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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14화 (14/80)

〈 14화 〉 Camellia (7)

* * *

해가 중천에 뜬 한낮임에도 따스한 햇볕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성의 지하는 어둡고 축축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는 식료품 창고로 쓰는 곳인가 보네.'

지하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크통과 여러 식료품이 가득 담긴 상자들을 보면서 그런 감상을 품으며, 나는 묵묵히 나를 안내하는 병사의 뒤를 따랐다.

하긴, 징역형이라는 법률이 존재하는 시대상도 아니니, 인간과의 전쟁에서 붙잡은 죄수는 몸값을 뜯어낼 훌륭한 인질이니 성안에서 제법 괜찮은 대우를 해주다 몸값을 받고 돌려보내 주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영주가 아까운 유지비를 감수해가며 순수하게 감금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를 성에 둘 이유가 없었다.

사람을 고문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가학적인 성격을 타고난 정신 나간 영주가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여기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아무튼, 티아 이글라스가 구금된 곳은 지하실의 구석에 위치한 작은 쪽방이었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니야…. 내가 저지른 게 아니라고…."

나를 안내한 병사와 함께 문 앞에 서니, 인기척을 느끼고서는 문을 박박 긁어대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티아 이글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아 이글라스 영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되었네요. 이렇게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니 말이에요."

"……."

한참을 문 앞에서 티아 이글라스의 호소를 들어주던 내가 입을 열자, 티아 이글라스가 지금까지 했던 간절한 호소가 뚝 멎었다.

"에일라…넬런…!"

명백히 에일라 넬런에 대한 증오와 적의가 담긴 티아 이글라스의 목소리.

담력이 약한 사람이었다면 그 흉흉한 기색에 기가 단박에 죽었을 기세가 문 너머로 느껴졌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문 너머를 꿰뚫어 보듯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글라스 백작가에서는 자신을 변호해줄 은인을 적의로 대하는 법도가 있는 모양이로군요. 참으로 흥미로운 법도에요."

"뭐, 뭐라고? 거짓말하지 마! 내가 그런다고 너한테 입을 열 것 같아? 나를 살살 구슬려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생각이겠지!"

예상대로 티아 이글라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하긴 얼마 전까지도 무척이나 험악한 사이였던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변호를 해줬다고 하는 말을 덥석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뭐, 그렇게 대답하리라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그러면 그렇지! 너 같이 성격 더러운 인간이 그럴 리가 없지!"

"…사람 말은 끝까지 듣는 것이 예절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요? 티아 이글라스 영애?"

내 말을 잘라먹고 제멋대로 납득하는 티아 이글라스에게 쏘아붙이며, 나는 옆에서 이 말다툼을 무표정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병사에게 문을 열라는 손짓을 했다.

'병사로 위장하긴 했지만, 솔름 백작의 신임을 받는 기사인 모양이군.'

보통 병사라면 이런 유치해 보이는 말다툼에 웃음을 참지 못할 법도 했지만, 마치 목석처럼 꼿꼿한 자세로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는 병사의 군기 잡힌 모습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마 솔름 백작이 거느린 기사 하나를 병사로 위장시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정말이지 수더분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철저한 인간이었다.

"굳이 문이라는 방해물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겠죠."

"어, 어어?"

쪽방의 문이 열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티아 이글라스 쪽이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계속 도발할 것이라는 티아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준 탓이리라.

"뭐, 저도 당신이 좋아서 당신을 변호하기로 한 것은 아니에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그대로 시네티 마을에 마수를 불러들인 범인으로 죗값을 치르게 두고 싶었죠. 하지만…."

"……."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여전히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는 티아 이글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언했다.

"이번 일은 악마가 연관된 일이니까요. 악마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상, 아마 이단 심문소에서도 이 사건을 가만히 좌시하지는 않을 거고요."

"그, 그런…."

'이단 심문소'라는 말을 들은 티아 이글라스의 눈동자에 '공포'라는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직접 악마와의 전선에서 나서 맞서 싸우는 성기사단이 교단의 외부에 존재하는 적을 겨누는 창이라면, 이단 심문소는 교단의 내부에 존재하는 적을 겨누는 창이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 저지른 일이 있어 찔리는 구석이 많은 티아 이글라스였다.

만약 그녀가 심문의 강도가 높다는 악명이 자자한 이단 심문까지 받게 된다면 그것은 티아 이글라스라는 인물이 완전히 끝장난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자, 선택하세요. 이단 심문이 걸린 일이 되어버리면서 니어나 브렌다는 당신을 도와줄 수 없게 되었어요. 제게 협력하면서 자신은 살아남는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녀들은 티아 이글라스를 버림패로 쓸 예정이었겠지만, 갑작스럽게 악마라는 변수가 추가되면서 그녀들은 더더욱 이 사건의 전말을 숨겨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티아 이글라스처럼 이단 심문관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우, 웃기지 마! 네가 뭔데 날 도와줄 수 있다는 건데?! 네가 날 변호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차라리 네 이름을 말해서 다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낫겠어!"

이대로 기세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판단때문이었을까, 티아 이글라스는 오히려 심문에서 에일라의 이름을 말하겠다며 역으로 협박을 해왔다.

"그런가요?"

물론 무척이나 가소로운 협박에 불과했다.

"이미 솔름 백작님과 코니엘 신부님이 제가 시네티 마을에서 한 일을 증언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그런 협박은 통하지 않아요."

게다가 여차하면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까지 내가 마수와 악마를 물리쳤다는 사실을 증언해 줄 수 있었다. 이미 신빙성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티아의 그런 협박이 내게 통할 리가 없었다.

"뭐, 그러시다면 더 권유하지는 않겠어요. 이단 심문소에서 파견될 이단 심문관님과 즐거운 면담이 되시길."

"마, 말할게! 다 말할 테니까! 오스라드! 아이셀 오스라드가 우리를 수녀원에서 꺼내준다면서 너를 감시하라는 거래를 제안했어!"

마침내 티아 이글라스가 굴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항복선언을 했다.

더불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흑막의 정체도 마침내 알 수 있었다.

"오스라드 상단이라…."

나는 시네티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획책한 흑막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에일라의 기억을 뒤졌다.

'아이셀 오스라드.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인데.'

내가 에일라의 몸에 빙의하면서 에일라의 기억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본래의 에일라가 기억하고 있던 것이 전부였다.

요컨대, 내가 에일라 넬런의 어린 시절처럼 무척이나 희미해진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 봤자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보이지 않거나, 아주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을 엿보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었다.

'에일라의 실체를 밝히며 몰아세운 남자 중에 그런 이름은 없었지.'

에일라가 몰락하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연회장에서의 고발.

그것은 아주 강렬한 기억이었는지, 에일라의 기억에서도 아주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이셀 오스라드'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성기사단에 소속된 성기사 티롤프, 수도에서 명망 높은 위클라인 백작가의 차남 아덴츠, 어린 나이부터 황실 호위대로 들어간 것으로 유명한 기사 필라스까지.

에일라 넬런의 집요한 괴롭힘에 '셀린 엘리어드'영애가 고통받고 있다며 정식으로 에일라를 고발했던 것은 그 세 명의 남자가 전부였다.

'암약하는 부류의 인물인가.'

아마 에일라를 고발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는 일에는 그가 물밑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 덜미가 잡힌 것은 내가 마수를 물리칠 방법을 코니엘 신부에게 제시하고 악마라는 변수가 끼어들 것을 예상하지 못한 탓이겠지.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군.'

내가 에일라이면서 에일라가 아니었기에, 마수들이 몰려든 것에 변덕스러운 악마가 흥미를 느끼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정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좋을까.

*

"…아이셀 오스라드라는 인물이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증언을 받아냈습니다."

"오스라드…. 오스라드 상단이라…. 사랑에 눈이 먼 천둥벌거숭이가 사고를 쳤군."

몇 번이고 내가 티아 이글라스를 변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티아 이글라스를 뒤로하고, 솔름 백작에게 찾아가 일의 전말을 밝히니 백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뭐, 그래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닙니까. 경쟁 상단에 원료를 납품하는 시네티 마을을 복수와 함께 지워버린다는 생각까지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로볼린 자작 역시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그래도 일석이조를 노렸던 아이셀의 계획을 비꼬았다.

"자,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의 전말에 조금의 과장을 보탠다면 에일라 수녀를 위협해온 숙적을 제거할 기회가 아닌가?"

"어차피 악마가 나타난 이상 이단 심문소 역시 움직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넘기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애초부터 청연초를 태워 주변의 마수를 마을로 불러모으는 짓을 저지른 것부터 이단 심문관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꼬투리였다.

아이셀 오스라드가 얼마나 대단한 수완을 가진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단 심문소의 목표가 된 이상 이쪽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될 것은 자명했다.

더군다나 이번의 마수 습격으로 시네티 마을이 초토화되었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았을 오스라드 상단의 경쟁 상단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약점을 드러낸 경쟁자의 목을 물어뜯기에 여념이 없겠지.

'그 사이에 니어 파른헴과 브렌다 발렌과 결착을 지으면 수녀원 내에서의 문제는 해결된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골치를 썩이던 문제가 오히려 악마 출현이라는 변수로 인해 한순간에 돌파구를 찾은 셈이었다.

"축하하네. 그동안 에일라 수녀를 괴롭혀 왔던 문제에서 비로소 해방되겠군."

"…솔름 백작님 덕분입니다."

축하의 인사를 건네오는 백작의 말에 겸양하는 대답을 돌려주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내가 활약해서 생겨난 기회이지만, 그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눈앞의 이 야심 넘치는 백작이었다.

'악마 출현'이라는 골치 아픈 사건을 숨기는 것으로 이단 심문관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을 자신의 영지에 들이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허락해준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어디까지나 솔름 백작은 '에일라 넬런'이라는, 성녀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인물의 가치를 보고 '투자'한 셈이니 그렇게 빚을 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럼 에일라 수녀도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군. 안 그래도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이 에일라 수녀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나를 배웅하며 문득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솔름 백작의 모습에 일말의 불안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지만,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이 마을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는 활약을 펼친 내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

"…세이사."

"하하하…. 왜 그래?"

솔름 백작이 직접 다스리는 도시를 벗어나 다시 도착한 시네티 마을.

그곳에 도착한 뒤, 나는 세이사를 향해 진심으로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왜 제가 시네티 마을에서 뽑는 '올해의 꽃'으로 뽑힌 거죠?"

그 이유는 어째선지 내가 시네티 마을에서 벌이는 축제의 마지막 날에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뽑는 '올해의 꽃'으로 뽑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행사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참가 신청을 한 기억도 없었기에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어떻게 넘어가야 좋을지를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주민들의 손에 이끌려 꽃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축제 의상을 입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게…. 에일라는 무척 예쁘니까 후보로 추천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그래요. 세이사는 그런 생각이었겠죠."

그래. 세이사도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원래는 시네티 마을 내에서 평판과 인기가 좋은 미녀를 뽑는 행사였으니 마을 주민도 아닌 내가 뽑힐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시네티 마을의 주민들 역시 마을을 습격한 악마와 마수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에일라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표를 던졌을 것이다.

요컨대, 이번에 에일라가 '올해의 꽃'으로 뽑힌 것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지, 딱히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런 꼴로 남들 앞에 나서는 게 달갑지는 않네요."

문제라면, 에일라의 몸에 눌러앉은, '남성'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내 영혼일 것이다.

예쁜 옷을 입기보다는 입기 편한 옷을 선호하고, 자신을 꾸미기보다는 다른 일에 돈을 쓰는 것을 선호하는 땀냄새 나는 영혼이 들어선 몸에 온갖 꽃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축제의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거부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에일라는 엄청 예쁜걸!"

"…그게 문제라는 거에요."

물론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에일라는 분명 미인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일라의 푸른 머리칼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맑고 청량한 느낌을 주며,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인지 그다지 볼륨감이 없는 가슴은 넘어가더라도, 에일라의 몸은 전체적인 밸런스 역시 훌륭한 편이다.

거기다 화려한 축제 의상이 더해지면서 지금 에일라의 외양은 마치 동화 속의 공주님 같은 모습이 연상될 정도였다.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인 게 문제지.'

만약 진짜 에일라였다면 수수한 수녀복만 입다가 오랜만에 입는 화려한 옷에 만족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인 내가 느끼기에는 그저 부끄러울 뿐인, 광대의 옷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겠죠. 축제를 마무리하는 행사의 주인이 되어야 할 제가 여기서 계속 나가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을. 결국 나는 '잠깐의 부끄러움을 인내하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응, 다들 에일라의 모습을 보고 놀랄 거야."

한결같은 웃음을 지으며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는 세이사. 나 역시 그런 세이사를 향해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자, 그럼 나가보죠. 어서 행사가 끝나야 같이 수녀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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