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13화 (13/80)

〈 13화 〉 Camellia (6)

* * *

"아…."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돌아온 것은 아니군.'

혹시나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현실은 야속하게도 붕대로 감싸진 에일라의 가냘픈 손을 보여주는 것으로 내가 아직도 에일라의 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에일라! 일어났구나!"

"…세이사."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의 상황을 확인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기대 쓰러져있던 세이사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더니 냅다 나를 껴안았다.

"…숨 막혀요. 세이사."

워낙 세게 껴안은 탓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나는 세이사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에일라의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세이사를 억지로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절하기 전에 신성력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탓도 있겠지만, 에일라의 몸은 기본적으로 허약한 체질이었다.

따라서 에일라보다 먼저 수녀원 생활을 시작하고, 수녀원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왔던 세이사의 근력을 이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미안해."

내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눈치챈 세이사가 사과하면서 나를 꽉 끌어안았던 것을 풀자, 비로소 나는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시네티 마을에 이런 곳은 없을 텐데요."

나는 세이사에게 질문하면서 다시금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가구와 푹신한 침대, 방을 장식하고 있는 무척이나 값비싸 보이는 그림과 장식물까지.

시네티 마을에서 가장 형편이 좋을 촌장의 집에서도 이런 화려한 집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지금 내가 누워있던 곳은 시네티 마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응. 여긴 영주님의 성이야."

"…뭐라고요?"

세이사의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에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시네티 마을에서 악마와 마수를 막아내다 탈진해서 쓰러진 내가 어째서 시네티 마을과도 제법 거리가 있다던 영주가 머무르는 도시, 그것도 영주의 성에서 정신을 차린단 말인가.

"에일라가 기절한 뒤에 영주님이 보낸 병사들이 도착했거든. 시네티 마을에서 치료하기엔 어렵다고 판단해서 영주님이 직접 에일라를 데려오신 거야."

"…그렇군요."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치료를 위해서라지만, 굳이 영주가 자신의 성까지 나를 데려와서 치료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시네티 마을에서의 일을 물어볼 생각인가?'

제아무리 벽지라고 하더라도, 영주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시네티 마을을 습격한 마수의 움직임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마을을 습격한 마수를 물리치는 일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까지 했으니 영주의 관심을 끌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세이사, 그렇다면…."

"정신을 차린 모양이로군."

내가 세이사에게 무어라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 문이 열리면서 중년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기운이 도는 머리카락과 수염은 지저분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손질하여 소탈한 인상을 주었지만,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은 몹시도 날카로운 것이 그가 절대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영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에일라의 기억에 남아있던 귀족의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남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수도 리하트의 예법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로군. 그래. 시네티 마을을 습격한 악마와 마수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녀가 자네라고 들었네만, 그 말이 맞는가?"

"솔름 백작님.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사람입니다. 곧바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영주를 따라 들어온, 깔끔하게 머리와 수염을 정돈하여 몹시 깐깐해 보이는 인상을 풍기는 남성이 대뜸 나를 추켜세우며 시네티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사실이냐며 물어보는 백작의 태도를 지적하자, '솔름 백작'으로 불린 영주는 머쓱한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이래서야 누가 이 땅의 주인인지 모르겠군."

"그야 당연히 이 솔름의 백작이신 헬리아스 님이시지요. 고작 저 같은 자작 나부랭이가 어찌 그런 역심을 품겠습니까?"

백작이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내뱉었음에도 남성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응수하자, 백작은 다시금 머리를 긁고서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빅터, 자네는 너무 속이 좁아."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일을 벌이시는 어느 어리석은 분을 주인으로 둔 탓이지요."

"으…. 알겠네. 거기까지만 하게나. 내가 졌네. 졌어."

결국, 백작은 남성의 독설에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항복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무척 사이가 좋으신 분들인가 봐."

"…그러게요."

눈앞의 두 사람이 한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과 그 영지의 실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자작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유치한 촌극을 벌이는 것을 바라보며, 세이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상황을 포장했다.

"…흠흠, 미안하네. 자네를 돌봐준 친구에겐 이미 소개했네만, 자네는 모를 테니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이 솔름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 헬리아스라고 하네."

나와 세이사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백작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다시금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했으나, 이미 첫인상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태에서 그것은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 이 깐깐한 친구는 내 밑에서 여러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고 있는 로볼린 자작이라네."

"빅터 로볼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녀님."

저쪽에서 먼저 정식으로 인사를 했으니 이번엔 내가 저쪽의 인사에 대답할 차례였다.

"반갑습니다. 에일라 넬런입니다."

"넬런이라…. 들어본 적이 있는 가문이군. 혹시 넬런 백작가의 영애인가?"

역시 벽지에 박혀 놀고만 있는 귀족은 아니었는지, 넬런이라는 성을 듣자마자 예상했던 질문이 날아들었다.

"…지금 저는 성직의 길을 걷는 몸입니다. 따라서 출가하기 이전의 인연이 저를 구속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가문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괜히 나를 통해 연줄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버리라는 말을 에둘러 말하자, 백작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듣던 것과는 다르군. 수도의 샌님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것과는 달라."

순간, 주위를 둘러싼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갑작스럽게 숨 쉬는 것이 버거워지고, 절로 호흡이 가빠졌다.

'이런 미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살기를 내뿜는다고?'

마치 포식자를 눈앞에 둔 피식자가 된 것 같은 느낌.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주위를 둘러보니 세이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갑자기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고, 로볼린 자작은 또 시작이냐는 책망이 담긴 눈빛으로 솔름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뻣뻣하게 굳어가던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이 살기를 내게 내뿜은 범인인 솔름 백작을 쏘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백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향해 뿜어내던 살기를 거두었다.

"…처음 본 사람을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것은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솔름 백작님."

"이런, 실례했네. 유망한 인재를 보면 그 그릇을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말일세."

사과를 건넸지만, 전혀 미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솔름 백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세계에서 내가 만나는 인간들은 왜 다 이 모양이냐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세이사 밀턴'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내가 에일라의 몸에 빙의하게 된 이후로 만난 사람은 나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면 무시하거나, 그 그릇을 가늠해 보겠다면서 심술에 가까운 시험을 내리는 리피샤 수녀원장이나 지금 눈앞의 솔름 백작 같은 인간밖에 없었다.

"아무튼, 넬런 영애…. 아니, 에일라 수녀를 굳이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네. 첫 번째는 시네티 마을을 습격한 악마를 물리친 것이 에일라 수녀의 공이 컸던 것이 이유이고…"

"두 번째는 이번에 시네티 마을로 마수를 끌어들인 범인을 심문하는 도중에 범인이 에일라 수녀의 이름을 언급한 탓이지요."

솔름 백작의 말을 이어받은 로볼린 자작의 말에 세이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일라가 그럴 리가 없어요! 심문을 받던 범인이 아무렇게나 말한 이름이겠죠!"

"진정하시지요. 저는 에일라 수녀가 범인과 공모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나를 변호하는 세이사의 말에 로볼린 자작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 로볼린 자작의 말이 옳네. 오히려 그 반대지. 범인이 심문에서 털어놓은 것은 모든 것이 에일라 수녀의 탓이라는 헛소리였으니까."

"…솔름 백작님.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설마 그 잡힌 범인이라는 것이…."

솔름 백작의 말에서 무언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나는 솔름 백작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티아 이글라스 수녀입니까?"

"그렇다네. 역시 에일라 수녀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모양이로군. 티아 이글라스 수녀가 청연초가 섞여 들어간 주머니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지."

마치 정답을 맞힌 학생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선생 같은 얼굴을 한 솔름 백작이 내 질문에 대답했다.

"자, 어쩌겠나? 에일라 수녀가 속한 수녀원이 여러모로 복잡한 과거를 지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능구렁이 같은 인간 같으니.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자네와 껄끄러운 관계인 티아 이글라스를 처분할 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솔름 백작.

여기서 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를 통해 나를 가늠해볼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황위에 야심을 품은 영주였나?'

그가 나를 이렇게 저울질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말고는 없었다.

다음 황제를 뽑을 때 행사될 성녀의 한 표.

요컨대, 지금 솔름 백작은 시네티 마을에서의 일로 성녀가 될 수 있을 만한 잠재력을 보여준 내가 차기 성녀로 뽑힐 수 있을 만한 인물인지를 가늠해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성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수녀원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성녀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다고 생각하던 나였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지.'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사실을 당당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겨우 붙잡은 반격의 기회를 어째서 그렇게 날려버린단 말인가. 차라리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수녀원에서 나를 계속해서 견제해왔던 세력을 일소할 수도 있을 터인데.

"티아 이글라스 자매는 아마 이번 일과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머리를 굴려본 결과,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지금 나는 티아 이글라스를 변호해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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