오브 컨실 팀은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새 건물 입주비, 새 유니폼 값 등의 구단 전체가 분담한 비용은 물론이고.
CMI때 선수들 비즈니스 태워준 비용과 싱가포르에 관광 겸 워크숍 보내준 비용 등을 전부 메꾸고도 여유 자금이 남았다.
이번 CWC 우승 시 항공권 업그레이드 조건도 그래서 내걸 수 있었다.
올해 선수단을 도진이와 겨울이 둘이서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시즌 중 도진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겨울의 지분이 예상보다 훨씬 높아진 상태.
마이어트에서 괜히 겨울이를 데빌 메이든이라고 불러준 게 아니다.
그녀의 존재가 전 세계적 리그 흥행에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었음을 대회 운영 측에서 인정한 것이다.
‘그 친구는 고생만 하다 가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것도 같다.
민청하는 배도현에게 악덕 사장 그 자체였다.
챙겨준 거라곤 용돈 마음껏 쓰라고 카드 풀어줬던 게 전부. 그마저도 선수로 계약한 뒤엔 제한을 걸었다.
싫다는 애 자꾸 이도진이랑 붙여서 억지 데이트하게 만들고.
겨울이 몸 차지하고 있을 거면 일이라도 열심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스케쥴이 너무 고돼서 쓰러질 것 같다고 하소연하지 않았더라면, 민청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을 뻔했다.
<엄마 맞아?="" 말도="" 안="" 되는="" 강행군="" 요구한="" 민="" 대표=""> 따위의 기사가 연예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했겠지.
지금도 흐름이 신기하다.
시즌 중에 찍은 광고가 많아 충분히 팬들한테 욕먹을 수 있었는데도, 겨울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며 게임까지 잘하니까 칭찬 가득.
진겨울 또 왜 이러는 거냐고 항의가 들어오긴 하지만, 사무국 말로는 통화 잠깐 하다 보면 금방 웃으면서 끝난다던가.
겨울이 안 나와도 이길 건 아는데, 그냥 보고 싶으니까 심술부리는 거다.
그만큼이나 겨울이가 팬을 많이 끌어모았다.
… 정확히는, 겨울의 탈을 쓴 배도현이었지만.
— 고마워요, 엄마.
엄마라는 단어.
그걸 몇 년 만에, 딸의 입이긴 해도 전혀 일면식도 없는 놈에게 듣고 감동할 줄은.
“…….”
겨울의 인스타에는, 그간 있었던 다양한 일이 남았다.
연습실에서 콜라 쏟고서 절망하는 모습.
동료 선수들에게 뭔가를 집어 던지며 버럭버럭하는 모습.
멍하니 있다가 세상 예쁘게 찍힌 모습.
놀이공원에서 신나 뛰어다니던 모습.
인터뷰 끝마치고 팬들 하나하나 챙기며 인사하는 모습.
전부, 겨울이지만 겨울이가 아니었다.
진짜 겨울이는 이럴 애가 아니니까.
인생을 투쟁으로 바꾸어 버린 소녀에게, 여유와 온정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민청하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그래서 배도현을 떠나보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건가.
괜히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이상한 미련이 남은 건가.
까톡. 알림음이 들린다.
퇴근을 앞두고 가방에 집어넣었던 폰을 꺼내 드니, 예상치도 못한 메시지가 와 있다.
[ 누굴 닮았는지… ]
— 누굴 닮았는지… : 엄마
— 누굴 닮았는지… : 밥은 챙겨 먹고 일해
“….”
민청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싶어서.
아니. 설마 배도현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건가?
[ 누굴 닮았는지… ]
— 누굴 닮았는지… : (사진)
— 누굴 닮았는지… : 우리 오늘 개맛있는거 먹거든 ㅋ
— 누굴 닮았는지… : 엄마가 어릴때 해준 밥 생각나더라
— 누굴 닮았는지… : 내가 그런 걸 어떻게 먹고 자랐나 모르겠어
“……. 이 망할 것이 진짜.”
그럴 리가 없지.
평소의 겨울이다.
장난치려고, 일부러 서두에 저렇게 써서 민청하를 홀린 것이다.
민청하는 한숨 쉬며 다시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신나서 퇴근하려 했더니만, 갑자기 기분이 푹 가라앉는다.
창밖에 내리는 비가 후드득후드득.
바람과 함께 박자에 맞춰 창문을 때린다.
“그래도 전 보단… 나아졌나?”
겨울이가 이런 장난을 친다?
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메시지를 다시 들여다보면, 처음 두 마디는 배도현이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겨울이 몸속 어딘가에 아직 배도현이 남아있다는 뜻이거나. 겨울이가 배도현이라는 인간의 성격을 흡수했다는 뜻이겠지.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민청하는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으며 어릴 적 자신의 모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였지.
영혼과 영매에 관한 이야기였던가.
— 영혼도, 사람처럼 다양하지. 다 똑같은 영혼이 아니다.
— 하나는 몸 주인을 내쫓고 그 몸을 차지하는 놈. 이놈들은 보통 악귀인 경우가 많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지.
— 둘은 몸 주인과 타협해 그 몸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놈. 착한 놈들이다. 보통 안타까운 인생을 산 친구들이 많아. 하나와 비슷하지 않으냐고?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불우한 인생을 똑같이 살았대도, 하나와 둘은 인생에 대한 태도가 달랐던 거란다.
몸 주인이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영매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인 경우, 영매는 원하는 영혼을 자신에게 받아들일 수 있다.
영혼의 성정이나 특성을 흡수해 자신을 좀 더 갈고닦게 되는 것이다.
겨울이는 아마도 이 과정을 거쳤을 확률이 높다.
영혼을 보며 살아왔음에도 그들과 담쌓고 지낸 민청하와는 천지 차이인 것이다.
[ 누굴 닮았는지… ]
— 나 : 그래, 맛있게 먹으렴
— 나 : 엄마 퇴근한다, 대회 열심히 하고
— 누굴 닮았는지… : ㅇㅇ
“이게 진짜. 엄마한테 응응 보내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에서 나고 자라게 하는 게 아니었다.
어릴 때 생긴 버릇은 평생 간다더니.
존댓말 없이 어린 시절을 지나니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권에선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버렸었지.
학교에서 애들이나 싸움질이나 하고.
친구가 된 봄이 고생도 참 많이 시켰다.
‘봄이 엄마한테 미안해 죽겠어 아주….’
흥.
민청하는 콧김을 내뿜으며 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폰을 꺼냈다.
바로 인스타에 들어가 사진을 하나 다운받고.
그 사진을 폰의 배경으로 설정했다.
“나도 늙어 가나….”
겨울이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평생 겨울이 사진을 배경으로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지랄맞고 말 안 듣는 딸이었다.
“이래서 엄마가 나보고 꼭 결혼하라고 했던 거구나….”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은 없다.
항상 돈으로 때우려고 했고, 귀찮은 건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떠넘겼으니까.
그래도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아마 겨울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있는 방해물을 전부 치워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민청하는 배경화면 속, 싱가포르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뛰어다니던 겨울의 웃는 모습을 보며 따라 웃어본다.
씨익.
웃음없이 몇 년을 산 건지, 안면 근육이 땅긴다. 갑작스런 요구에 신경계가 불편함을 호소했다.
**
Royal Kingdom.
CCC 내에서는 TU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명문 세가.
TU에 프랜차이즈 스타 이도진이 있다면, RK에는 Ozi가 있다.
데뷔 후 단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고, 수년간 자리를 지키며 굳건한 팬층을 이끌어 준 강력한 원딜러.
세계에서 가장 딜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꼭 세체원으로 언급되곤 하는 선수.
재밌게도, 그는 데뷔 직후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으며 꽤 오만방자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CCC를 제패한 그는 국제 대회마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미친놈을 하나 만나게 된다.
바로 Plum, 이도진이었다.
마왕이 누구인가? 바로 세계를 힘으로 틀어잡고 절대 왕좌를 이룩하는 자다.
시대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하게 변해 왔지만, 항상 천마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이도진이 마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절대 왕좌를 쥐고 절대 내어놓지 않았으며, 아직 그의 아성에 도전해 성공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Ozi 입장에서 자신은 CCC의 용사이며, 이도진은 세계를 장악한 마왕이지만.
안타깝게도 리컨의 세계관에는 용사 보정 따윈 없었다.
현성 유니버스, 악마 같은 팀.
15년부터 17년까지 그들은 가질 수 있는 모든 걸 다 가졌다.
15년 스프링 우승, CMI 준우승, 15년 서머 우승, 15년 CWC우승, 16년 스프링 우승, 16년 CMC 우승, 16년 CWC우승, 17년 스프링 우승, 17년 CMI우승, 17서머 준우승, 17년 CWC 준우승.
그때마다 번번이 털리고, 뒷길로 쓸쓸히 퇴장해야 했던 팀이 RK였다.
올해는 다르다.
올해의 Ozi는 해낼 수 있다.
올해는 CCC의 해다…!
라며 수없이 행복회로를 돌린 중국 팬들은, 결국 2018년 두 명의 한국인 하이퍼 캐리가 우승을 견인한 EG에 의해 성불하게 된다.
그해 Ozi는 중요한 순간에서 고배를 마셨다.
서머 우승 후 1시드 출전. ‘올해의 RK는 정말 다르다!’라며 엄청난 기대를 품고 시작했건만, 이게 웬걸.
그룹 스테이지 1위로 잘 통과해서 2위로 올라온 G1을 만났는데, 그 G1에게 2:3으로 통한의 패배를 하고 만다.
약점은 Ozi였다.
수년간 Ozi 키우기로 팀의 체급을 유지해왔던 RK가 결국 Ozi를 집중 공략한 G1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2019년.
이제 Ozi에겐 시간이 없다.
새로운 시즌은 시작되었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어떻게든 폼을 끌어올려도 한계가 있다.
하여 그는 올해 이후로는 은퇴를 고려해야만 하는 악조건 속에서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한 경기였다.
Ozi는 원딜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RK도 마찬가지였다. 승리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게임 시간 42분이 될 때까지 엎치락뒤치락.
용도 똑같이 나눠 먹고, 킬도 똑같고, 골드도 똑같은 상황에서.
이번에도 Plum이 Ozi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 기막힌 한 수로 판을 뒤엎어버렸다.
— GG—!
— TU!! 이걸 이렇게 끝내버립니까!!
— 진짜 말도 안 되는 판단. 완벽한 끝내기 텔레포트였어요!!”
그 강하다는 Freyja가 없었는데도, 결국 승리의 여신은 TU의 손을 들어주었다.
선수들과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며 답답한 기분을 털어내고. 감코진과 피드백도 빠르게 마쳤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려고 대기실을 떠나려던 그 순간. Ozi의 앞에 유성 매직과 스케치북을 든 장난꾸러기 여신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Ozi 선수. 혹시 사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저만치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덩치 큰 코치가 Freyja를 말린다. 안 그래도 오늘 TU에게 패배한 팀인데, 사인받는 건 무례 아니냐고 따지는 듯했다.
“야, 겨울아. 이건 매너가 아니지!”
“아 왜요?! 한창 연습하는 데 찾아가서 사인해달라고 하는 게 더 민폐거든요?”
항간에 그녀가 국제 대회 때마다 선수들 사인과 사진을 수집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루머가 아니라 진짜였던 모양이다.
Ozi는 선뜻 미소 지어 그녀를 부른다.
Freyja가 화색이 되어 달려오더니 스케치북을 내민다.
“{중국어 잘하시네요?}”
도는 소문이 하나 더 있다.
사인받을 선수 언어로 요청은 하는데, 그 뒤엔 말을 못 해서 번역기로 대화한다던가.
“{못함. 중국어. 입니다!}”
솔랭에서 Freyja와 맞붙어 본 지인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라인전이었다고 회고했다.
분명 눈앞의 소녀는 흔들리던 TU를 바로잡고 전성기의 절대 왕조로 재건하고 있는 위협적인 사람이지만.
경기장 밖에서 만나니 귀엽기 짝이 없다.
어떻게든 사인받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신인다웠다. 모두가 무서워하는 선수가 사인해달라고 조르는 것도 참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왜 하나같이 그녀의 사인 요청을 기뻐했는지. 그녀에게 사인 요청 받으면 유명한 선수로 인정받은 거라던 이야기가 왜 선수들 사이에 돌았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잘하시네요. 여기. 사진도 찍을래요?}”
문장을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유일하게 사진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소녀, Freyja.
“아 감사… 쎼쎼! 쎼쎼 맞나? Thank you!”
꿍한 표정이던 Ozi는 결국 웃고 말았다.
졌는데 기분이 좋다니. 참 별일이 다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