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Camellia (5)
* *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헛소리로 우리를 우롱하려는 거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레이첼 수녀가 악마의 말에 반박하며 '성스러운 화살'을 날렸지만, 악마는 이번에도 여유롭게 화살을 피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들의 그 잘난 길더스텐님이 내려준다는 성흔이 나오지 않은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단 말이지~"
"크르르르…."
악마가 '성스러운 화살'에 맞아 쓰러졌던 마수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하자, 마수는 마치 '성스러운 화살'에 맞았다는 사실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마수들이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쏘십시오!"
코니엘 신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고 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악마를 직접 마주했다는 사실과 쓰러뜨렸던 마수들이 다시 일어나는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수습 수녀들의 조준은 어설프기 그지없었고, 고작해야 다시 일어난 마수의 가죽을 스쳐 지나가는 것 말고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뭐,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지냈지.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지독한 성흔의 냄새라니…."
그 모습을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제멋대로 지껄이던 악마의 중얼거림이 멎었다.
"당장 싹을 밟아서 없애야겠네~? 아직 각성한 것은 아닌 모양이니 말이야~?"
"크어엉!"
악마의 말에 화답하듯, 거대한 곰의 형상을 지닌 마수들이 크게 포효를 터뜨리며 달려 나왔다.
"마, 막아!"
"미쳤어?! 저 앞발에 맞으면 그대로 으깨진 토마토가 되어버린다고!"
"차, 창을 세워!"
시네티 마을의 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어떻게든 마수의 돌격을 저지하려 방책을 믿고 어설프게 만든 창을 들이대었지만, 마수는 그런 어설픈 방식으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크게 앞발을 휘둘러 방책을 두드렸다.
─콰직
굵직한 통나무로 쌓아 올린 방책이 거짓말처럼 톱밥을 흩뿌리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으아아악!"
그 강렬한 충격에 방책에 기대 용감하게 창을 내밀었던 주민 몇몇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방책 너머로 떨어졌다.
"크르릉! 컹!"
"사, 살려줘! 끄아아악!"
눈앞에 던져진 먹잇감을 가만히 내버려 둘 마수들이 아니었다.
운이 없게도 방책 너머로 떨어진 주민들은 그 즉시 갈가리 찢겨 피에 굶주린 마수들의 주둥이로 들어가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침착하게! 아직 방책이 무너지지는 않았어! 방책을 믿고 시간을 끌게!"
"자매님들! 악마보다는 마수를 노리십시오! 아무리 저 악마가 마수를 회복시킨다 한들, 신성력에 계속해서 노출된 마수는 재가 되어 사라집니다!"
에단 촌장이 방책 바깥으로 떨어진 주민들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 전의가 꺾이려는 주민들을 격려했고, 코니엘 신부 역시 공포에 몸을 떠는 수습 수녀들을 격려하며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지시했다.
'젠장. 이 괴물들은 몇 발이나 맞춰야 완전히 퇴치되는 거야?'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 나는 방책 위에서 쉴 틈 없이 '성스러운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책에 위협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는 곰의 모습을 한 마수를 중점적으로 노려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어머나~ 아직 낮잠을 자기엔 이르지 않니~?"
하지만 그런 노력을 비웃듯, 악마는 마수를 향해 손짓하는 것만으로 화살을 맞고 쓰러진 마수를 다시 멀쩡하게 일으켜 세우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악마가 쓰러지지 않으면 이쪽이 이길 수 없어.'
이해하기 쉽도록 게임의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지금은 공격과 방어를 전담하는 마수를 앞세우는 동시에 '악마'라는 힐러가 계속해서 '성스러운 화살'을 맞고 쓰러진 마수를 회복시키는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힐러를 담당하는 악마를 먼저 잘라내고 마수를 상대해야 하겠지만, 지금 이쪽은 악마를 제압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하암~ 고작 이 정도야?"
간혹 악마를 노리고 날아가는 '성스러운 화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서품을 받은 코니엘 신부나 레이첼 수녀의 화살에 비하면 위력은 형편없었고, 악마는 도발하듯 그런 화살을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벽으로 막아내며 하품하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쿠어엉!"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아!"
그러는 와중, 지금도 격렬하게 흔들리는 방책이 언제까지고 마수의 공격을 버텨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선 저 악마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희망이 없었다.
코니엘 신부는 악마를 노리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애초에 맞추지도 못할 악마를 노려 신성력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마수를 노려 유효타를 최대한 늘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도박이긴 하지만….'
도박.
그래. 지금 내가 시도하려는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신부님. '성스러운 화살'에 가르쳐 주신 것보다 신성력을 더 불어넣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성스러운 화살'의 사용법을 배우던 도중, 한 수습 수녀는 코니엘 신부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자매님. 그 생각은 위험합니다. 신성력은 신의 힘을 빌려오기 위한 매개체의 역할도 하지만, '생명'을 타고난 존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힘이기도 합니다. 만약 무리하게 신성력을 불어넣는다면 위력이야 강해지겠지만, 자매님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코니엘 신부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절대 규정치 이상의 신성력을 불어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성스러운 화살' 같은 기적은 길더스텐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쉽게 사용법을 익힐 수 있지만, 아직 정식으로 서품을 받지 못한 자매님들에게 기적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원칙인 이유 또한 같습니다. 기적의 힘에 매료되어 무분별하게 기적을 행하다가 자매님의 몸에 지닌 신성력이 고갈되어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몸에 지닌 신성력이 모조리 고갈되면 그대로 목숨을 잃는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와 함께.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차피 여기서 도박을 하지 않으면 모두가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정이 붙지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려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내게 우호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사나운 인상에 거리를 두는 그들의 죽음에 가슴아파할 정도로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방책이 무너지고,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이 가장 먼저 마수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책 위에서 '성스러운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다른 수녀들도 마찬가지로 마수의 먹이가 되겠지.
…요컨대, 유일하게 나를 계속해서 돌봐줬던 세이사 밀턴 역시 마수와 악마의 손에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이었다.
"…그럼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잖아요."
헛웃음에 가까운 실소를 머금고서, 나는 다시금 팔을 들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미쳤지. 진짜.'
세이사가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떠올린 것만으로 목숨을 건 도박을 실행할 용기를 얻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어쩌겠는가.
남자란 본디 자신이 반한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마는 어리석은 존재인 것을.
'집중하자.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아직 완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아 붕대를 감은 채 앞으로 내뻗은 팔 위로 새하얀 기운이 뭉치며 날카로운 화살의 형상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이 단계에서 마수를 향해 쏘아내는 것이 '성스러운 화살'의 운용법이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성스러운 화살'에 신성력을 집중했다.
"크윽."
앞으로 내뻗은 오른팔을 타고 격통이 내달렸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무시하며 신성력을 불어넣는 과정을 지속했다.
'이건 화살이 아니라 차라리 창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네.'
온몸에서 기운이 쭉쭉 빠져나가며 화살로 흘러 들어갔고, 신성력을 최대한 머금은 화살은 그 부피를 불리며 '창'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크기까지 성장했다.
"그래도 쓸만한 녀석이 하나 있긴 했나 보네~? 엄~청 무리하는 것 같지만~?"
다행이라면 너무나도 눈에 띄는 빛의 창을 보고도 악마가 도망치려는 기색 없이 비웃음을 던지며 도발을 계속했다는 점이었다.
"…쿨럭."
기침 소리와 함께 내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리하게 신성력을 끌어내 만들어낸 이 빛의 창은 말 그대로 내 목숨을 쥐어짜서 만들어낸 최후의 한 발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악마는 그것을 막아내는 것으로 완전히 이쪽의 전의를 꺾을 생각인 것 같았다.
"에일라 자매님! 멈추십시오!"
코니엘 신부 역시 내 무모한 행동에 기겁하며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먹먹해진 내 귀에 그 만류는 들어오지 못했다.
"…가세요!"
마침내 빛의 창이 악마를 향해 쏘아졌다.
정확하게 악마를 향해 날아가는 빛의 창. 그 속도는 가히 하늘에서 내려꽂히는 벼락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위험했네~ 이건 내가 막아도 아무런 피해도 없이 끝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어쩐다~? 피해버렸는걸~?"
하지만 악마는 그 속도조차도 뛰어넘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들었던 창을 피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큭!"
몸을 지탱할 힘마저 끌어다 쓴 탓에 절로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내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
"이젠 틀렸어…."
최후의 희망이라 여겼던 내 공격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시네티 마을의 주민과 수녀를 불문하고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자, 그럼 이제…크악!"
사람들이 절망에 빠지는 그 모습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던 악마는 기세를 몰아 마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명령이 마수들에게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별안간 악마의 발밑으로 솟아오른 빛의 창이 그대로 악마를 발밑에서부터 꿰뚫어버렸으니까.
"…멍청하네요. 바닥을 조심했어야죠."
숨겨두었던 비장의 수가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부터 내가 준비했던 창은 2개였다.
정식으로 서품까지 받은 신부인 코니엘 신부의 화살조차 재빠른 움직임으로 피하는 악마를 내가 무슨 재주로 맞히겠는가?
첫 공격으로 시선을 끌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후속타로 결정적인 일격을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 때문에 던져서 공격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창은 딱히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에 조작법만 응용한다면 바닥을 뚫고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시도가 가능했던 도박이었다.
"너, 이…자식…."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공격을 허용하고 만 악마가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발밑에서부터 악마를 꿰뚫은 창은 길더스텐의 권능을 발휘하며 악마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지금입니다! 자매님들 모두 악마를 향해 모두 화살을 집중해 주십시오!"
내 일격은 악마에게 큰 피해를 줬지만, 악마를 완전하게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악마가 창에 꿰뚫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게 무력화시켰고, 코니엘 신부는 눈치 빠르게 그 사실을 잡아내어 '성스러운 화살'을 악마에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
"끄아아아악! 감히 네놈들 따위가아아아!"
말 그대로 '고정된 과녁'이 되어버린 악마의 몸에 빛의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들었고, 악마는 분노에 가득 찬 비명을 연신 질러대며 악을 썼지만, 계속해서 날아드는 빛의 화살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재가 되어 그 모습을 감췄다.
마수를 조직적으로 통솔하던 악마가 사라지자, 마수는 다시금 제 난폭한 본성대로 날뛰는 괴물로 돌아갔고, 악마가 나타나기 이전처럼 '성스러운 화살'을 맞으며 지리멸렬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겼네."
그 모습을 점차 흐릿해지는 시야로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악마의 등장이라는 끔찍한 악재가 겹쳤음에도 시네티 마을을 지켜냈다. 그 사실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에일라!"
저 멀리서 에일라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세이사의 모습이 보였지만, 이미 이전의 일격을 날리느라 온몸의 신성력을 소진한 나는 힘겹게 세이사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려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