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10화 (10/80)

〈 10화 〉 Camellia (3)

* * *

결국 원치 않았던 동행을 허락하자, 건방진 꼬맹이는 자신의 이름이 '엘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럼 엘리네 집은 꽃 기름 짜는 일을 하는 거야?"

"맞아요! 근처 도시의 영주님이 우리 집에만 허락을 내려주셔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우리 집에 와서 기름을 짜가요!"

세이사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자니, 엘리는 시네티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제유소를 담당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밀알만으로는 빵을 구울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농부들이 수확한 밀알을 잘게 빻아 밀가루로 만드는 제분소가 세금을 거두는 영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듯, 시네티 마을 역시 꽃 기름을 짜는 시설은 인근 도시의 영주 직속으로 운영되는 모양이었다.

"가끔 꽃에서 짜낸 기름이 적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 집도 먹고 살아야죠!"

…게다가 제분소지기라면 으레 달라붙는 악명 역시 똑같이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따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제분소지기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영주에게 세금으로 낼 밀가루를 덜어내고 농부에게 돌아가야 할 밀가루를 조금 슬쩍하는 것은 이미 암묵적으로 인정받는 관례였으니까.

"맞아요. 제유소를 계속 운영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역시 성격 나쁜 수녀님은 말이 잘 통하네요!"

"……"

내 나름대로 엘리의 입장을 변호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의 입은 가차 없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을 쏟아냈다.

"아하하. 그래도 사이가 금방 좋아져서 다행이네."

"…자각없이 실례되는 말을 하는 아이에게까지 화를 낼 정도로 분별력이 없지는 않아요."

엘리의 말에 미간을 좁히는 내 모습을 보고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세이사의 말에 나는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지금 에일라의 몸에 빙의한 탓에 신체 나이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밖에 먹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20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사람의 영혼이다.

그런 어른이 꼬마의 자각 없이 내뱉는 순수한 독설에 마음이 꺾이거나 말다툼을 벌여서 대체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전혀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죠."

가끔 세이사를 알아보고 감사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 일행에 먼저 말을 걸어오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눈매도 사납고 같이 마을에 온 수녀들 사이에서도 겉도는 에일라와 시네티 마을에서 미움을 받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제유소지기의 딸에게까지 먼저 말을 걸 주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정보를 얻기는 글렀는데.'

대화를 나누던가 해야 뭔가 시답잖은 정보라도 모이는 법인데, 애초에 상대조차 해주지 않으니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번 정보수집은 망했다고 봐야겠군.'

인제 와서 엘리를 떼어놓고 다닌다고 해 봐야 딱히 시네티 마을의 주민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방법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나마 대화를 시도하면 받아줄 만한 사람으로는 촌장이 있었지만, 촌장이라는 자리에 올라있는 사람인 만큼 누군가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 탓에 피하고 싶었다.

"불이야! 창고에 불이 났다!"

시네티 마을에서의 정보수집을 완전히 망친 것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불이 났다고 소리치는 주민의 외침이 들려왔다.

"세이사, 어서 가죠."

무슨 이유로 불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명을 구하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교단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화재 현장을 찾아가 혹여나 화재로 다쳤을 사람을 찾아 돌보아야 했다.

"응, 서두르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사의 대답과 동시에 우리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푸른 연기?'

화재 현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무언가 특이했다.

보통 불이 나면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회색이나 검은 연기이기 마련인데, 지금 불타오르는 창고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는 명백히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저, 저 연기는…."

"세이사, 왜 그래요? 저 연기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있나요?"

세이사는 창고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에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세이사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큰일이야! 저건…틀림없이 청연초를 태웠을 때 나는 연기야!"

"청연초? 그게 뭐죠?"

에일라의 기억을 뒤져도 모르는 지식이었기에 나는 세이사에게 되물었지만, 세이사는 더욱더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며 소리치듯 말했다.

"청연초에서 나는 연기에는 마수들만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섞여 있어! 저렇게 짙은 푸른색의 연기라면, 저 불길을 잡아도 얼마 안 가 냄새를 맡은 마수들이 시네티 마을로 몰려올 거야!"

"…뭐라고요?"

마수.

키니아 제국의 동부를 위협하는 악마들의 농간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일반적인 짐승보다도 크고 강력한 육체를 가졌음은 물론, 그 어떤 짐승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흉포함을 지닌 존재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도 쓰러뜨릴 수는 있으나, 사제가 신성력으로 마수의 시체를 완전히 정화하지 않으면 오염이 남아 다른 짐승을 마수로 변이시키기까지 하기에 키니아 제국의 골칫거리로 불리는 그 마수가 시네티 마을을 습격하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시네티 마을이 마을치고는 상당한 규모를 지닌 마을이라지만 거주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평범하게 꽃을 재배하는 것으로 먹고사는 농민이다.

마을 주위를 둘러싼 방책은 제법 견고해 보이기는 했지만, 마수라는 흉흉한 이름으로 불리는 짐승들이 고작 나무로 만든 방책을 무너뜨리지 못하겠는가?

'제기랄!'

이런 수를 둘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직접적으로 내 목숨을 노리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한 내 패착이었다.

'티아 이글라스까지 희생 시켜 가면서 에일라를 제거하려는 계획이었나!'

아무리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다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장기 말을 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참으로 안일한 판단이었다.

"세이사는 불이 난 쪽으로 가주세요. 저는 촌장님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요."

"알았어! 에일라도 조심해!"

하지만 언제까지나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화재가 일어난 창고의 연기는 기세 좋게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청연초가 타는 냄새를 맡은 마수들은 시시각각 시네티 마을로 달려오고 있을 터였다.

"저도 같이 갈게요!"

"…당신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 몸을 피할 생각부터 하세요."

급히 촌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엘리는 나를 따라오겠다고 따라붙었다.

"괜찮아요! 촌장님의 집은 제가 잘 아는걸요! 제가 앞장설게요!"

당연히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나는 거절했지만, 바득바득 앞장서겠다는 엘리를 설득하는 것에 할애할 시간은 없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

"푸른 연기라고 했나?"

"네! 마수들이 그 연기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마을로 올 거라고 똑똑하고 친절한 수녀님이 말씀하셨어요!"

"촌장님. 지금 당장 마을로 몰려올 마수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촌장의 집에 도착한 나와 엘리는 급히 문을 두드려 촌장, 에단을 찾았다.

에단 촌장과 구면인 엘리가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직설적으로 당장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촌장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이런…. 영주님이 보낸 병사들이 있긴 하지만 고작해야 세 명뿐인데…."

차라리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무장한 병사 셋으로 마을로 몰려들 마수 무리를 완전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이 마수를 격퇴할 병장기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고작해야 농기구를 휘두르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 전부일 터.

"…코니엘 신부님께도 이 사실을 알려야겠군."

결국 에단 촌장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시네티 마을의 성당을 관리하는 코니엘 신부였다.

아무리 외진 마을에 부임한 신부라 하더라도 정식으로 서품을 받은 사제다.

신성력으로 빛의 화살을 만들어내 쏘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기적인 '신성한 화살'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정식 사제로 서품을 받을 수 있는 최소조건인 만큼, 코니엘 신부 역시 그 정도의 능력은 갖추고 있을 터.

"…힘들겠군요. 저 혼자서 그만한 마수를 퇴치할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급하게 찾아간 코니엘 신부는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한둘 정도의 마수라면 마을주민과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물리칠 수 있겠지만, 청연초가 타는 냄새를 맡고 마을로 몰려올 마수의 수를 생각하면 역부족이라는 말이었다.

"저야 악마들의 농간에 의해 태어난 존재들에게 길더스텐님이 머무르는 성당을 순순히 넘길 수는 없으니 남겠지만, 에단 촌장님께서는 마을 주민들만이라도 건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을을 버리고 몸을 피하시죠."

"코니엘 신부님."

엄숙한 표정으로 자신은 이곳을 지킬 테니 그사이에 대피할 것을 권하는 코니엘 신부의 말은 훌륭한 사제의 표본이었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의문에, 무례함을 알고도 코니엘 신부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에일라 자매."

"마수는 일반적인 짐승보다도 강력하지만, 신성력이 깃든 공격에 몹시 취약하다고 들었습니다. '신성한 화살'을 자매들에게 가르쳐서 마수를 퇴치할 수는 없겠습니까?"

내가 품은 의문은 그것이었다.

정식 사제라면 모든 사제가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기적이니 아무리 신성력이 미약한 수습 수녀라도 조건만 맞는다면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

"에일라 자매. '성스러운 화살'이 가장 쉽게 익힐 수 있는 기적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처음으로 익히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이 모든 터전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마수의 습격으로 마을이 초토화되면 시네티 마을의 주민은 갈 곳을 잃고 떠돌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셈이었다.

'정식으로 수녀원 바깥에 나갈 수 있으면서도 바깥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야. 이렇게 잃어서는 안 돼.'

그리고 나 또한 바깥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시네티 마을을 이렇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손에 쥔 패가 없어서 고생하고 있는데 손 안에 있는 패마저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네티 마을은 우리 수녀원에서 만들어낸 물자를 꾸준히 소비해주던 마을입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에일라 자매. 길더스텐님 역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절망하기보다는 나서서 희망을 쟁취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시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코니엘 신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나는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

'에일라 자매….레이첼 자매님이 말하던 것과는 다르군요.'

코니엘 신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눈앞의 수습 수녀를 바라보면서 그런 감상을 품었다.

수녀원에서 걸핏하면 말썽을 일으키고, 자신밖에 모르는 문제아였다고 들었는데, 막상 자신이 마주한 에일라라는 수습 수녀는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위험에 몰아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쩌면, 에일라 자매는 기적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조건은 충분한 신성력과 타인을 위해 이 힘을 사용하겠다는 마음이다.

'…잠재되어있는 신성력의 양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군요.'

그리고 잠재되어있는 신성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코니엘 신부의 눈에, 에일라는 그 능력을 충분하게 갖추고 있었다.

레이첼 수녀와 자신을 포함해서 에일라까지 기적을 사용해 마수를 막아낸다면 마수의 습격을 막아낼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만큼 기적이란 강력한 힘이니까.

'어쩌면 저는 또다른 성녀의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수많은 이들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에일라라는 이 수습 수녀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코니엘 신부는 몸에 전율이 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코니엘 신부는 그런 마음을 숨기고,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경전 위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에일라 자매. 지금 즉시 모든 자매님들을 불러모아 주세요. 에일라 자매의 말대로 자매님들에게 '성스러운 화살'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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