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17화 (17/80)

〈 17화 〉 성흔 (3)

* * *

'왜 네가 거기서 나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시네티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엘리를 보며 든 생각이었다.

"…엘리. 오랜만이네요."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을 차마 내칠 수 없어 인사를 건넸지만, 내 표정은 이미 미간이 잔뜩 구긴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네! 에일라 언니도 여전하시네요!"

하지만 이 망할 꼬맹이는 내 표정이나 말투에 신경 쓰던 녀석도 아니었고, 오히려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뻔뻔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 성격은 여전한 모양이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마을 입구에 와 있었던 건가요?"

"그거야 이단 심문관 언니랑 이야기하고 있었죠!"

"…그렇군요."

기상천외한 엘리의 답변에, 레이첼 수녀는 나와 엘리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부류로 취급받는 건 좀 그런데.'

속으로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오해였지만 굳이 내가 그 오해를 정정해서 얻는 이득이 없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인제 와서 말하기도 무안하지만, 엘리의 친화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꺼려하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다가갈 수 있는 친화력이라면 시네티 마을에서 꺼려지는 제유소 지기의 딸이라는 위치임에도 주민들의 예쁨을 받을 수 있을 텐데도 그런 쪽으로는 전혀 친화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는 점이 특히.

"…처음 뵙겠습니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의 종자, 로나 리브레입니다."

하지만 엘리에 대한 내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멋들어진 붉은 갑주를 걸친 여성이 나를 향해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넨 탓에 나는 그 의문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시네티 마을을 방문한 목적이 이단 심문관을 통해 에일라의 능력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고, 엘리와 엮일 일도 앞으로는 없을 테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에일라 수습 수녀입니다. 로나 님의 신성한 책무에 길더스텐님의 위광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으레 성직자가 이단 심문관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인사말을 건네며, 나는 빠르게 상대의 외견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대략 에일라 보다 3, 4살 정도 연상이며, 악수를 권하는 손에 자리 잡은 굳은살과 자잘한 상처는 이 사람이 평소에도 결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인물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지금도 전혀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각이 잡혀있는 행동거지에서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고지식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고지식하고 성실한 성격…. 상사에게 예쁨을 받기는 어려운 성격인데…. 이 사람이 모시는 이단 심문관의 성향도 원칙주의자에 가깝다고 봐야겠어.'

거느린 부하를 보면 상사의 성향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이런 어설픈 추측을 맹신하는 것은 금물이겠지만, 아무런 단서도 없이 상대를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오히려 그런 성향이라 다행이야. 자기 파벌의 이익을 앞세우는 탐욕스런 인물이었다면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 방해가 되었을 테니까.'

그럴 때를 대비해서 솔름 백작의 후원이라는 보험을 들어두었지만, 굳이 손에 가진 패를 드러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득이었지,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를 증인으로 소환하신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들긴 후,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자, 로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마을의 촌장님과 담당 교구의 신부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그럼 잠깐 시간이 남겠네요. 그렇다면 미리 가서 기다리죠."

이전에 촌장의 집을 찾아간 경험이 있기에 길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촌장의 집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이미 이야기를 끝냈으니 말이지."

로나가 착용한 것과 동일한 디자인의 붉은 갑주를 걸친 이단 심문관의 무리가 이미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베티우스 3세 성하에 비견되는 신성력이라니. 코니엘 신부도 못 보던 사이에 허풍이 늘었군.'

마르셀은 촌장의 집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눈앞의 수습 수녀를 바라보았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 에일라 자매는 분명 성녀가 될 잠재력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를 수도로 보내주십시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코니엘 신부."

코니엘 신부는 자신의 '눈'으로 막대한 신성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확인했다며 에일라를 성녀 후보생으로서 수도로 보낼 것을 요청했지만, 마르셀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코니엘 신부를 비롯한 일부 사제들이 주장하는 신성력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은 교단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기적도 아니었거니와, 아직 에일라 넬런이라는 인물을 만나기 전에 섣부르게 판단하는 것은 마르셀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어린 자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수도로 보내는 것은 좋지 않다.'

수도 리아트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른 귀족세력이나 황실에 약점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대놓고 분란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정적의 세력을 깎아내기 위한 온갖 음해와 공작이 판치는 곳이 수도 리아트였다.

어중간한 재주를 믿고 수도에 들였다가는 여지없이 망가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반갑습니다. 마르셀 코르파 이단 심문관님. 마르셀 님의 신성한 책무에 길더스텐님의 위광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소환에 응해줘서 고맙네. 에일라 자매."

하지만 마르셀의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이단 심문관인 그에게는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에일라 넬런의 신성력이 속임수나 사악한 악마로부터 비롯된 힘이 아님을 밝혀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 마을로 몰려든 마수와 악마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예. 다소 소문이 퍼지면서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기적을 사용해서 악마를 무력화한 것은 제가 맞습니다."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군. 타고난 담력이 뛰어난 자매인가?'

이단 심문관인 자신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증언하는 에일라 넬런의 모습에 마르셀은 속으로 감탄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시간 낭비를 할 것도 없지. 물과 기름을 가져오도록."

그러나 지금 그는 성스러운 책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대의를 그르칠 수는 없다는 원칙에 충실한 마르셀이었기에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휘하의 이단 심문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검증방법은 간단하다. 이 평범한 물과 기름에 피를 떨어뜨려 성수나 성유로 만드는 것이지."

평범한 물과 기름에 소량의 피를 떨어뜨려 성수나 성유로 만드는 것은 교단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신성력의 검증방법이었다.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신성력을 가장 진하게 머금고 있는 혈액이 섞인 물이나 기름은 그 혈액이 머금은 신성력의 농도에 따라 그 성능이 달라지니, 가장 객관적으로 보유한 신성력을 측정 가능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으엑."

하지만 그 설명을 들은 에일라 넬런은 맥빠지는 신음과 함께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성수나 성유를 만들 때는 다 이런 방법을 쓰는 겁니까?"

귀족 영애 출신이라더니, 타인의 피가 섞여들어 간 성수나 성유를 사용하는 것이 몹시 꺼림칙하게 여겨진 모양이었다.

"…성수나 성유가 급히 필요할 때에만 사용하는 방식이다. 보통은 '축성'이라는 기적을 사용해서 성수나 성유를 만들어내니 오해하지 말도록."

마르셀은 침착한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에일라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렇다면 상관없겠군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에일라는 마르셀의 설명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채혈용 침을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가져다 댔다.

"으…."

채혈용 침이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에 고통을 느꼈는지 에일라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내 손가락 끝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핏방울을 조심스럽게 물이 담긴 그릇으로 떨어뜨렸다.

"…맙소사."

"이것은…."

그리고 잠시 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단 심문관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

'그나마 다행이네. 여태까지 손을 씻을 때 썼던 성수가 다른 수녀의 피를 섞은 물이었다면…. 으으….'

다른 사람의 피가 섞여들어 간 물을 마시거나 손을 씻는다니, 오히려 포상이라며 좋아하는 흡혈귀 같은 인간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이상 성욕자는 아니었다.

여태껏 수녀원 생활을 하면서 기도 전에 성수반에 담긴 성수로 손을 씻고 의식을 치를 때 성유를 머리 등에 바르는 등의 일을 몇 번이나 해왔다.

그런데 그 성수와 성유가 남의 피가 섞인 물건이라니, 어지간히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도 그건 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그 성수를 만든 사람들이 수녀원의 수녀들이라고 생각하면…. 으윽.'

게다가 나는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세이사가 권유한 탓에 성수를 몇 번 마신 전적까지 있었으니 속이 메스껍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세이사에게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 말이다.

'침착하자. 다들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잖아.'

어느새 마르셀이라는 이름의 이단 심문관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물론이고 옆에 늘어선 이단 심문관들과 시네티 마을의 촌장 에단, 심지어 엘리조차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로 평범한 물이나 기름에 피를 섞어 성수나 성유를 만드는 것이 여기에서는 그다지 이상할 것 없는 상식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상관없겠군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민망함에 절로 손을 움직이는 것이 절로 빨라졌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빨리 끝내자.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는 것과 다를 것도 없잖아.'

내가 어렸을 적 체했을 때 체기를 내리기 위해 으레 하던 민간요법을 머리에 떠올리며 바늘을 손가락 끝에 가져다 대자, 바늘에 찔리는 약간의 따끔한 느낌이 올라오면서 손가락 끝에 피가 방울져서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한 방울, 그리고 두 방울.

손가락 끝에서 퐁퐁 솟아 나오는 핏방울은 물이 담긴 그릇 안으로 떨어졌고, 물에 빨간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서서히 퍼져나가지…않았다.

'…응?'

에일라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은 물과 섞이자마자 그릇 안에 담긴 액체를 모조리 선명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원래라면 고작 피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고 물 전체가 붉게 물들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양이 적은 피의 붉은 색이 점차 옅어지면서 투명한 원래의 물색으로 돌아온다면 모를까, 이렇게 토마토 주스처럼 붉은 액체가 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붉게 변한 물은 잠시 부글거리는 것처럼 표면에 기포가 올라오더니 십자 모양의 붉은 부유물만을 남기고 다시 투명한 빛을 되찾았다.

"…맙소사."

"이것은…."

그리고 그것은 굳이 곁에 있던 이단 심문관들의 경악한 표정을 보지 않아도 무언가 이상함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이상한 현상이었다.

"…성표라니. 기록에서나 보던 것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거기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흘린 한마디가 경악에 빠진 모두에게 쐐기를 박았다.

에일라 넬런의 신성력은 진짜라는 사실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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