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Camellia (2)
* * *
"다 되었어요. 혹시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아닙니다. 수녀님. 이렇게 돌봐주시는 것만 하더라도 저희에겐 큰 도움이 됩니다."
시네티 마을에 온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처음에는 마을의 축제 준비를 돕는 수준에서 끝날 줄 알았지만, 수습 수녀들이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시네티 마을의 축제 준비를 돕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키니아 제국의 사람이 성직자를 보면 '치유의 기적'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만큼, 교단에 소속된 사제와 수도자는 병자를 돌보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탓에 시네티 마을의 주민 중에서 병마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치료와 간호를 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 쪽으로는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걸까요."
문제라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몰려온 환자 가운데 내가 담당하는 병상으로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서 오세요. 일단 자리에 앉아서 어디가 불편한지를…."
"히, 히익!"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간혹 몇몇 환자가 내 담당의 병상으로 다가왔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놀라면서 후다닥 다른 수습 수녀가 담당하는 병상으로 뛰어가 버리니, 나는 그저 멍청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눈이 문제인 걸까요."
에일라의 눈빛은 사납다.
이 점은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을 맡기에는 꽤 심각한 결격사유였다. 환자가 자신의 몸을 안심하고 맡겨도 된다는 믿음을 가지기도 전에 절로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눈빛이니까.
"그냥 이렇게 타고난 것을 어쩌라는 걸까요."
그만큼 억울했다.
환자를 보는 실력이야 수녀원에서 교육하는 과정을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가고 있었고, 제법 실력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능력을 보여줄 길이 환자와의 시선 교환에서부터 차단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에일라, 수고했어!"
결국, 나는 구호 활동 시간이 끝나고 세이사가 찾아올 때까지 단 한 명의 환자도 받지 못한 채 구호 활동을 종료해야만 했다.
"…수고라 할 것이 있나요. 환자분들이 눈만 마주쳐도 다 도망가던데요."
"…아하하. 고생 많았어."
내가 약간의 자학을 담아 농담을 건네자 세이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세이사조차 에일라의 눈빛이 사납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살짝 가슴이 쓰려왔다.
"…크흠. 아무튼 세이사도 수고 많았어요."
수녀원은 시네티 마을의 축제를 도우러 수습 수녀들을 파견하는 것을 일종의 해방구로 써먹고 있었는지, 시네티 마을에서의 일과는 수녀원에서의 일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아침, 점심, 저녁 기도는 당연하게도 절대 빼놓지 않지만, 아침과 점심때의 노동을 제외하면 저녁에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니,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는 수습 수녀들은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시네티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동안 수녀원 안에서 억눌러왔던 한(?)을 푸는 것이다.
사실 그래 봐야 이런저런 이유로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현대의 사람이었던 내 시선으로 보았을 때 별로 재미있는 축제는 아니었다.
딱히 눈길을 사로잡는 공연이나 퍼포먼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을 여기저기 가득히 피어난 꽃을 보고 즐기며 먹고 마시고 춤추면서 즐기는 것이 전부. 시네티 마을의 축제는 딱 그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도시도 아니니 확실히 그건 어렵지.'
에일라의 기억에 남아있던 문화생활과 비교해도 시네티 마을의 축제는 별로 흥미로운 행사가 아니었다.
대귀족의 영애로서 화려한 의상을 두른 배우들이 나오는 연극이나 뮤지컬, 오페라 등을 보던 에일라였으니, 그 규모가 도시에 비견될 만큼 크다고는 하나, 결국 키니아 제국의 변방에 세워진 마을에 지나지 않은 시네티 마을의 질박한 축제는 영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다.
"세이사, 세이사는 시네티 마을에 오는 게 이번으로 몇 번째인가요?"
"으음…. 이번이 아마 세 번째일걸? 운이 좋아서 자주 뽑혀왔거든."
"그럼 시네티 마을의 지리는 훤히 꿰뚫고 있겠네요."
축제에 대한 관심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으니 본래의 목적에 충실할 때가 되었다.
"세이사, 그럼 잠깐 같이 걸을 수 있을까요? 주민분들은 저를 보기만 해도 자꾸 피해서 말이죠."
우선 첫 목표는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아마 외부와 접선한다면 이 마을에서 접선하거나, 수녀원으로 들어오는 상단을 통해서겠지.'
수녀원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수단이 없는, 티아 이글라스를 비롯한 이들이 외부와 접촉할 수단이라면 그것 말고는 없었다.
'세이사와 같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아야 해.'
그녀들도 마을주민들의 눈을 피하면서 접촉했겠지만, 무언가 수상한 거래를 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을 터.
그것도 비교적 조심성이 적고 감정적인 티아 이글라스라면 꼬리를 잡기도 쉬우리라.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머릿속으로 열심히 주판을 튀기는 나와는 달리, 별다른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팔을 잡아끄는 세이사를 따라,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
"부탁드려요! 수녀님!"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원래 인생이란 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뜻대로 풀리지 않아버리면 뒤에서 흐름을 조종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번 축제에서 반드시 올해의 꽃으로 뽑혀야 해요! 제발 도와주세요!"
나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세이사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앞에서 고개를 깊게 숙인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듣기는 해야겠죠?"
"…응. 곤란함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성직자의 의무인걸."
대체 시네티 마을에서 열리는 봄맞이 축제에서 뽑는 '올해의 꽃'과 수녀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에일라의 사나운 눈매와 고개를 숙인 소녀를 번갈아 보며 표정을 굳히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 때문에라도 사정을 빠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고개부터 들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세요."
"아, 네! 수녀님!"
씩씩하게 대답하며 숙였던 고개를 위로 쳐드는 소녀. 나이는 아마 열 살쯤 되었을까,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시네티 마을 주민들이 입는 것과 같은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런 허름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서는 귀여움이 물씬 느껴지는 것이, 영락없는 미인의 상이었다.
"제가 리나랑 내기했거든요. 이번 축제에서 올해의 꽃으로 뽑히는 쪽이 상대방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어요."
…생각보다 별것 아닌 이유였다.
아니, 상대방의 연령을 고려하면 딱 그 연령에 맞는 행동이었다.
"잠깐만, 혹시 리나라면 촌장님의 따님을 말하는 거야?"
"맞아요. 리나랑 저는 친한 친구지만 마을 최고 미인의 자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걸요! 혹시 이전에도 저희 마을에 오셨던 수녀님인가요? 그러면…."
시네티 마을을 여러 번 방문한 전적이 있는 세이사가 소녀가 언급한 '리나'라는 친구가 누구인지 알은체를 하자, 소녀는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은 대충 알겠어요. 그런데 저희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는 거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별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눌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나는 또 무언가 입을 열려던 소녀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끼어들었다.
"저랑 같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아, 이 친절한 수녀님 말고 수녀님이랑요!"
"…어째서인가요?"
소녀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나는 곧바로 되묻고 말았다. 나와 눈빛만 마주쳐도 시선을 피하기 바쁜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인데, 이 소녀는 왜 굳이 에일라랑 같이 마을을 돌아다니려고 하는 걸까.
"그야 수녀님이랑 같이 마을을 돌아다니면 제 외모가 한층 더 돋보일 테니까요! 미인은 원래 마음이 예뻐서 그게 외모에도 드러난다는데, 수녀님은 마음이 흉한가 봐요!"
…이 망할 꼬맹이가.
드러내야 할 마음과 숨겨야 할 본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뱉는 철없는 소녀의 대답에 나는 밀려오는 짜증에 미간을 찡그렸고, 세이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시네티 마을의 외곽의 으슥한 곳에 세워진 창고 내부.
티아 이글라스는 그곳에서 오스라드 상단의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온 물건은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상인과 티아가 마주 보고 앉아있는 나무 궤짝 위에 오른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 안에서는 말린 풀을 잘게 썰어낸 것이 들어있었는데, 티아 이글라스"는 그것을 코에 가까이 대고 킁킁대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상인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저희는 그저 내려오는 물건을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입니다만….
하지만 오스라드 상단의 상인은 천연덕스럽게 티아의 의심 섞인 시선을 받아넘기며 자신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다른 풀이라도 섞어서 양을 부풀린 거야? 원래 뤼네의 꿈에는 이런 톡 쏘는 향이 나지 않았잖아! 이런 걸 수녀원 안에서 피웠다간 냄새가 금방 가시지 않아서 들킨다고!"
하지만 티아 이글라스가 짜증을 가득 담아 불만을 터뜨리자, 상인은 여전히 능글거리는 미소를 표정에서 지우지 않은 채, 품속에서 다른 주머니를 꺼내 들어 내용물을 티아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이전의 것도 준비해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신품을 한 번 피워 보신다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신품?"
여전히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내며 상인이 꺼내든 주머니를 낚아채듯 붙잡은 티아가 관심을 드러내자, 상인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가죽 주머니 안의 '신품'을 한 줌 집어 재빠르게 궐련을 말아 티아에게 건넸다.
"뤼네의 꿈에 청연초를 섞어, 피우실 때의 청량감을 한층 높이고, 불쾌한 향을 줄인 물건입니다. 한번 피워보시죠."
어둑어둑하던 창고 안을 밝히던 유일한 광원인 촛불이 티아 앞으로 내밀어졌고, 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상인이 건넨 궐련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나쁘지 않네. 하지만 연기가 이렇게 눈에 띄어서야 수녀원 안에서 피우긴 어렵겠어."
티아는 입안에 퍼지는 청량한 느낌과 동시에, 궐련 끝에서 솟아오르는 짙은 푸른빛의 연기를 보고 그런 감상을 돌려주었다.
"고작해야 조그마한 궐련 하나에서 나오는 연기입니다. 뒤처리만 신경 쓰신다면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잖습니까?"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이번 물건도 잘 받았어. 다음에도 부탁하지."
"물론입니다. 티아 이글라스님도 다음 거래가 있을 때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의례적인 작별 인사를 나눈 후, 티아가 창고를 빠져나가는 것에 상인이 연신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들의 음습한 거래는 일단락되었다.
"멍청한 년 같으니. 청연초가 무슨 풀인지도 모르는군."
티아가 빠져나가고, 이제는 완전히 적막에 빠진 창고 안에서 상인은 조소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마을을 떠나자. 여기에 불을 지르면 조만간 냄새를 맡은 마수들이 마을로 몰려올 테니."
"예. 알겠습니다."
상인이 명령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창고의 그림자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던 여러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며 상인이 내린 명령을 받들었다.
"참으로 불행한 '사고'야. 축제가 벌어지는 마을을 습격한 마수 무리와 이에 몰살당하는 마을이라니."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불길을 일으키도록 술식이 짜인 마도구를 창고에 가득 쌓인 상자 위에 올려두면서 상인은 비웃음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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