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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2화 (2/80)

〈 2화 〉 수녀원 적응

* * *

“역시 기도에 다시 참석해야겠어요.”

세이사가 돌아가고, 방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바로 하루에 세 번 있는 기도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

비록 에일라의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에일라의 기억 속에서 현실의 기독교와 비슷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키니아 제국의 국교를 떠올려보면, 자해를 저지른 에일라의 행동은 크나큰 죄를 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현실의 기독교에서도 지옥으로 직행하는 최악의 죄였으니 말이다.

‘으으, 수녀원장을 찾아가서 고해라도 해야 하나?’

부모님이 성당에 다니셨기에 대략적인 지식이나마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죄를 범한 몸으로는 미사에 참석할 수 없으니,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아야 미사에 참석할 수 있다고 했었던가?

‘에일라의 기억도 별로 도움이 되진 않네.’

아무리 두 종교가 비슷하다지만 완벽하게 일치할 리가 없고, 혹시나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에일라의 기억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에일라는 수녀원 생활을 정말로 싫어했는지 교리에 대한 강론이나 기도 시간에 단 한 번도 성실하게 임한 적이 없었기에 그다지 쓸 만한 사실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나마 수녀원의 구조는 잘 알고 있는 게 다행이네. 아마 에일라가 도망을 계획하면서 익혀둔 것 같지만.’

에일라의 기억을 더듬어 수녀원장실의 위치를 알아내는 성과가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생각보다 머네요.”

막상 방을 나서서 수녀원장실로 향하자니 싸늘한 겨울바람이 불어와 당장이라도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에일라잖아? 어디로 가는 거지?”

“담이라도 넘으려는 게 아닐까?”

“흥. 나도 손목이나 그을까 봐. 벌써 일주일씩이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며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내 모습을 발견한 다른 수습 수녀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에일라를 경계하는 동시에 미약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에일라에 대한 수녀원 내의 평판이 어지간히도 나쁘구나. 하긴 그 난리를 피웠으니 좋은 소리를 듣기는 글렀지. 세이사가 특이한 거고.’

제아무리 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기로 맹세하는 것이 수도자의 삶이라지만, 수도자 역시 인간이다.

좋고 싫고의 감정 정도야 있는 것이 당연하다.

더군다나 이 수녀원은 에일라처럼 무언가 문제를 일으켜서 가문에서 쫓겨나다시피 출가하는 영애들을 주로 받아들이는 곳.

수도자들의 자세가 해이한 것 정도야 충분히 납득이 가능했다.

‘제발 멋대로 급발진하지나 마라. 입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에일라의 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거의 대놓고 뒷담화를 하는 이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에일라의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이크, 뭔가 말하려고 입이 움직였어!’

다시금 에일라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수녀원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다행히도 뒷담화를 하던 수습 수녀들과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니, 에일라의 입도 포기했는지 제멋대로 움직이려던 기색은 사라졌다.

“…괜찮은 걸까요.”

이대로 수녀원장을 만난다고 해도 제대로 고해를 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오히려 싸움을 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수녀원장실이 가까워질수록 자꾸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졌다.

“에일라 자매.”

수녀원장실을 눈앞에 두고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로 제 방까지 찾아왔나요?”

마치 보름달처럼 밝고 인자한 미소를 지은 수녀원장, 리피샤 브림블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어떤 악인이라도 교화하여 올바른 길로 되돌려 놓을 것만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리피샤 브림블. 내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

아까도 설명했던 내용이지만, 이 수녀원은 가문에서 내쫓긴 영애들을 수녀로 받아들이는 곳이다.

당연히 신앙심이 깊지도 않고, 계율을 지키려는 의식도 그다지 없다.

하지만 그런 수녀원이 멀쩡하게 운영되는 것은 순전히 수녀원장인 그녀의 유능함 덕분이었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칼같이 단호해질 수 있는 사람.

리피샤 브림블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일라는 그런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제대로 찍혔지.’

수녀원의 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며 온갖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던 에일라를 리피샤 수녀원장이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다른 수녀들을 선동하여 단체로 기도를 파업하지 않나, 수녀원의 담을 넘어가 근처에 있는 수녀원 산하의 농가에 피해를 주질 않나, 자해소동을 일으키질 않나….

오히려 그런 에일라를 수녀원에서 내쫓지 않은 리피샤 수녀원장이야말로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상담받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에일라가 두려워하던 인물의 앞에 선 탓일까, 극도로 타인을 깔보고 비웃는 말투를 내뱉는 에일라의 막돼먹은 입조차 급속하게 공손해졌다.

…강약약강이었구나.

‘어라? 그러면 내가 에일라의 입보다 약하다는 건가?’

“그런가요? 그럼 어서 안으로 들도록 하죠.”

잠깐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지만, 여전히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로 들어오라 말하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크, 정신 차리자. 에일라의 기억 속에서도 리피샤 수녀원장은 결코 에일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래서 무엇을 상담받고 싶다는 건가요?”

예상했던 대로, 수녀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리피샤 수녀원장의 목소리는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그녀에게 있어 에일라는 시도 때도 없이 수녀원에 사건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였으니 호의적인 감정은 없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말을 막상 듣고 있자니 저절로 기가 죽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면 진짜 끝이라고!’

나는 급속도로 굳어져 가는 몸과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두 손을 모아 뺨을 연신 두들겼다.

“새로운 자해 방법인가요? 이미 에일라 자매는 미사와 노동에서 열외 시키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리피샤 수녀원장의 인자하게 웃는 얼굴은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정작 말하는 내용은 몹시 냉소적이고 차가운 독설이었다.

‘이미 네가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말을 에둘러 말하며 힐난하는 그녀의 말에 그대로 생각이 멎어버리려 했지만, 나는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을 떠올리는 것으로 간신히 끊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뗐다.

“…다시 기도에 참석하려고 합니다.”

“어째서죠? 에일라 자매는 기도 시간마다 다른 핑계를 대며 빠지지 않았던가요? 에일라 자매가 다른 자매들을 선동해서 기도를 파업했을 때는 정말이지 놀랐답니다.”

억울하다.

사고를 친 것은 에일라인데 어째서 내가 뒷수습을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면서 다 때려치워 버릴까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그래서야 평생 수녀원에서 겉돌다가 외롭게 죽는 인생밖에 남지 않는다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전혀 없는 지금 상황에서 나는 좋든 싫든 에일라의 몸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생을 수녀원에서 일과 기도만 반복하며 사는 것은 단연코 싫다.

“…꿈속에서 성 베르기스님을 뵈었습니다.”

“흐음, 계속해 보세요.”

리피샤 수녀원장의 시선은 여전히 에일라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를 터무니없다며 아예 거부하지는 않았다.

“성 베르기스님은 길더스텐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기 전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에일라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머리에 떠올리며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실제로 키니아 제국에서 성 베르기스는 유명한 성인으로, 종교에 귀의하기 전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나 종교에 귀의한 후에는 자신이 악행을 저질렀던 이들을 직접 찾아가 사죄하고, 수많은 선행을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티롤프라는 놈이 에일라를 까면서 한 말이라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이것만큼 적당한 핑계도 없지.’

에일라를 몰락시키는 것에 일조한 사람 중 하나인 티롤프는 성기사단 출신이어서 그런지 종교에 대해 밝았고, 그래서인지 에일라를 욕할 때도 종교적인 사실을 인용하곤 했다.

자신의 악행을 참회하고 수많은 이에게 선행을 베푼 성 베르기스님이 돌아오더라도 고개를 가로저을 악녀.

그것이 티롤프가 에일라를 향해 입버릇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더군다나 성기사단 소속이라는 연관 고리를 이용해 금남의 구역인 수녀원까지 찾아와 에일라를 면전에서 비웃은 것도 이 녀석이다.

‘이 세계가 에일라로부터 괴롭힘을 받던 아가씨가 주인공인 소설 속 세계였다면 사이다 담당이었던 녀석이었겠네.’

뜬금없이 든 생각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려고 했지만, 여전히 내가 리피샤 수녀원장 앞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비록 그 죄를 모두 용서받지 못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꿈에서 나타난 성 베르기스님 또한 저에게 그럴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에일라 자매.”

리피샤 수녀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않았다.

‘비록 어린애 수준의 책략에 불과했다지만, 에일라는 분명 머리가 좋았어. 하지만 그런 에일라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언가 함정이 있을지 몰라.’

“자, 그럼 에일라 자매가 진정으로 성 베르기스님을 뵈었다면 그분이 남긴 유명한 말 또한 알고 있겠지요?”

‘역시. 곧바로 믿지는 않는구나.’

리피샤 수녀원장은 여전히 내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교리 강론에 결석을 밥 먹듯이 하고, 매일 있는 기도와 노동에도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는 에일라였다면 대답할 수 없을 질문.

리피샤 수녀원장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지에 따라 내 말을 믿을 수 있는지를 판단할 요량인 듯했다.

“언제나 성실하고, 남을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길더스텐님은 언제나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계시며,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행한 행동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구절을 강조하신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에일라지만 에일라가 아니다.

비록 이 세계의 종교 교리를 배운 적은 없지만, 에일라의 기억을 에일라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마치 책을 읽듯이 살펴볼 수 있는 나는 티롤프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성 베르기스에 대한 기억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고마워! 티롤프! 나중에 내 면전에서 쌍욕을 박아도 웃으면서 넘겨줄게!

“…정답입니다. 에일라 자매의 뜻이 정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에일라 자매를 믿어보도록 하죠. 오늘 저녁에 고해소로 나오도록 하세요. 고해를 마치면 다음 날 아침기도부터 나오면 됩니다.”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이 아주 잠시 리피샤 수녀원장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아마 내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예. 감사합니다. 리피샤 수녀원장님.”

“…아직 완전히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니 자중하도록 하세요.”

여전히 가시가 잔뜩 돋친 말을 내뱉는 리피샤 수녀원장이였지만,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는 안도감에 빠져있던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

“에일라 자매가 변했군요.”

리피샤는 책상 위에 놓인 성서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여태껏 수녀원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봐왔다.

가문에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실어증에 걸린 영애, 세상의 모든 것이 증오스럽다는 듯이 주변의 모든 것에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영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말라 죽어가는 고목처럼 아무런 의욕도 없는 영애….

에일라 자매는 굳이 평가하자면 위에서 언급했던 영애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벌이는 일의 크기가 다른 영애들의 두세 배는 뛰어넘는 수준이었다는 것 정도.

“에일라 자매가 스스로 기도에 다시 참여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은 무언가 계기가 있다는 거겠죠.”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을 잃은 듯 허송세월하던 영애가 무슨 계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수녀원을 관리하는 리피샤의 입장에서, 그것은 분명 환영할만한 변화였다.

“에일라 자매가 그 뛰어난 재능을 길더스텐님을 위해 바친다면 길더스텐님 역시 기뻐하시겠죠.”

인재는 언제나 귀한 법.

더군다나, 리피샤 수녀원장은 그런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교단으로부터 인정받아 일부러 가문에서 버림받은 귀족 영애들을 수녀로 받아들이는 수녀원의 원장으로 파견되기를 자청한 인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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