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누군가 오른뺨을 치거든
* * *
"에일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섭다.
항상 방긋방긋 웃고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정색하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일변한다고 했던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는 세이사의 모습에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제가 실수해서 이렇게 되었을 뿐이에요. 세이사와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에일라와 티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에일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에일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사실을 숨기고, 세이사를 밀어내는 말이었다.
"…다른 자매와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지만 세이사는 그런 대답만으로도 대략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사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항상 에일라의 옆에 붙어있던 세이사니, 에일라가 수녀원 내에서 받아온 경멸의 시선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해왔을 테니까.
"…세이사, 이건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할 시련이에요.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기에 세이사가 괜한 걱정을 품지 않도록 안심시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원망스러운 에일라의 입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니까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이미 나는 각오를 다졌다.
한번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 굳어지면 그 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 법이고, 에일라는 그 첫인상을 완전히 망친 케이스다.
그만큼 더 많이 노력해야 이 최악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응, 알고 있어. 길더스텐님의 가르침에는 누군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내어주라는 가르침이 있었으니까. 힘내!"
'글쎄, 이번 사건은 에일라가 저지른 일에 원인이 있으니 먼저 오른뺨을 친 건 오히려 에일라쪽 같은데.'
내가 나름대로 나를 응원하려는 세이사의 말에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사이, 어느새 세이사의 표정도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됐으니까 붕대나 새로 갈아주세요. 붕대가 더러워지면 상처가 덧나니까요."
여전히 퉁명스러운 에일라의 말투.
그러나 세이사는 더욱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오른팔의 붕대를 새로 감아주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큰일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성녀 후보는커녕, 에일라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시도만 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갈 판이야.'
세이사가 새로 붕대를 감아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에일라의 무너진 평판을 다시 쌓는 것은 영 요원해 보이고, 무언가 두각을 드러낼 만한 부분도 딱히 생각나질 않았다.
차라리 내가 신학생이어서 이 세계의 종교와 유사한 기독교의 신학지식을 갖췄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밖에 없으니 그쪽으로 두각을 드러내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내가 아는 지식이라고 해봐야 별 볼 일 없는 수준이고.'
이 세계에서 활용하기엔, 평범한 현대의 회사원이었던 내 지식의 깊이는 너무나도 얕았다.
툭 까놓고 말해, 이 세계에서 컴퓨터를 만지고, 엑셀로 문서를 작성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니, 잠깐만. 문서를 작성해?'
순간 내 머릿속을 관통하는 영감이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그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회사생활 하면서 느는 것은 엑셀 실력과 다른 사람 비위 맞추는 눈치밖에 없다는 농담이 있다지만, 본질적으로 회사든 교단이든 조직이라는 것은 문서로 돌아가는 법이다.
규모가 작다면 관습에 의존한 야매 행정으로 돌아가기 십상이라지만, 교단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인 키니아 제국의 국교를 관장하고 있다.
당연히 교단의 휘하에는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존재하며, 이들을 물리적으로 가까이 불러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니, 중요한 일들은 문서를 작성하여 내려보내는 것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에일라의 기억도 있으니 문서를 보는데 애로사항도 없지.'
다행히 나는 에일라의 기억을 흡수한 덕에 키니아 제국의 문자를 쓰고 읽는 것에 불편함도 없었다.
요컨대, 내가 수녀원의 문서작업을 맡는다면 리피샤 수녀원장의 눈에 좋은 의미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저기, 에일라?"
"…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붕대를 다 감은 세이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좋은 생각에 너무 골몰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이에요. 몸이 아파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럼 이만."
밀려오는 민망함에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세이사는 그런 내게 그저 환한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응. 나도 알아. 하지만 에일라는 아직 환자인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해. 열심히 하려는 것도 좋지만, 에일라의 몸이 우선이야."
"……."
…이렇게 선(?)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만 같은 세이사가 어째서 아직도 수습 수녀에 머물러있는 것인가에 깊은 의문을 품으며, 나는 너무나도 눈부신 후광을 발하는 세이사를 피해 도망치듯 병실을 벗어났다.
에일라의 입이 세이사를 상처입히는 말을 더는 내뱉지 못하게 하려는, 내 나름의 배려였다.
*
"……."
─사각사각
수녀원의 일과에 반드시 포함되는 경전 필사 시간.
정적이 흐르는 독서실 안은 수습 수녀들이 종이 위로 부지런히 깃펜을 놀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만년필이라도 몇 번 써 본 경험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종이를 몇 장이나 찢어먹었을지도 모르겠어.'
나 역시 다른 수습 수녀들처럼 깃펜을 부지런히 놀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에일라의 기억에서 에일라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깃펜을 사용했지만, 지금 몸의 통제권을 가진 나는 깃펜이라는 필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영 어색했기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연필이나 볼펜 등의 필기구에 익숙한 사람이 펜촉이 날카로운 만년필이나 펜 종류를 처음 사용하는 경우, 필압을 너무 강하게 주는 바람에 날카로운 펜촉에 종이가 찢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만약 내가 만년필로 서명하는 연습을 몇 번 해본 적이 없었더라면, 경전을 필사하면서 아까운 종이를 몇 장이니 찢어먹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절로 서늘해졌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기엔 에일라가 경전 필사를 하기 싫어서 고의로 게으름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경전의 내용이 성경과 너무 비슷해. 이 세계는 대체 어떻게 된 세계인 거야?'
경전 필사를 계속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경전에 담긴 내용은 현대 지구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유사한 내용이었다.
'뭐, 기독교는 유일신인 하느님을 모시는 데 반해, 여기는 '길더스텐'이라는 열두 주신 중의 하나를 모신다는 점이 차이점이지만.'
어떻게 보면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나 소설 속의 설정 같았다.
'뭐, 내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지. 그러고 보니 성녀라는 직위도 좀 독특하긴 하더라.'
현대 지구의 기독교에서 여성의 성직 수행을 제한하지 않는 성공회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여성 성직자가 주교 이상의 고위직을 차지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 키니아 제국에서 성녀라는 직위는 교단에서 대주교급의 지위를 가지는 동시에, 무려 차기 황제를 선출하는 투표에 투표권을 지닌 일곱 선제후 중의 하나로 대우받는다.
굳이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각료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장관 정도의 지위는 되지 않을까?
'그만큼 되기도 어렵지. 뭐, 내가 노리는 건 어디까지나 운신의 자유가 보장되는 '성녀 후보'까지니까 상관없나.'
굳이 성녀가 되겠다는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수녀로서 평생을 수도원에 갇혀 지내는 처지를 벗어나서 앞으로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으로 족하다.
…바로 옆의 세이사가 무척이나 신실한 신자인 것에 비해서 사실상 신앙심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 처지를 비교하면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아."
생각에 잠긴 채 필사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깃펜이 머금었던 잉크가 다 떨어져 있었다.
"…?"
다시 잉크병에 깃펜을 찍어 필사를 이어나가려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티아 이글라스?'
어째선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의 티아 이글라스가 건너편 필경대에서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슬쩍 시선을 보내니 화들짝 놀라며 필경대에 고개를 처박는 것을 보아,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불안함과 초조함, 경계심이 분명했다.
'쟤는 왜 또 저런데. 그 성격 더러운 에일라가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아서 저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자신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 지레 겁을 먹고 저렇게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세이사의 말이 맞았네.'
굳이 처절한 복수를 할 것도 없었다.
티아는 그동안 에일라가 쌓아놓은 악명이라는 선입견에 휘둘려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조금만 더 흔들어볼까.'
에일라의 몸으로 사고를 쳐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기에 복수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대로 당하기만 하는 호구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나를 아무런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싫어하는 이유를 하나쯤은 만들어 주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하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에일라의 입이 어떤 폭탄 발언을 뻥뻥 터뜨릴지 모르니까.
'하지만 글이라면 어떨까.'
글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한다.
같은 문장을 보더라도 그 맥락이나 보는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으니까.
'우선은…. 사이를 갈라놓을 필요가 있겠어.'
티아 이글라스와 같이 에일라를 찾아왔던 수습 수녀들.
우선은 그녀들과 티아 이글라스의 사이부터 떨어뜨려 놓기로 했다.
'어차피 모래알 같은 단합력이야.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
에일라가 주도했던 수습 수녀들의 기도 파업이 왜 요구사항을 단 하나도 관철하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졌겠는가.
리피샤 수녀원장의 대응이 워낙 치밀했던 탓도 있지만, 가문에서 귀여움만 받으며 자라와서 자존심만 높았던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대부분인 수습 수녀들의 단합력이 고작 그 정도였던 탓이 컸다.
그런 콩가루 같은 사이에 한 번 의심의 싹이 뿌리를 내린다면 그들의 사이는 유리가 깨어지듯 산산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들어 하나씩 아군으로 만들어야지. 이대로 에일라의 평판이 바뀌길 가만히 기다렸다가는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어.'
성경과 이 세계의 경전에서는 누군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조차 내어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과 오른뺨을 가릴 것도 없이 쌍으로 갈겨버리라고.
나는 말할 것도 없이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운명을 기다리기보다는 운명의 손을 잡아끄는 사람. 그편이 더 속이 후련하지 않은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