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누군가 오른뺨을 치거든 (2)
* * *
'티아 이글라스, 니어 파른헴, 브렌다 발렌…'
수녀원의 일과가 끝난 한밤중.
나는 아무런 조명도 없이 깜깜한 방 안에서 천장을 노려보며 내 목표물인 세 수습 수녀의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세 명 모두 이 수녀원에서 알게 된 사이, 수녀원 이전의 접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녀들 역시 각각 키니아 제국의 남부, 동부, 서부에 영지를 두고 있는 귀족가문의 영애였으나, 저마다의 이유로 가문에서 버림받고 수녀원으로 보내진, 어떻게 보자면 기구한 운명의 피해자였다.
'물론 내가 그걸 신경 써 줄 처지는 아니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들의 사정까지 일일이 챙겨줄 여유는 없었다.
에일라가 그동안 쌓아온 악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는 것만 해도 피곤한 것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인데, 남의 사정까지 신경 써줄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 뭔가 석연치 않아. 티아 이글라스가 저렇게 내 눈치를 볼 것이라면 에일라가 당연히 보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번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 되는데.'
게다가 티아의 행동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수녀원 내에 퍼질 대로 퍼진 에일라의 악명을 티아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에일라를 찾아가서 시비를 걸었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 뒤에 누군가가 있다면 말이 되지.'
에일라는 수많은 사람의 원한을 한몸에 받으며 몰락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았던 사람 역시 존재할 터.
그런 이라면 에일라가 완전히 몰락하여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절망하여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바랄 것이다.
'…누굴까. 짐작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우선 떠오르는 것은 에일라가 괴롭혔던 '셀린 엘리어드'라는 이름의 영애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던 남자들이었다.
지금 에일라에 가장 깊은 원한을 가졌을 사람이라면 그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우선은 니어 파른헴과 브렌다 발렌을 티아 이글라스에서 떼어내고,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인가.'
결국, 티아 이글라스의 뒤에 있는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티아와 붙어 다니던 두 수습 수녀를 내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진짜 산 넘어 산이네. 정말 이렇게 집요하게 미움받기도 힘든데. 에일라가 무슨 부모의 원수라도 되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나는 답답함을 느끼며 좀처럼 오질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
"니어랑 브렌다?"
"맞아요. 두 사람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요."
정보원을 따로 구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내가 의지할 곳은 결국 세이사 뿐이었다.
"으음, 니어라면 옆방 친구인데, 같은 방 친구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야. 혼자서 거리를 둔다는 느낌?"
"같은 방을 쓰는 자매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단 말인가요?"
"맞아. 니어는 거의 항상 티아와 붙어 다니거든. 담당 일과도 담당 수녀님에게 부탁해서 같은 일과를 담당하는 걸로 맞추기도 하고."
세이사가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다가서는 붙임성 좋은 덕에 그녀를 경계하는 이가 수녀원 내에 없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수습 수녀들과도 접점을 만들지 않으면서 티아와 붙어 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니어 파른헴이 티아 이글라스와 어떤 관계로 강하게 묶여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섣부르게 에일라 혼자 조사에 나섰다면 오히려 역공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대체 뭐로 묶여있는 걸까. 금전? 하지만 수녀원장이라면 모를까, 수습 수녀가 따로 돈을 모을 방법은 없을 텐데.'
수사와 수녀의 재산은 모두 수도회의 소속으로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문의 지원을 받아 수녀가 된 것도 아닌 티아 이글라스가 다른 사람이 혹할 만한 금전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딱히 떠오르는 이유도 없고…. 니어 쪽은 접근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겠어.'
원인을 파악할 수 없으니 섣부르게 건드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니어 쪽에 손을 쓰는 것을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럼 브렌다는 어떤가요?"
"브렌다는 그래도 같은 방 친구들과 잘 지내는 편이야. 티아와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은 니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렇군요."
세이사의 대답을 듣고,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티아는 방패막이로 내세운 앞잡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어.'
격정적인 성격의 티아와 차분하고 냉정한 성격의 니어, 둘을 반쯤 섞어놓은 것 같은 브렌다.
이용당하기 좋은 쪽을 고르라면 말할 것도 없이 티아였다.
'그렇다면 진짜 머리는 누구지?'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니어가 실질적인 리더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것 역시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었다.
오히려 브렌다가 눈속임을 위해 다른 수습 수녀들과의 접점을 늘리며 평범함을 연기하는 실질적인 리더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상대방은 어둠 속에 숨어서 내 목을 서서히 옥죄어 오고 있는데, 나는 어둠 속에 숨은 저들의 실체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라?"
에일라의 기억에서 '셀린 엘리어드'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 남자들은 저마다 하나씩 잘난 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 싸움, 과연 에일라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인가?
"에일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내 안색이 어두워졌던 탓일까, 세이사의 얼굴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부담스러우니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바로 눈앞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심장에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응. 알았어."
내 요청에 배시시 웃으며 멀어지는 세이사의 얼굴.
여자인 에일라의 몸에 들어왔어도 내 영혼은 아직 남자라는 걸까. 내가 에일라의 몸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세이사에게 고백하고 곧바로 거절당했을 정도로 순수하고 예쁜 미소였다.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사실 반격을 준비하려다가 오히려 걱정거리가 추가된 격이었지만, 모르고 발걸음을 내디뎠다가 지뢰를 밟느니, 차라리 눈앞이 지뢰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기로 했다.
*
"…이상해. 어째서 아무런 일도 없는 거야?"
수녀원의 인적 드문 외딴 방.
티아 이글라스는 계속해서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큰 보복을 가하려고 며칠이나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에일라 그 녀석이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여태껏 저지른 큼직큼직한 사건 탓에 수녀원에서 사실상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에일라였지만, 그 사실이 에일라 넬런의 더러운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
에일라를 건드렸다가 에일라의 무시무시한 보복을 받고, 마치 벌집을 건드렸다가 벌침에 쏘인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수습 수녀의 수가 벌써 다섯 명이 넘어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까.
"티아. 너무 불안해할 필요 없어."
불안감에 떠는 티아 이글라스를 멈춰 세운 것은 티아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니어 파른헴이었다.
"우리에게 거래를 제안한 오스라드님이 바라는 것은 에일라의 파멸이야. 아무리 에일라가 발버둥친다 해도 시간은 우리의 편이야."
아이셀 오스라드.
에일라 넬런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보고하면 나중에 그녀들을 수녀원에서 빼내 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했던, 키니아 제국 제2의 규모를 자랑하는 오스라드 상단의 후계자였다.
"그래, 그랬지? 우리는 그년을 압박하는 동시에 근황을 보고하기만 하면 이 빌어먹을 수녀원을 벗어날 수 있잖아? 그런 거지?"
니어에게 연신 질문을 쏟아내는 티아 이글라스의 모습에는 무시무시한 귀기가 서려 있었다. 요 며칠 간 그녀가 불안감에 잠을 설친 후유증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뤼네의 꿈'이나 한 모금 피우고 진정해."
손까지 덜덜 떠는 티아의 손 위로 니어의 손이 포개지고, 티아의 손 위에는 잘 말려서 잘게 썰어낸 '뤼네의 꿈'을 종이로 돌돌 만 궐련이 올라가 있었다.
"후우."
방을 밝히는 유일한 광원인 촛불에 궐련의 끝을 가져다 댄 티아는 궐련에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불을 붙이지 않은 반대편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고 크게 한 모금 들이쉬었다.
"정말이지, 이게 없으면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하겠어."
잿빛 연기가 짙게 솟아오르며 방 안과 티아의 폐를 채우는 것과 동시에, 덜덜 떨리던 티아 이글라스의 손에서 떨림이 멎었다.
뤼네의 꿈.
최근 키니아 제국에서 암암리에 퍼져 나가는 중인, 불안한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에 효능을 보인다는 약재의 효과였다.
"기분은 좀 나아진 모양이네."
"그래, 조금은.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티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니어는 편지 한 장을 티아 앞에 내밀었다.
"오스라드님이 보낸 서신이야."
"뭐? 당장 이리 내."
니어의 부연설명에 티아는 빼앗듯이 편지를 낚아채더니 그 내용을 빠르게 읽어나갔다.
「보고는 잘 받았다.
독버섯이 답지 않게 착한 척을 시작했다지? 그래 봤자 그 안에 든 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야.
우리 안에서 좀 나은 대우를 받고 싶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렇다면 철저하게 짓밟아서 그 처지를 곱씹게 해라.」
주어가 모호한, 시비라도 거는 것 같은 편지의 내용이었지만, 방에 모인 그녀들은 그 편지에서 언급하지 않은 주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안 나서도 되지? 두 번이나 연속으로 내가 시비를 걸면 수녀원장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아냐."
"그래. 이번엔 내가 나설 거야."
티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니어를 돌아보자, 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본인을 괴롭히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니까."
"그래. 브렌다 네 말이 맞아."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브렌다가 한마디를 툭 던지자, 니어가 입가를 비틀며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혼자만 착한척 위선을 떠는 그 모습이 말이야."
그 모습은 신에게 닿기 위해 기도하는 수도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구렁텅이로 밀어 던져넣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악마의 그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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