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수녀원 적응 (3)
* * *
“우욱!”
귀족의 품위에 어긋나는 말은 가급적 꺼내지 않으려 드는 에일라의 입조차도 축사에서 풍겨 나오는 악취에는 견디지 못했는지, 절로 입에서 헛구역질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의미가 없잖아.’
당장이라도 코를 막고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지독한 악취였다.
"자, 그럼 축사 안의 가축들은 모두 바깥으로 보내 풀을 뜯게 할 테니, 자매님들은 그동안 축사 안에 쌓인 오물들을 치워주세요."
축사를 담당하는 레이첼 버튼 수녀님의 지시대로, 축사 청소를 위한 넉가래와 갈퀴를 손에 쥐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침착하자. 이것도 리피샤 수녀원장의 시험이겠지.’
수녀원의 규모가 제법 큰 것에서 예상할 수 있듯, 수녀원에 딸린 축사 역시 상당한 규모였다.
수많은 수녀원 식구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니 당연히 이 정도의 규모가 되는 것이 맞겠지만, 막상 그 축사를 청소해야 하는 입장이 되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이면 에일라랑 같이 일해야 한담."
"그러게 말이야. 또 팔이 아프다면서 중간에 빠지려고 하겠지?"
게다가 나를 향해 불만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는 다른 수습 수녀들까지. 절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철퍽, 철퍽
어차피 한숨만 푹푹 쉬고 있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나는 손에 쥔 넉가래로 축사 바닥에 쌓인 가축들의 배설물을 축사 한구석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으욱."
염소나 소, 돼지 등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를 견뎌내기 위해 복면을 뒤집어쓴 보람도 없이 지독한 냄새는 복면을 뚫고 들어왔고, 나는 연신 헛구역질을 참아가며 축사 바닥에 깔린 배설물을 구석으로 몰아넣어 두엄더미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오른팔의 상처가 시큰거렸지만, 에일라가 여태까지 쌓아온 나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저 에일라가 웬일이래?"
"수녀원장님에게 크게 한 소리라도 들은 모양이지. 이번엔 며칠이나 갈까?"
묵묵히 작업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귓가를 계속해서 간지럽히는 험담이 몹시 거슬렸지만, 지금 내가 저들의 험담에 반응해봤자 나만 손해였다.
이 냄새나는 축사 청소가 늦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는 에일라에 대한 악평만 늘어날 뿐이니까.
─사각사각
그렇게 축사 바닥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던 배설물을 치우는 작업을 끝내고, 이번에는 갈퀴를 잡아 축사 바닥에 흩어진 가축들이 먹다 흘린 풀 조각이나 밀짚 등을 쓸어모았다.
축사의 흙바닥을 고르는 갈퀴 소리가 칠판을 긁어대는 소리처럼 들려서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지만, 옆에서 끊임없이 에일라를 씹어대는 수습 수녀들의 수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야, 에일라."
"네. 무슨 일인가요?"
그러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옆에서 일부러 들으라고 험담을 마구 쏟아내고 있음에도 묵묵히 작업만 하는 내 모습에 심통이 났는지, 한 수습 수녀가 이번에는 아예 직접 말을 걸어왔다.
'이름은 티아 이글라스…인가. 에일라의 꼬드김에 넘어가 함께 기도를 파업하고 같이 징계를 받은 이후 에일라와 철천지원수가 된 사이고.'
에일라의 기억을 살펴보는 것으로 내게 말을 건 수녀의 이름과 에일라와의 관계를 훑어본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또다시 에일라 넬런의 업보가 내게 시련을 가져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뭐? 무슨 일이냐고? 웃겨 진짜. 네가 저지른 일이 많아서 기억도 못 하나 봐?"
한껏 빈정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티아.
아무래도 좋게 말로 넘어갈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글쎄요. 우리가 언제 봤던 사이였던가요? 할 이야기가 있다면 일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하시죠."
처음으로 나와 에일라의 의견이 일치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사고가 벌어지지 않도록 티아를 무시하는 것이었고, 에일라가 선택한 것은 이 귀찮은 부나방 같은 존재를 무시하고 이 냄새나고 힘든 일을 빨리 끝내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아무튼 티아 이글라스를 무시한다는 목적만큼은 동일했다.
"뭐라고? 언제 봤던 사이냐고?"
하지만 티아 이글라스의 에일라에 대한 원한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너 때문에 사흘을 깜깜한 방에 갇혀 있었다고! 그래놓고선 사과도 한마디 없고! 너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대체 몇 명인데!"
에일라의 기억에서 에일라는 다른 수습 수녀들을 선동해 기도 파업 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 꼬박 일주일 동안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비좁은 독방에 갇히는 징계를 받았었는데, 아마 파업에 동조한 티아 역시 비슷한 징계를 받았을 테니 에일라를 싫어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네요. 설령 제가 당신을 선동했다고 한들, 그 말에 넘어가 행동을 저지른 것은 자매님이니 응당 자매님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에일라의 선동에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파업에 동참한 것은 티아 자신의 선택이 아닌가?
오히려 인제 와서 에일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사과를 종용하는 티아의 행동은 너무나도 추했다.
두 번째로 나와 에일라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곤란한데.'
그러나 나는 순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단순히 그것을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지금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리를 피한다면 또 에일라가 농땡이를 피운다는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상대방을 도발하는 에일라의 입을 가만히 둔다면 싸움이 붙을 것이 명확한 상황.
도저히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진퇴양난이었다.
"이, 이익!"
아니나 다를까, 부정할 수 없는 정론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분통을 터뜨리는 티아.
"네가 아직도 넬런 가의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 마! 네까짓 년은 이제 별것도 아닌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논점에서 벗어난 주제를 가져와서 에일라를 비난하는 것이, 영락없이 팩트로 얻어맞은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요. 티아."
그리고 망설임 없이 '티아의 분노'라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댕겨버리는 에일라의 도발.
아, 이 망할 놈의 입이 또 멋대로 저질러 버렸네.
─짜악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티아에게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는 이미 옆에 모아두었던 두엄더미 위로 에일라의 몸이 쓰러지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다 나은 상태라지만, 그래도 피를 잔뜩 쏟고 쓰러졌던 환자의 몸.
그런 에일라의 몸에 있어서 한 시간여에 걸친 축사 청소는 과중한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고작 따귀 한 대를 맞았다고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다니.
─철퍽
불쾌한 효과음과 함께 코를 찌르는 악취가 느껴졌다.
그나마 냄새를 막기 위해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덕에, 두엄더미에 직접 얼굴을 처박는다는 불상사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
풍겨오는 악취에 표정이 절로 찡그려졌다.
고개를 들어 티아를 바라보니, 에일라의 살기 어린 눈빛에 놀랐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레이첼 수녀님. 넘어져서 옷이 엉망이 되었는데, 잠시 몸을 씻고 와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티아 쪽을 완전히 무시한채, 축사 바깥쪽에서 수녀원이 기르는 가축들을 돌보고 있던 레이첼 수녀님을 찾아가 질문했다.
"그러도록 하세요. 아, 오른팔의 붕대도 다시 감아야 할 테니 가는 김에 병실에도 들렀다 오도록 하세요. 그보다 다른 자매 중에 에일라 자매처럼 넘어진 사람은 없나요?"
가축의 배설물로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짓는 레이첼 수녀님.
아마 에일라가 이 꼴이 되었다면 그 당사자는 이보다도 심한 꼴을 당했으리라고 넘겨짚는 모양이었다.
고작 하루 이틀만에 에일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리가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였다.
"감사합니다. 레이첼 수녀님. 그리고 이건 제 실수로 넘어진 것에 불과하니, 다른 자매님들은 모두 멀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몸을 씻고 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나는 천천히 축사 근처의 강가로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철의 차가운 강물로 몸을 씻어내고 있자니, 문득 몰려오는 서러움에 세이사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
"세이사 자매. 붕대는 이쪽에 채워 넣어 주세요. 그리고 저 약재는…."
"네! 알겠습니다!"
수녀원 한편에 마련된 병실의 약재 창고.
세이사는 병실 담당, 라미나 로하스 수녀의 지시대로 부지런히 약재와 붕대 등의 의료도구를 옮기고 있었다.
길더스텐님이 인류에게 내린 다섯 기적의 하나인 '치유의 기적'을 행하기 위한 물건인 만큼, 세이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꼼꼼하게 의료도구의 수량과 위치를 확인해가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에일라 자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하지만 그렇게 일에 몰두하던 세이사의 집중력도 라미나 수녀의 목소리에 섞여 있던 '에일라'라는 단어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방금 라미나 수녀님이 에일라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세이사가 약재 선반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목소리가 들린 곳을 내다보자,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라미나 수녀 앞에 에일라가 서 있었다.
"에일라?"
에일라가 걸친 수도복에서는 물방울이 연신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추위 탓인지 에일라는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게다가 에일라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에일라의 뺨에는 새빨간 손자국까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에일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것 아니에요. 일하다 실수로 넘어졌을 뿐이니까요."
그 처참한 모습에 화들짝 놀란 세이사가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에일라는 고집스럽게도 별것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일을 하다가 도대체 어떻게 넘어져야 뺨에 손자국이 남는 건데?!"
에일라의 그 고집스런 태도에 세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벌컥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아…."
세이사의 말에 그제야 낭패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는 에일라.
세이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성큼성큼 에일라에게 다가가 에일라의 왼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당장 몸부터 녹이자."
"아니요,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
"지금 그게 중요해?"
"……."
드물게 정색하는 세이사의 모습에 우물쭈물하던 에일라는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라미나 수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민폐를 끼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라미나 수녀님. 오른팔의 붕대가 더러워져서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하는데, 병실을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항상 웃는 얼굴이던 세이사가 정색하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라미나 수녀의 얼굴이, 이번에는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에일라의 모습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저히 사고를 일으킨 후에 수습 수녀의 계도권을 가진 정식 수녀들을 피해다니던 에일라가 보일 행동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그러도록 하세요."
라미나 수녀가 그 충격에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일라는 비로소 세이사가 잡아끄는 손길에 자신을 맡겼다.
"길더스텐님 맙소사. 제가 대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두 수습 수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라미나 수녀는 제정신을 되찾고 이것이 자신의 꿈이 아닌가 의심하며 자신의 손등을 꼬집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