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1화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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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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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숫대야에 담긴 물에 비쳐 보이는 것은 짙은 검은색 수녀복을 걸친, 청발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는지, 가을철의 푸르른 하늘과도 같은 그 머리칼은 끝이 갈라진 채 이리저리 엉켜있었고, 피곤함에 찌들어 사람 하나쯤은 간단하게 담가버릴 것 같은 사나운 눈매는 긁힌 자국이 선명히 남아버린 진주처럼 소녀의 아름다움에 크나큰 흠집을 내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현실을 부정하는 말을 입에 담아보았지만, 그것조차 가혹한 현실을 다시금 일깨우는 경종이 될 뿐이었다.

'내 목소리가 왜 이래?'

목소리조차 평소에 듣던 굵은 목소리가 아니라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게다가 내 혀는 마치 미리 입력된 행동을 저절로 수행하는 자동인형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하려던 말을 낯선 말투로 변환해서 입 바깥으로 내뱉고 있었다.

“윽!”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있던 내 머릿속에 별안간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파고들었다.

“에일라 넬런…?”

그리고 나는 지독한 두통을 느끼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이 몸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에일라 넬런.

그녀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흔히 등장하는 악녀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단순무식하게 여자주인공에게 시비를 걸고 패악을 일삼는 일반적인 악녀와는 달리, 지능적이고 무시무시한 모략을 꾸며 여자주인공을 음습하게 괴롭혔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악녀의 최후는 언제나 비참한 법.

에일라의 괴롭힘에 고통받던 불행한 여자주인공을 보호하고자 나선 남자주인공들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에일라가 세운 음습한 책략의 성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여주인공을 괴롭혀온 흑막이 자신이라는 사실까지 모조리 까발려진 에일라는 재학하던 황립 아카데미에서 제명 처리되어 쫓겨나고, 본가인 넬런 가문에서도 가문의 평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강제로 외진 곳의 수녀원으로 출가시켜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에일라가 수녀원에 들어온 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고.’

두통과 함께 찾아왔던 에일라의 기억을 확인해보니 귀족 영애의 삶과는 거리가 먼, 노동과 기도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수녀원의 금욕적인 생활에 지쳐 스스로 자해를 선택한 에일라의 기억이 떠올랐다.

“으…. 따끔하네요.”

에일라가 자해했던 기억을 떠올린 탓일까, 붕대로 칭칭 동여맨 오른팔에서 찌릿찌릿한 고통이 올라와서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굳이 붕대를 풀어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이 자해한 흔적을 봐서 어디다 쓴다고.’

그런 생각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역시 오른팔을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 고통이 올라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펜을 잡아 글을 쓰는 것과 가벼운 물건을 드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다만, 도저히 오른팔을 멀쩡하게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저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에일라의 말투로 번역되어 나오는 말에 여전히 위화감을 느끼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하필이면 이미 다 몰락해서 말라 죽어가던 악녀의 몸에다 빙의라니. 너무하잖아!’

나를 뜬금없이 에일라의 몸에다 집어넣은 것이 어떤 존재인지는 몰라도 그 존재가 몹시 고약한 인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여러 인물과 적대치를 최대로 찍어놓고, 개인적으로 행동할 시간마저도 제한되는 수녀원 생활을 하는 몰락한 에일라의 몸에 나를 집어넣을 이유가 없었다.

‘최악이야. 차라리 도망갈까?’

나 역시 에일라와 마찬가지로 수녀원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기에,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수녀원을 벗어나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었다.

'아니야. 무작정 수녀원을 벗어나서 뭘 하겠다고.'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가진 재산도, 따르는 사람도 없이 가문에서 내쫓긴 영애를 환영할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망명도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법.

국경을 넘는 길에 도사리고 있을 무수한 위험들을 아직 성년도 안 된 소녀가 맨몸으로 돌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수녀원을 조용히 나와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일라를 잔뜩 벼르고 있는 이들이 에일라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

에일라는 영악하게도, 은밀하게 암약하며 자신을 향했어야 할 적의를 타인에게 떠넘기며 회피해왔다.

그러나 그녀의 모략이 모조라 까발려진 지금, 그녀는 그녀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문에서도 쫓겨나고,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에일라가 외부와 단절된 수녀원에서 빠져나온다?

'붙잡혀서 산 채로 찢겨 죽어도 이상할 게 없지.'

당장 에일라의 머리 위로 '정의의 철퇴'라는 이름을 단 '복수의 칼날'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수녀원 안에 있으면 교단이라는 방패가 있으니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는 못하겠지만….’

이 키니아 제국에서 교단이 황권의 우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교단은 뿌리 깊은 신앙심을 지닌 수많은 신도를 동원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교단이라는 조직은 설령 제국의 황제라고 한들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벌집과도 같은 조직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결국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수녀원이나 적어도 교단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했다.

아마 머리가 제법 좋았던 에일라도 이 사실을 깨닫고, 도저히 방법이 없자 자해를 시도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대로 끝나지는 않겠어요.”

이대로 내가 에일라의 몸으로 수도 생활을 계속 이어나간다면 꼼짝없이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겠다만, 지금 나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수녀원 생활에 적응부터 한다. 그러려면….’

“에일라? 세상에! 신이시여!”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각오를 다지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던 도중, 노크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에일라의 또래로 보이는 금발의 소녀가 들어왔다.

물론 그녀 역시 같은 수녀원 소속의 수녀인지, 에일라처럼 새까만 수녀복 차림이었다.

“…세이사. 노크.”

그녀가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문득 가슴을 옥죄어오는 불쾌함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뭐야? 이 입은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해도 멋대로 움직이는 거였어?

“아, 미안해. 에일라! 여전히 쓰러져 있는 줄 알았거든.”

멋대로 움직인 에일라의 입 때문에 혼란에 빠진 나를 향해 다가오며 세이사는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제 보니 세이사는 수건과 붕대, 약재가 담긴 병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세이사 밀턴. 에일라의 기억에 따르면 거의 유일하게 이 수녀원에서 에일라를 챙겨주는 사람인데….’

세이사 밀턴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에일라의 기억을 뒤져보니, 내 머릿속에 그녀에 대한 에일라의 기억이 떠올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처음 만난 이래로 매번 차갑게 대하며 그녀를 밀어내려는 에일라를 곁에서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진정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정말로 착한 사람이었다.

아마 내가 에일라의 모습을 확인했던 세숫대야에 담긴 물도 세이사가 준비해 두었던 것이리라.

자해로 피를 많이 쏟은 탓에 정신을 잃은 에일라를 간호할 사람이라면 이 수녀원 안에서 그녀 말고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괜찮아요. 상처가 가끔 따끔거리기는 하지만. 그러니 얼른 돌아가요.”

가져왔던 바구니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몸 상태를 걱정해주는 세이사에게 따뜻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에일라의 입은 여전히 그녀에게 차갑게 철벽을 치고 있었다.

아오. 이 망할 주둥아리 같으니.

“하하…. 조금 있으면 아침기도 시간이니까. 상처가 괜찮은지만 조금 살펴보고 갈게.”

하지만 세이사는 에일라의 거리를 두는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 오른팔에 감긴 붕대를 풀어냈다.

‘…흉터가 대체 몇 개야?’

붕대가 풀리면서 드러난 내 오른팔의 상처는 생각보다 심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손목을 그은 듯 길게 그어진 자상은 물론이고, 손톱으로 상처를 일부러 헤집어놓기라도 했는지 손톱자국으로 추정되는 작은 생채기로 가득한 에일라의 오른팔은 너무나도 보기에 흉했다.

“다행이네. 그래도 많이 아문 것 같아.”

에일라가 자해한 흔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세이사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상처를 살피고는 세숫대야에 담긴 깨끗한 물을 수건에 적셔서 상처가 있는 부위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큭.”

상처에 차가운 물이 닿으며 따끔한 감각이 올라왔지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에일라답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내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고통을 참아내는 작은 신음 말고는 없었다.

“미안해. 내 신성력이 아직 부족해서 치유마법을 쓸 수가 없거든.”

세이사는 낮게 신음을 흘리는 나를 미안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져온 약병에 담긴 연고를 덜어내 오른팔의 상처 위에 고르게 펴 바르기 시작했다.

“…뭘 미안해하고 있는 건가요.”

나를 향해 무한한 호의를 보여주는 세이사를 향해 오히려 내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에일라의 입은 그런 말조차도 핀잔으로 바꾸어 버렸다.

“…….”

‘아, 역시 이건 마음이 상했으려나.’

세이사가 에일라의 핀잔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붕대를 감아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세이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어요! 이 망할 입이 멋대로!’

제멋대로 날뛰는 에일라의 입을 원망하며 나는 미안함과 찔리는 양심에 차마 세이사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세이사가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붕대를 새로 감아주고, 편히 쉬고 있으라는 인사까지 하며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망했어! 그나마 에일라를 사람처럼 대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이래서야 멀쩡히 살아남을 수나 있겠냐고!’

제멋대로인 입과는 다르게 내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에일라의 몸으로 애꿎은 베개를 퍽퍽 두들기자, 밀짚으로 속을 채워 넣은 베개에서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콜록!”

…앞으로는 베개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겠다.

*

“에일라가 변했어.”

세이사는 에일라의 방을 다시 돌아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이사가 에일라의 상처를 봐줄 때면 언제나 에일라는 세이사를 없는 존재처럼 취급하며 세이사가 방을 나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일절 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에일라가, 여전히 차가운 말투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지만 세이사의 말과 행동에 무언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조금이나마 세이사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증거였다.

“감사드립니다. 길더스텐 님. 길더스텐 님의 인도로 부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에일라 자매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세이사는 아침기도 시간에 키니아 제국에서 주신으로 받드는 신, 길더스텐의 이름을 되뇌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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