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Camellia (4)
* * *
기적.
카르실리안 대륙의 여러 종족이 선천적으로 조금씩 타고나는 신성력이라는 힘을 매개체로 하여, 열두 주신의 권능을 빌려 사용하는 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카르실리안 대륙 북부에서 주로 숭배되는 '아가드'의 사제들은 매서운 북풍의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답게 차가운 냉기를 다루는 기적을 행하며, 카르실리안 대륙 서부에 주로 거주하는 숲의 종족, '발트르'는 그들이 주로 숭배하는 '아라신스'의 권능을 빌어 급속도로 식물을 자라나게 하거나 여러 동식물과 교감하는 등의 기적을 행한다.
키니아 제국의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로 '길더스텐'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하는데, 이는 다섯 가지의 기적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 타인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의 기적'.
두 번째로 대지에 축복을 내려 수확 철에 농부들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풍요의 기적'.
세 번째로 삿된 기운을 몰아내고 온갖 오염을 정화하는 '정화의 기적'.
네 번째로 사방에 올바름을 설파하고 불의를 단호히 거부하는 '정의의 기적'.
마지막으로, 카르실리안 대륙의 동부를 계속해서 침공해오는 '악마'라는 사악한 존재들을 물리치는 '항마의 기적'.
그리고 마수들이 시네티 마을로 몰려드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기적은 '항마의 기적이었다.
"…마수들이 현재 시네티 마을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네티 마을이 위기에 처했다는 코니엘 신부의 설명에 성당으로 모인 수습 수녀들은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녀원을 벗어나 간만에 바깥 공기를 쐬며 해방감을 느끼던 와중에 상상치도 못했던 악재와 마주친 것이었으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정을 고려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자매님들은 '성스러운 화살'을 익혀, 마을로 몰려드는 마수를 막아내는 일에 힘을 보태주시기 바랍니다."
"네?"
"마, 마수요?!"
그런 이유로 코니엘 신부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지만,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수습 수녀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럼 빨리 마을을 벗어나 대피를 해야죠!"
"맞아요! 마수라니, 저희가 어떻게 그런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리고 상황을 빠르게 이해한 몇몇은 한마디씩 보태면서 저마다 아우성을 질렀다.
대부분이 저택을 벗어난 경험이 거의 없는 귀족가의 아가씨들인 데다, 자신의 의지로 수녀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반응은 차라리 온건한 편이었다.
"모두 정숙하세요!"
결국 그 상황을 보다 못한 레이첼 버튼 수녀가 나서서 수습 수녀들을 진정시키는 가운데, 코니엘 신부는 이미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자매님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저 또한 잘 압니다. 마수라는 악마들의 농간으로 태어난 불행한 존재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들으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지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코니엘 신부. 그 모습을 보고 마을에서 도망치자는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것이라 여겼는지, 아우성치던 수습 수녀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저 역시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진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코니엘 신부의 대답에 그녀들의 표정은 안도감에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레이첼 자매님. 지금 마을로 몰려오는 마수를 피해서 수녀원까지 수레를 몰 수 있습니까?"
하지만 이어진 코니엘 신부의 질문에 그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녀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시네티 마을로 몰려오고 있을 마수를 피해서 안전하게 수녀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가능합니다. 수레를 최대한 빠르게 몰아도 마수에게 발각되는 순간 금방 따라잡히고 말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쐐기를 박는 레이첼 수녀의 대답.
"……."
성당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가 시네티 마을에 갇혀버린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하지만 길더스텐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수란 흉포한 괴물은 본디 악마들에 의해 생겨난 존재. 신성력이 담긴 공격은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독입니다."
자신의 손 위로 순백색으로 빛나는, 빛으로 이루어진 실체 없는 화살을 만들어 내면서 코니엘 신부는 수습 수녀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매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행복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십시오."
*
"이얏!"
"끄으응…."
성당 바깥의 공터에 모인 수습 수녀들은 연신 기합성 내지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들이 펼친 손 위로 밝게 빛나는 화살이 모습을 드러내며 앞으로 쏘아지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화살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미약하게 빛나는 빛의 덩어리가 뭉쳐지기만 할 뿐, 앞으로 쏘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스러운 화살'을 어설프게나마 사용할 수 있는 자매님은 2할이로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코니엘 신부는 예상보다 많은 수라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니엘 신부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수가 내지르는 괴성만 들어도 몸을 움츠리고 말 아이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이첼 버튼 수녀가 냉정한 평가를 내리며 정말 괜찮겠냐는 걱정을 드러냈지만, 코니엘 신부는 이 정도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미약하고 불안정한 신성력이지만, 마수들에게는 상극인 힘입니다. 이 마을을 지켜내는 데 보탬이 될 겁니다."
"하지만…."
코니엘 신부가 신뢰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수습 수녀를 돌아보며 레이첼 수녀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믿음직한 자매가 에일라 자매라니요."
그녀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는 신뢰였다.
에일라 넬런이 최근 들어 말썽을 일으키는 빈도가 확연하게 줄어들고, 기도와 노동에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또 무언가 커다란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폭풍 직전의 고요라고 여기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레이첼 자매님에게 설명하는 것을 깜빡했군요. 가끔 일부 사제들이 신성력을 오감으로 느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시커'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어째서 아직까지도 교단 내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시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레이첼 수녀였지만, 코니엘 신부의 어조가 몹시도 진지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타인의 신성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는 보이더군요. 에일라 넬런…저 자매님은 결코 평범한 수녀로 살아갈 운명이 아닙니다."
코니엘 신부는 다른 수습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허공을 향해 '성스러운 화살'을 쏘아 내는 에일라 넬런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언했다.
"…차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알고 계신 겁니까?"
"후후후…. 이미 그 문제로 제가 이 외진 마을로 파견되었지요. 여기서 더 외진 곳으로 간다면 아가드의 사제들이 머무는 곳과 가까운 곳이 아니겠습니까."
레이첼 수녀가 코니엘 신부의 신변을 걱정하며 경고했지만, 코니엘 신부의 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저는 '시커'로서가 아닌, 그저 길더스텐님을 모시는 하나의 종으로서 확신합니다. 에일라 자매는 분명 그 어떤 성녀보다도 존경받는 성녀가 될 것입니다."
*
'이상해.'
성당 앞 공터에 모여 '성스러운 화살'을 약식으로 수련하고, 지금은 시네티 마을의 방비를 위해 방책 위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분명 기적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걸 텐데 너무나도 쉽고 익숙해.'
그 의문이란 내가 너무나도 쉽게 '성스러운 화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애초부터 이세계에서 넘어온 망령인 내가 이 세계의 기적의 사용법을 쉽게 익히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고, 길더스텐에 대한 신앙심이라고는 단 한 톨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신의 힘을 빌려 행한다는 기적을 손쉽게 발현한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나로서는 나쁠 것 없는 일이지만.'
기적을 손쉽게 다룬다는 점은 길게 보면 에일라가 성녀 후보로 뽑힐 가능성을 올려줄 것이고, 짧게 보면 지금 시네티 마을을 습격할 마수를 격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어디를 보더라도 내게 이득이 되면 되었지, 결코 손해가 될 일은 아니었다.
"에일라, 괜찮아?"
하지만 내가 생각에 잠긴 것을 고민에 빠진 것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옆에 있던 세이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어왔다.
"조금 피곤할 뿐, 괜찮아요. 그보다 마을 주민들의 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에단 촌장님의 지휘 아래 준비를 서두르고 있어. 엘리처럼 아직 어린아이들은 촌장님의 집으로 모두 대피시켰고."
과연 시네티 마을의 촌장 자리를 노름으로 따낸 것은 아닌지, 에단 촌장의 움직임은 기민하고 효율적이었다.
주민 중에서 차라리 도망가자며 방비책에 훼방을 놓는 어리석은 이가 있을 법도 했지만, 지금 방벽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으로 봐선, 시네티 마을은 착실하게 마수를 막아낼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장정들은 어떻게든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날카롭게 날을 간 농기구를 긴 장대 따위에 묶어서 만든 장병기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으며, 인근의 숲에서 사냥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냥꾼들은 자신의 활과 화살 등을 점검하며 안전하게 마수를 저격할 수 있는 방책의 요소요소에 배치되고 있었다.
가히 노련한 장수의 솜씨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뭐, 도적이나 들짐승 같은 위험을 상대하면서 쌓은 경험이겠지.'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은 생각보다 수많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당장 시네티 마을을 크게 둘러싸고 있는 방책부터가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수다! 마을로 마수가 몰려온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가 될 시간이었다. 방책에 딸린 감시탑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주민이 크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마을 방비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자리를 향해 뛰어갔고, 나와 세이사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세이사, 부디 조심하세요."
"응. 에일라도 조심해!"
늑대의 형상을 한 마수, 곰의 형상을 한 마수, 들소의 형상을 한 마수 등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시네티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침착하자. 어차피 여기서 마수를 막아내지 못하면 죽는 수밖에 없어.'
대충 그 수를 어림잡아보면 40여 마리. 어디서 이렇게 많은 마수가 몰려왔는지를 의심할 정도로 상당한 수를 자랑하는 마수의 규모와 흉흉한 기세에 기가 죽을 것 같았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손을 앞으로 내뻗어 '성스러운 화살'을 준비했다.
"자매님들! 준비하십시오!"
코니엘 신부의 명령에 방책에 배치된 다른 수습 수녀들 역시 어설프게나마 '성스러운 화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쏘십시오!"
시네티 마을 주민이 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무시하며 달려오던 마수 무리가 방책에 거의 닿기 직전, 코니엘 신부는 사격 명령을 내렸고, 수십 발의 빛의 화살이 마을을 향해 달려들던 마수 무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깨앵!"
"쿠엉!"
마수에 '성스러운 화살'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마수 무리를 향해 날아든 빛의 화살에 적중당한 마수들이 날카로운 괴성을 질러댔다.
"자매님들! 다시 준비하십시오!"
첫 사격으로 마수들의 진격이 어느 정도 저지되자 곧바로 다시 내려진 사격 명령.
이번에도 수십 발의 빛의 화살이 마수 무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빛의 화살을 맞은 마수들은 고통과 분노에 가득 찬 괴성을 토해냈다.
'좋아. 잘 먹혀들어 가고 있어.'
신성력이 담긴 기적에 약하다는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빛의 화살에 맞은 마수들은 곰이나 들소 같은 맷집이 좋은 종류를 제외하면 간단하게 무력화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간다면 큰 피해 없이 마을을 방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시네티 마을의 주민과 수습 수녀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
"어머나, 내 아이들이 아프다고 울어대길래 와 봤더니 이게 뭐람?"
'성스러운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마수들의 한가운데에서 몹시 외설적인 옷차림을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머리에는 산양의 뿔과 유사한 뿔이 솟아나 있었으며, 등에는 박쥐의 것과 유사한 날개가 달려있었다.
게다가 하체는 사자의 다리를 그대로 붙여 놓은듯한 괴상한 모습이었고, 살랑대며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는 쉴 새 없이 혀를 날름대는 독사였다.
"…악마!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이냐! 당장 물러나라!"
코니엘 신부가 이를 악물며 '성스러운 화살'을 발사했지만, 악마는 그것을 너무나도 여유롭게 피하면서 비웃음 가득한 도발을 던졌다.
"어머나, 벌써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보이니 이쪽이 부끄러운걸? 오히려 묻고 싶은 건 이쪽이라니까?"
악마는 거기까지 말하며 지금까지 웃음을 띠고 있던 낯빛을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추궁했다.
─왜 이곳에서 지독한 성흔의 냄새가 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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