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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15화 (15/80)

〈 15화 〉 성흔

* * *

"믿을 수 없군.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과장된 소문일 수도 있네. 신중히 판단하세."

키니아 제국의 수도, 리아트.

황제가 거주하는 황성에 버금가는 웅장함을 자랑하는 대성당에서는 황성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암투가 한창이었다.

"에일라 넬런이라. 비밀리에 다른 가문의 영애를 괴롭혔던 악행이 드러나 넬런 백작가에서 쫓겨난 영애가 아닌가. 그런 이에게 신의 은총이 내리다니."

"차라리 괜찮지 않은가? 그런 음흉한 영애라면 넬런 백작가의 비호도 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도 잘 이해하고 있을 테고, 우리들의 편으로 끌어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이 신의 뜻에서 멀어지는 것은 신이 인간에서 멀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신과 멀어졌기 때문인가.

웅장한 규모를 지닌 만큼 거대한 대성당의 그림자 속에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신실한 사제들이 나눌 대화가 아니었으나, 씁쓸하게도 이것이 지금 교단이 처한 현실이었다.

황권에 우위를 내준 이후로 점점 줄어드는 교세, 세대를 이어 내려갈수록 이유를 알 수 없이 점점 줄어들어 가는 사제들의 신성력.

이것조차 감내해야 할 시련이라며 신실한 믿음을 지닐 수 있는 사제는 정말이지 극소수에 불과하리라.

더군다나 교단이 절대적인 발언권을 지닌 악마와의 성전조차 최근 들어 드물어진 악마의 침략으로 인해 막대한 예산이 소모되는 성기사단의 규모를 줄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었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집에서 집안 식구 간의 아귀다툼이 심해지는 것은 필연.

현재 길더스텐을 모시는 교단의 세력은 수도회를 기준으로 하는 파벌로 나뉘어 다투면서도, 어떻게든 점점 키니아 제국에서 기울어져 가는 교세를 회복하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악마를 일격에 꿰뚫어 쓰러뜨릴 정도로 막대한 신성력을 다루는 성녀 후보일세. 절대 다른 수도회에 내어줄 수 없는 인재일세."

"맞는 말일세. 게다가 에일라 자매는 아직 성년조차 되지 못한 나이가 아닌가. 아직 물정에 어두울 때니 미리 포섭해 둬야 하네."

당연하게도 대성당에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능구렁이와도 같은 각 수도회의 수뇌부는 새로이 나타난 이 탐스러운 과실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소문에는 과장이라는 조미료가 첨가되는 법이었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막대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에일라 넬런을 자신들의 편으로 포섭해 두는 것은 결코 실패할 리가 없는 투자였다.

"하지만 이미 이단 심문소에서 시네티 마을로 이단 심문관을 파견하지 않았나?"

"그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마르셀 이단 심문관은 어느 수도회에도 소속되지 않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이단 심문관이니 말일세."

"그렇다면 에일라 자매가 속한 수녀원의 수녀원장인 리피샤 브림블과 대화를 나눠봐야겠군. 다른 수도회보다 손을 쓰는 것이 늦지 않게 서두르세."

그렇게 에일라 넬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습한 교단 내 권력다툼의 체스 말로 선택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단순한 폰(Pawn)에 지나지 않을 것인지, 강력한 퀸(Queen)이 될 것인지는 아직 그 누구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봄이 다가옴에 따라 다시 풀들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기 시작한 평원을 한 무리의 말을 탄 인원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두르고 있는 붉은 빛이 선명한 제복에는 하얀색의 십자가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으며, 그들은 마치 전투에 나서는 기사와 다를 것 없이 날카롭게 번쩍이는 병장기를 하나씩 손에 쥐고 있었다.

이단 심문관.

그들이 두른 붉은 제복은 희생자들의 피가 튀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무시무시한 길더스텐의 집행자들인 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흐음…."

그리고 지금 그들을 이끄는 이단 심문관의 지휘관인 마르셀은 말을 몰면서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마르셀 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십니까?"

말을 몰아 이동하는 와중에도 계속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상관의 모습에 의문을 느꼈는지, 마르셀을 따르는 종자인 로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르셀에게 질문했다.

"로나 자매. 자매는 고작해야 수습 수녀에 불과한 자매가 마수를 거느리는 악마를 물리쳤다는 말을 믿을 수 있나?"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마르셀이 역으로 물어보자, 로나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레졌다.

아직 성년을 넘기지 못한 소녀의 천진한 모습이 묻어나는 그 모습에 마르셀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악마가 나타났는지를 섣부르게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마르셀에게 임무가 떨어진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솔름 영지의 시네티 마을에 악마가 마수를 이끌고 나타났지만, 마침 마을에 머무르고 있던 수녀들의 지원으로 악마를 물리쳤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어왔으니 그 진위를 파악하라는 임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아무리 약한 악마라 할지라도 마수를 통솔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악마라면….'

악마.

그 빌어먹을 존재와의 전쟁은 수백 년을 걸쳐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싸움의 끝은 언제나 요원했다.

정식으로 성기사로 임명되어 첫 출진에 나섰던 마르셀의 동료들은 그동안 힘들여 훈련했던 성과를 빛내 보이기도 전에 악마의 손에 참혹하게 쓰러졌고, 마르셀 역시 왼눈에 깊은 상처를 입어 시력을 잃었다.

그만큼 악마라는 존재는 강력한 존재였다. 철저하게 악마를 쓰러뜨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육성한 성기사들조차 아차 하는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이 일상일 정도로.

그런 마르셀에게, 성기사가 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해온 그들조차 장난치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죽여버리는 악마를, 심지어 아직 정식 수녀도 되지 못한 수습 수녀가 쓰러뜨렸다는 소문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마르셀 님. 그렇다면 악마가 나타났다는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글쎄. 그것보다는 마수 중에 유난히 강한 개체가 있어서 그것을 악마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로나의 질문에 답하며, 마르셀은 저 멀리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 도착한 모양이군. 솔름의 성벽이 저기 보이는 것을 보니."

솔름 영지의 시네티 마을에서 벌어진, 악마와 마수의 습격 사건을 상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적힌 이단 심문소의 명령서를 품속에서 만지작거리며 마르셀은 자신이 몰던 말에 박차를 가했다.

"서두르도록 하지. 모두 속력을 내라!"

"예!"

종자 로나를 비롯한 마르셀 휘하의 부하들이 앞서나가는 마르셀의 뒤를 쫓아 속력을 올리자,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던 솔름의 성벽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가며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아."

"괜찮아? 시네티 마을에서 무리해서 상처가 덧난 건 아니지?"

시네티 마을의 사건을 끝내고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온 지 보름 가까이 되는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또다시 세이사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시네티 마을에서 무리한 탓에 상처가 덧나기라도 했나?'

무리하게 신성력을 끌어다 쓴 탓에 탈진한 것은 별다른 문제 없이 회복했지만, 에일라의 오른팔에 남아있던, 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문제였다.

마치 상처가 자신의 원래 모습을 기억하기라도 하는지 팔의 상처가 아물기 전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

"다른 수녀님에게 말씀을 드려볼까? 이런 손으로 일하다가는 상처가 더 덧날 수도 있을 거야."

"아뇨.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세이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과에서 빠져 요양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시네티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같이 시네티 마을을 방문했던 수습 수녀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며 수녀원 내부에서 에일라를 보는 시선이 상당히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우호적으로 돌아섰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잘난 능력을 하나 가졌다고 거만하게 군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나는 수녀원의 일과에 더욱 열심히 참여해야 했으니 말이다.

'뭐 그런 여론을 만드는 것이 누구인지는 뻔하지.'

니어 파른헴과 브렌다 발렌.

그녀들은 지금 몹시 곤란한 상황에 부닥쳐있었다.

티아 이글라스와의 연결고리는 이미 꼬리를 빼서 엮여 들어갈 여지를 차단했다지만, 이대로라면 다른 수습 수녀들을 선동하여 만들어낸 에일라 넬런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뒤집힐 상황이니 이런 견제를 날리는 것이 분명했다.

'조만간 상황이 바뀌겠지만.'

이미 티아 이글라스를 회유하는 것으로 포석을 깔아두었다.

조만간 이단 심문관이 솔름 백작의 영지를 방문할 것이고, 시네티 마을에 고의로 마수와 악마를 끌어들였다는 혐의가 걸린 티아 이글라스를 내가 변호하면서 진짜 범인으로 지목된 아이셀 오스라드는 강도 높은 이단심문의 대상이 되어 그녀들에 대한 후원은 끊어질 것이다.

'이단 심문소도 결국은 사람이 운영하는 기관이야. 아무것도 얻어낼 게 없는 수습 수녀를 건드리는 것보다는 뜯어낼 것이 많은 오스라드 상단을 건드리는 쪽을 선택하겠지.'

만약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신실한 이단 심문관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경전을 꺼내 들어 내 머리를 내려치며 '이 불경한 자가!'를 외칠 테지만, 지금 방에 있는 사람은 에일라와 세이사 뿐이니 그럴 일은 없었다.

'유럽에서도 그랬는데 카르실리안이라고 다를까.'

역사에서 마녀사냥이 부유한 이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갈취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경우는 몹시도 흔했다.

하물며 이곳 카르실리안 대륙은 '악마'라는 눈에 보이는 악의 무리의 위협을 받는 상태. 섣불리 이단심문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이셀 오스라드가 얼마나 수완이 좋은지는 몰라도 아마 한동안 애를 먹겠지.

"에일라 자매."

한동안 고생을 하면서 잔뜩 일그러져있을 아이셀 오스라드의 얼굴을 상상하며 고소해 하고 있던 와중, 레이첼 수녀가 에일라를 불렀다.

그녀 역시 시네티 마을에서 내가 한 일을 목격한 목격자 중의 하나였기에 에일라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달라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전에는 에일라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정도라면, 지금은 잠시 고민은 해볼 정도라고나 할까.

뭐, 그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신뢰가 아예 없는 것과 신뢰가 적은 것은 분명 크나큰 차이니까.

"네. 레이첼 수녀님. 무슨 일이신가요?"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이 에일라 자매에게 소환장을 보냈습니다. 중요 참고인으로 출석하라는 내용으로요."

"……."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네티 마을에서 코니엘 신부가 말했듯, 수습 수녀가 짧은 시간 동안 기적을 배워서 사용한다고 해서 악마라는 강력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단심문관 역시 에일라라는 있을 수 없는 존재에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저는 솔름 성으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시네티 마을로?"

"…시네티 마을로 와 달라는 요청입니다. 에일라 자매."

내 태연한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레이첼 수녀는 이내 질렸다는 표정이 되었다.

내가 시네티 마을에서 모두 기적을 배워 마수의 습격에 대항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의 표정과 같은 표정이었다.

"이미 수녀원장님도 허락하신 일이시겠죠. 그럼 저도 어쩔 수 없죠. 레이첼 수녀님이 인솔하시는 건가요?"

"……."

레이첼 수녀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나도 태연한 내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이미 죽을 뻔한 일까지 겪었는데 고작 이단 심문관을 만나는 일쯤이야.'

시네티 마을에서 신성력을 있는 대로 뽑아서 만들어낸 창을 던질 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말 그대로 내장이 통째로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 끔찍한 경험까지 버텨냈는데 고작해야 이단 심문관의 조사가 두려울 리가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이미 수많은 증인과 솔름 백작이라는 뒷배까지 두고 있으니, 아무리 이단 심문관이 억지를 부리려 해도 내가 목숨을 걸고 시네티 마을을 구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세이사, 금방 돌아올테니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렇기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세이사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레이첼 수녀를 따라 시네티 마을로 향하는 짐마차에 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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