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8화 (8/80)

〈 8화 〉 Camellia

* * *

"에일라! 이것 봐! 이번 시네티 마을의 봄맞이 축제에 봉사활동을 나갈 수습 수녀의 명단이야!"

"세이사.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보고 있어요."

아침 기도가 막 끝난 시간.

세이사는 게시판에 붙은 이번 주의 일과표를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는 그런 세이사를 진정시키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같이 못 갈 수도 있었잖아."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수녀님들과 수녀원장님이 정하시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어요."

내 미적지근한 반응이 불만스러웠는지, 세이사가 살짝 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무마한 뒤, 나는 한마디를 더했다.

"…그래도 세이사와 같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잘 되었다고 생각해요."

수녀원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이번 기회에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를 모을 생각이었기에, 친화력이 좋은 세이사는 좋은 동행인이었다.

어째서 또 세이사에 의존하냐고?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에일라의 인상은 첫인상을 좋게 받기가 어려운 인상이다. 전체적인 외모를 놓고 보면 미인이라고 못 할 것은 아니지만, 악역 영애의 종족 특성인지 누구나 한 번 보면 몸을 움찔하는 에일라 특유의 사나운 눈매가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솔직히 어쩌다가 수면이나 금속으로 된 물건의 표면에 비친 에일라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움찔할 수준이었으니, 시네티 마을의 주민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마 세이사가 옆에 붙어있지 않는다면 에일라의 눈치를 보면서 피할 것이 분명했다.

"에헤헤."

물론 어른의 치사한 타산이나 셈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세이사는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헤실헤실 풀어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양심이 아프다. 다른 생각으로 도망가자.

'티아 이글라스…'

명단에 적혀있는 그 이름을 보고 있자니 절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저번의 사건을 저지른 것을 제외하더라도, 티아 이글라스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나를 영원히 이 수녀원 안에 처박히게 만들 계획을 진행중인 흑막의 끄나풀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녀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려야 가질 수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니어 파른헴과 브렌다 발렌은 명단에 없어. 축제 때 사건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티아 이글라스의 독단이겠지. 티아 이글라스의 성격상 임기응변에 그리 능할 리가 없으니까.'

티아 이글라스의 성격을 비유하자면 불꽃과도 같다. 단순하고 충동적이며, 어디로 불티를 튀겨 또 다른 불길을 일으킬지 모르는 성격.

보통 이런 성격의 사람은 계획을 세워두어도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약점을 노리기엔 최적의 상대야. 하지만 니어 파른헴이나 브렌다 발렌이 그걸 생각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티아 이글라스만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뒤에 있을 니어 파른헴이나 브렌다 발렌의 존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티아 이글라스와는 달리, 한발 물러서서 자신은 사건에 직접적으로 엮이지 않으면서 에일라에 대한 견제를 수행하는 그녀들은 교활하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이들이다. 어디서 흉계를 꾸며올지 모른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시네티 마을에 가서 티아 이글라스와 엮이지 않는 건데.'

어차피 그녀들도 직접적으로 수녀원 바깥으로 나갈 수단이 없으니 작전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티아 이글라스를 중심으로 작전을 세울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그 함정을 피해 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함정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 일터.

'문제는 그래도 티아 이글라스가 작전 수행을 위해 다가오는 것인데….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어.'

상대방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대응책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여 당장의 위기를 쳐내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수준.

새삼, 내가 빙의하기 전의 에일라 넬런이 수녀원 생활을 어째서 그토록 혐오하고, 자해 소동을 저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당장 현대 지구만 하더라도 학교나 직장 등에서 벌어지는 따돌림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에일라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에일라!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이번에도 자꾸 어두운 쪽으로 생각이 쏠리려던 것을 세이사가 붙잡아 주었다.

그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며, 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세이사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 시네티 마을에 가서 세이사와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

"자매님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시네티 마을이랍니다."

인솔 역을 맡은 레이첼 버튼 수녀의 말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시네티 마을로 출발한 탓에 병든 닭처럼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던 수습 수녀들이 고개를 들었다.

"우와…."

"진짜 꽃으로 가득한 마을이네."

시네티 마을의 입구까지는 아직 거리가 제법 남아 있었지만, 벌써 주변은 늦겨울에 피는 꽃들로 만발해 있었다.

노란색과 담홍색, 흰색 등의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 수선화는 물론, 빨간색과 흰색, 둘을 섞어놓은 듯한 연분홍빛 시클라멘이 색깔별로 하나의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모습은 그 풍경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때? 대단하지? 시네티 마을에 들어가면 더 예쁜 꽃이 많아."

"…확실히 놀랍네요."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펴는 세이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나는 다시금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마을 주변이 모두 탁 트인 평야라서 용병을 매수해서 기습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아름다운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나는 경계심을 최고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언제, 어떻게 상대방이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눈빛은 더욱더 날카로워진 상태였고, 머리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이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하느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상태.

'나도 마음 편히 축제를 즐기다 돌아가고 싶은데 말이야.'

세이사의 밝은 표정을 보니 순간 깊은 자조감이 들었지만, 여전히 내 머리는 냉정하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를 예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티아 이글라스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나와는 한참 떨어진 구석에 자리를 잡은 티아를 힐끗 바라보니 티아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함만 늘어났다.

"자, 모두 내립시다. 여기가 시네티 마을입니다."

시네티 마을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레이첼 버튼 수녀의 말과 동시에, 덜컹거리며 움직이던 수레의 움직임이 멎었다.

"여기가 시네티 마을이구나."

"도시라고 해도 되겠는데?"

호들갑을 떠는 수습 수녀들의 말처럼, 시네티 마을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규모였다.

주변에 성벽을 쌓고, 도시라 자칭하지 않을 뿐이지, 나무로 마을 주변에 방책을 쌓고 여기저기 동백나무를 심어 가꾼 시네티 마을의 모습은 에일라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중소규모의 도시와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것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수녀님들."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자매님들."

"올해도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에단 촌장님, 코니엘 신부님. 올해도 봄맞이 축제를 지원하러 왔습니다."

시네티 마을을 처음 방문한 수습 수녀들이 수녀원을 벗어나 처음으로 다시 보는 바깥세상의 풍경에 취해있는 사이, 레이첼 버튼 수녀는 시네티 마을의 촌장과 시네티 마을의 성당을 관리하는 신부와 인사를 나누었고, 곧바로 수습 수녀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 모두 수레에서 내립시다. 바로 시네티 마을의 봄맞이 축제를 준비하는 일을 도와야 하니까요."

물론 오랜만에 수녀원 밖의 공기를 쐬게 된 수습 수녀들은 한숨을 내쉬며, 저마다 불평을 터뜨렸다.

"결국 여기서도 일을 해야 하는구나…."

"난 뭘 기대한 걸까…."

들떠있던 분위기가 빠르게 가라앉고, 여기에 와서도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툴툴거리는 수습 수녀들이었지만, 레이첼 수녀가 시선을 보내자 마지못해 가져온 물건들을 수레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세이사. 가자."

"응. 에일라도 힘내!"

나 역시 수레에 실려있던 약재 등의 물자가 든 상자를 들고 수레에서 내렸고, 세이사 역시 응원의 한마디를 건네며 나처럼 상자를 수레에서 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

"힘드네요."

괜히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가 힘든 아르바이트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수레 가득히 쌓인 상자를 수레에서 내리고, 그 상자를 내용물에 따라 분류해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일은 건장한 남성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기력이 소진되는 일이었고, 체력이 약한 편인 에일라의 몸으로는 오랫동안 버틸 수 없는 고강도의 노동이었다.

"자, 에일라."

결국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쌓아 올린 상자에 기대 쉬고 있자니, 눈앞에 세이사의 목소리와 함께 동백꽃 하나가 불쑥 다가왔다.

"동백꽃은 꿀이 많아서, 이대로 입에 대고 쭉 빨아먹으면 꿀이 그대로 나오거든. 꿀을 먹으면 좀 기운이 날 거야."

전생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화단에 핀 사루비아 꽃을 빨아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내가 비슷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세이사의 말대로 붉은 동백꽃을 받아 입에 대고 쭉 빨기 시작하니, 달콤한 꿀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지며 주저하던 마음은 저 멀리 날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지친 몸에 당분이 들어오니 다시금 몸에 기운이 솟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요. 세이사."

"아니야. 나는 마을에 있는 동백꽃 하나를 따도 된다는 허락을 맡고 딴 것에 불과한걸. 감사는 시네티 마을의 주민분들에게 해야지."

고마움에 곧바로 감사 인사를 건넸지만, 세이사는 별 것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세이사다운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이사, 축제를 여는 며칠 간은 시네티 마을에서 지낸다고 했었죠?"

"응. 시네티 마을의 봄맞이 축제는 사흘 동안 열리는걸.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고."

"마지막 날에는 뭘 하길래 그런가요?"

미리 축제 일정을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중간에 시간을 내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축제 일정에 맞춘 계획을 세워두는 것은 내게 몹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건 비밀이야. 에일라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쉿'이라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세이사.

"…그럼 어쩔 수 없죠."

차마 그 웃음을 깨트릴 수 없었던 나는 세이사에게 축제에 관해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나 자신을 무척이나 원망하게 되는 원인이 될 줄도 모른 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