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빌 메이든-296화 (296/296)

〈 296화 〉 외전. 다행이야

* * *

몇 년 전인가.

노래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렴풋이 남은 기억이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떠올랐는지.

그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온종일 여름이 조잘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생각이 닿았달까.

‘얘가 좋아하는 게 맛있는 음식과 나 말곤 또 뭐가 있을까?’라고.

“코노? 갑자기?”

시간이 좀 많이 흐르긴 했지만, 약속은 약속.

지켜야 할 대상도 달라지긴 했지만, 기억하는 이가 있는 이상 그냥 넘길 순 없다.

“응. 가자.”

여름은 히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웬일이래. 겨울이 네가 먼저 코노 가자는 말을 다 하고. 전엔 가자고 그러면 온종일 꽁시랑꽁시—.”

“가자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으실까.”

“우부웁우부부부.”

여름이 얼굴에 이렇게 직접 손댄 건 처음이다.

항상 그녀가 나를 덮쳐오기만 했지, 먼저 댈 생각은 안 했으니까.

뭐랄까, 떠나간 울이 핑계로 여름이 몸을 만지작거리다니. 그거 좀 비겁하잖아.

“그래서 뭐 부르게?”

“안 정했어.”

“뭐? 아니 무슨 코노 가는데 부를 노래도 생각을 안 해뒀대.”

“네가 정해줘.”

“…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여름이.

육중한 가슴이 함께 흔들리며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또 또. 가슴만 보고 있다.”

“나한텐 없어서 신경 쓰여.”

“어머어머~ 부러운 거야? 괜찮아. 우리 겨울겨울은 이런 거 없어도 예쁘니까. 암. 음!”

“됐고, 불렀으면 하는 노래나 좀 알려줘 봐. 적어도 한 번은 들어야 부를 거 아냐.”

“한 번 듣고 바로 부를 수 있는 재능을 가졌으면서 왜 노래방 안 가는데?”

여자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거 적응 안 되어서.

…라고 말하기엔 벌써 여자로 산 지 몇 년이 지났네.

이제 이 핑계도 못 써먹겠다.

“남이 불러달라고 했을 때 생색 좀 내다가 딱 보여줘야 좀 더 극적이니까?”

“….”

여름이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코웃음 쳤다.

“하여간. 몇 년이나 리컨 계에서 주인공 노릇만 했으니 스타병 걸릴 만도 하네~.”

“말 다 했냐.”

“우리 겨울겨울은 스타스타병이네~.”

“야.”

“꺄하하.”

도망치는 겨울을 쫓으며 열심히 뛰었지만, 내 피지컬로도 이 여자의 체력은 당해낼 수가 없다.

정말이지.

예전 울이랑 똑 닮았다.

***

연습실 근처는 워낙 번화가라, 사람 없는 코노 찾는 게 더 힘들었다.

심지어 돌아다닐 때마다 날 알아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아 후퇴도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여름이가 어떻게든 날 끌고 다니긴 했는데, 그렇게 여섯 번만에 간신히 안식처를 찾았다.

“선곡해도 돼?”

“마음껏 골라….”

“겨울겨울 이거 벌써 녹초 됐네. 부를 수 있겠어?”

“게임 할 때만큼은 강철 체력이니까 걱정 마세요.”

“아하하하!”

코노 의자에 녹아내릴 듯 기대 있는 내 볼을 꼬집는 여름.

그녀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리모컨을 잡았다.

“진짜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오네.”

“그러니까 맘껏 골라. 이런 날 또 안 오니까.”

“네 맘껏 고르겠습니다욧. 자! 뭐부터 고를까….”

그러나 손에 리모컨을 쥐었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결정하지 못하고 화면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빙글.

내게 시선을 돌린 그녀가 리모컨을 건넸다.

“네가 골라.”

“…. 나보고 고르라고?”

“응. 첫 곡 못 고르겠어.”

“리스트 준비해온 거 아니야?”

“그중에 아무거나!”

리모컨을 무릎에 올려놓았더니, 이번엔 여름의 폰이 얼굴 앞에 들이 밀어진다.

그사이 여름이 터치를 잘못해서 화면이 홈으로 넘어갔다.

화면 속엔 그녀에게 포획당한 채 가슴에 눌려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내가 있었다.

언제였지 이거. 2019년 올스타전 때였나.

어째 그때 엄청 혼났던 기억밖에 안 난다.

멀티태스크 버튼을 눌러 메모로 돌아가서 목록을 보니, 가장 위에 익숙한 곡이 보인다.

— 다행이야

익숙한 네 글자를 보니 웃음부터 난다.

과거 울이와 했던 만담 때문일 것이다.

「생각났다.」

「뭐.」

「다행이야.」

「…? 뭐가 다행이야?」

「…….」

「왜?」

「아니. 다, 행, 이, 야.」

「그러니까 뭐가 다행이냐니깐?」

「아이씨. 좀. 노래 제목이니까 검색해봐! 나 쉬러 간다. 알았지? 다행이야!」

다행이야가 노래 제목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안다.

고백해달라는 뜻이었어.

근데, 고백 못 했지.

언젠가 우리는 헤어질 것 같았으니까.

‘지금도 딱히 친구 이상으로 진전되기엔… 좀 그렇지.’

여름은 나를 사랑한다.

가끔 친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끈적하게 내게 들러붙는다.

하지만, 그런데도.

절대 더 깊은 단계까진 뛰어들지 않는다.

그녀 나름의 방어기제일까, 아니면 과거의 우리는 묻고 지금의 우리로 살아가자는 부탁인 걸까.

여름이 여름으로 있어 주었으면 하기에 나는 물어볼 생각이 없고.

결국 답은 그녀만 안다.

“오오! 다행이야!”

여자 키로 올리고, 마이크를 손에 쥔다.

리모컨은 옆에 앉은 여름에게 건넸다.

몇 시간 전에 들었던 익숙한 간주가 흘러나온다.

어느새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여름이 양손을 맞잡은 채 상체를 가볍게 좌우로 흔든다.

“그대를 만나고….”

“우오오오오!”

“그대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어서….”

“우오오오오오와와!”

“아 좀. 시끄러워! 분위기 잡는데 진짜.”

“아니, 아니. 진짜 분위기 좋아서 소리 지르는 거야.”

“그런 건 저기 락페스티벌 같은 데 가서 해.”

“힝….”

시무룩하게 볼을 부풀린 여름이 외침 대신 작게 손뼉 치는 쪽으로 응원 방향을 선회했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 쉴 수 있어서….”

“진 겨 울!”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 땐 눈물 흘릴 수 있었어.”

다행이야.

“그래서 다행이야….”

“겨울 겨울!”

너라는 사람이 곁에 있었기에 나는 강했고.

너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대라는 세상에 항상 곁에 있어 줘서….”

“꺄아아아악!”

“….”

“왜? 싫어?”

“맘대로 해.”

“꺄아악! 진겨울! 진겨울! 진겨울!”

짧게 한숨 쉬지만, 솔직히 조금 고맙다.

만약 여름이 노래 들으면서 울기라도 했다면, 나도 못 버텼을 것 같으니까.

그래. 차라리 더 신나게 응원해.

더 즐겁게 따라불러.

“거친 바람 속에도—.”

“바람 속에도!”

“차가운 지붕 밑에도—!”

“지붕 밑에도오오!”

“홀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게.”

“워우워~.”

“지친 매일매일과, 고된 살아남기가—.”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아니라는걸~!”

감정은 고조되고, 배에 힘이 들어가고 목엔 핏대가 선다.

폐부의 숨이 거칠게 오가며 성대를 떨게 해 나의 감정을 노래에 담는다.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준,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덕이란 걸….”

마지막 소절.

여름은 노래를 따라부르는 대신.

“알긴 아네.”

“…?”

내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진 뒤 내 목덜미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야, 야! 마이크로 칠 뻔했잖아….”

“에이 내가 어련히 피했겠지.”

“네가 언제부터 부딪치는 거 신경 쓰면서 끌어안았어?!”

아직 2절이 남아서 다시 마이크를 쥐고 자세를 고쳐잡으려는데, 간주가 들리지 않았다.

여름이 취소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들을래.”

“뭐? 아직 다 안 끝났는데.”

“됐어. 이거면. 우리 신나는 노래 부르자. 분위기 처지잖아.”

“그럴 거면 왜 나보고 고르라 했는데?!”

“우리 겨울겨울 센스를 본거지~. 실망이야 실망.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데 그런 무드 다운되는 노래나 부르고.”

이게 진짜.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숨 쉬니 여름이 그새 다음 노래를 골랐다.

“자. 신나게 뛰어 볼까!”

“협소해서 뛰기가 힘들어요.”

“아 좀! 그냥 뛰어!”

“너 그러다 에어컨에 머리 박는—.”

쾅.

“악.”

와당탕.

에어컨과 진하게 키스한 여름이 그대로 의자 위에 넘어졌다.

“야, 괜찮아?”

“아야아아아아아.”

“내가 뭐랬어?! 공간 좁다니까.”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아파하는 건지 웃는 건지.

도무지 이 애가 왜 이러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 너무 즐거워.”

아무튼 즐거워하니, 그거면 된 걸까.

의자에 누운 여름의 이마를 살살 문질러주는 사이 준비된 다음 곡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 Love x3 ]

— Epic hi

“밤 열두 시. 술 취해. 지친 목소리~. 진겨울!”

“새벽 두시. 차갑게 꺼진 전화.”

“오예!”

인트로가 끝나자마자 신나는 드럼 엔 베이스가 흘러나온다.

“아무도, 내 맘을 모르죠! 멈출 수 없어! Love Love! 진겨울!”

“아파도. 계속 반복해요. 멈출 수 없어. Love Love.”

“아 좀 더 신나게 불러!”

“최대한 신나게 부르고 있거든?!”

랩 파트에 빠르게 가사에 색이 채워지는데, 우리는 실랑이하느라 바쁘다.

“어 큰일 났다. 나 이거 랩 할 줄 몰라.”

“그럼 왜 골랐는데.”

“겨울이 네가 해줄 줄 알았어.”

뜨악.

잠깐 놀라주는 척하고 바로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갔다.

이 노래는 부를 줄 알거든.

“… 있겠죠 사랑해본 적. 기념일 땜에 가난해본 적.”

“오와. 대박. 뭐야! 랩 파트 전부 겨울이 거!”

“잘하고도 미안해 말해본 적. 러브레터로 날 새본 적.”

“호!”

“가족 모임을 미뤄본 적, 아프지 말라 신께 빌어본 적.”

“예!”

신나서 폴짝폴짝 뛰지만, 여름의 점프력은 아까보다 줄었다.

또 에어컨에 부딪히기 싫어서.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지기 싫어서.

내 어깨를 꼭 붙든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너무 진해서.

“친굴 피해 본 적, 잃었던 적.”

모를 수가 없다.

“가는 뒷모습 지켜본 적.”

찡해지는 코끝에 힘을 바짝 주고서 여름과 다시 함께 뛰어오른다.

“멈출 수 없어, Love~ Love~ Love~.”

“미친 듯 좋아했는데 왜, 정말 잘해줬었는데 왜. 모든 걸 다 줬는데도 왜 you made me going crazy.”

운명의 잔혹함 앞에서 꾹꾹 참았던 울이를 알기에.

나도 감정을 숨긴 채 지금의 인연을 이어간다.

좋아한다.

많이.

여름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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