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18화 (18/80)

〈 18화 〉 성흔 (4)

* * *

─와장창

소년이 분노에 휩싸여 되는대로 휘두른 팔에 걸린 운 없는 집기들이 책상 아래로 쏟아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켰다.

"젠장! 젠장!"

바닥에 깔린 값비싼 융단에 잉크를 비롯한 여러 액체가 스며들어 그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지만, 격노에 휩싸인 소년은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그동안 상단의 일을 맡아보면서 큰 이익을 가져왔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번 일은 도저히 그 공으로 과를 덮을 수가 없구나. 내가 이 일을 수습하는 동안 근신하도록 해라.]

"빌어먹을!"

오스라드 상단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상단주의 직인이 찍힌 편지가 소년의 손에서 무참하게 구겨졌다.

무엇을 숨기랴, 소년의 이름은 아이셀 오스라드.

얼마 전만 하더라도 미래의 오스라드 상단을 이끌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받았었던 인물이었다.

"전부, 전부 다 그 여자 때문이다."

아이셀은 구겨진 편지를 방 한구석으로 집어 던지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에일라 넬런.

그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상황이 꼬여버렸다는 생각에 아이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에일라 넬런이라는 악녀에게 심판을 내리고 오스라드 상단과 경쟁하는 상단이 물건을 납품받는 마을을 무너뜨리는 일석이조를 노렸건만, 에일라 넬런은 그런 아이셀의 의도를 비웃듯이 마수의 습격을 막아낸 것은 물론이고, 우연히 등장한 악마마저 쓰러뜨렸다.

게다가 이제는 그 막대한 신성력으로 인해 교단의 고위 사제들의 눈에 들었고, 조만간 성녀 후보생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수도의 사교계에 파다하니, 에일라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이셀로서는 속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하던 아이셀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현재 근신처분을 받아 아이셀이 오스라드 상단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에게는 오스라드 상단의 후계자로 활동하며 쌓아온 인맥이 있었다.

비록 자금을 운용할 수 없어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은 제한되지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이 비단 돈으로 한정되던 것이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셀은 바닥에서 잉크를 울컥울컥 뱉어내며 융단을 더럽히던 잉크병을 조심스럽게 집은 뒤 손에 깃펜을 쥐었다.

"도련님. 도련님을 찾아온 손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셀의 행동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이 있다며 문을 두드리는 사용인의 말에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누구지?"

아이셀의 제법 명민한 머리는 이미 자신을 찾아온 방문자의 정체를 추론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아이셀의 감정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전혀 무가치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이단 심문소의 이단 심문관분들과 동행한 수습 수녀 두 분입니다."

"빌어먹을."

전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용인의 대답에 아이셀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이셀이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대는 이미 아이셀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자신을 찾아오고 만 것이다.

*

"쿠어엉!"

키니아 제국의 수도 리아트로 향하는 숲길.

단말마를 내지른 거대한 곰 형태의 마수는 종이가 화염에 휩싸여 사라지듯 새카만 재와 같은 입자를 흩뿌리며 그 모습을 세상에서 감추었다.

"…엄청난 능력이네요."

기적을 사용하여 마수를 일격에 쓰러뜨리는 에일라의 능력을 본 로나는 한숨 섞인 감상을 내놓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열심히 수련했는데, 자신의 성취는 그저 둔재의 노력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에일라가 펼친 기적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신성력은 로나의 기를 죽여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래. 엄청난 능력이지. 저런 소녀에게는 과분할 만큼."

마르셀 또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기적을 사용한 여파로 신성력이 고갈되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에일라를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에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 만큼 어려운 길을 걷게 되겠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닐 거고.'

현재 엄정한 중립을 지키며 교단 내의 여러 세력 중 어느 세력의 편도 들지 않고 있는 마르셀이었지만, 어느새 이단 심문소 내부까지 침투한 세력들의 권력 다툼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단 심문소마저 이러할진대, 키니아 제국에서 유일한 성녀를 선정하는 과정에 더러운 권력 암투가 빠질 리가 없었다.

첫 번째는 강력한 신성력을 타고난 에일라를 확보하기 위한 세력 간의 다툼이 될 것이고, 두 번째는 에일라를 확보하지 못한 세력들이 어떻게든 그 손해를 만회하고자 성녀 후보생이 된 에일라에 견제를 시도하는 것이 될 터였다.

'본인에게 그것을 버텨낼 만큼 강단이 있어 보이기는 한다만….'

마르셀이 생각하기에 에일라 넬런이라는 소녀는 제법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수도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수도 귀족의 더러운 암투를 지켜보며 조기교육을 거친 영향인지, 어지간한 일에도 눈을 깜짝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심지가 굳지 않으면 세상에는 물렁물렁한 슬라임 같은 종족밖에 없으리라.

'곧바로 수도행을 결정한 것도 곧바로 이 일을 꾸민 상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그 음험한 솔름 백작이 뒤를 봐줄 만도 하군.'

솔름 백작을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부터 그가 속에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파악한 마르셀이었다.

자신의 테두리 안에 둔 이에는 무척이나 선하고 자비롭지만, 테두리 바깥의 존재에는 냉혹하고 잔인함을 드러내는 성정.

마르셀은 그것을 '음험함'이라고 정의했지만, 지도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그것이 솔름 영지를 다스리는 솔름 백작의 성정인 이상, 그의 후원을 받은 에일라 역시 평범한 범재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굳이 막대한 신성력을 이유로 들지 않아도 말이다.

"수, 수도는 언제 도착하나요? 히익!"

'그건 그렇고…. 참으로 비교되는군.'

마르셀은 갑작스레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른 이단 심문관이 쓰러뜨린 마수의 사체를 보고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중요 참고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티아 이글라스라고 했던가. 흑막에 이용당했다고 했지.'

청연초가 섞인 주머니를 들켜 이번 일의 범인으로 지목되었지만, 에일라의 변호를 통해 범인이라는 누명을 벗은 에일라와 같은 수녀원 소속의 수습 수녀였다.

"…앞으로 도시 둘을 거치면 수도 리아트에 도착한다."

"가, 감사합니다!"

마르셀의 대답에 제 껍데기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는 자라처럼 급히 마차 안으로 고개를 다시 집어넣는 티아.

명백히 이단 심문관을 이끄는 지휘관인 마르셀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쯧."

티아가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이단 심문관을 마주하는 인물 대부분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전혀 위축됨 없이 당당히 자신이 할 말을 하던 에일라를 봤던 탓에 그 그릇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지니 마르셀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마르셀 님?"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마르셀을 오랫동안 보좌해왔던 로나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부른 뒤에야 마르셀은 자신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발걸음을 더 서두른다! 감히 이 땅에 악마를 불러들인 어리석은 이를 처단하러 가는 길이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결국, 민망함을 털어내기 위해 짐짓 엄한 어조로 내린 마르셀의 명령에 이단 심문관 일행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져, 그 결과로써 이단 심문관 일행은 예상했던 기간보다 이틀을 앞서 수도 리아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이라.'

시네티 마을에서 성수를 만들면서 의도치 않게 보인 기적에 뒤이어 내가 선택한 행동은 곧바로 수도로 가서 직접 이 일에 대한 매듭을 짓는 것이었다.

'티아 이글라스는 수도로 데려가야지. 시네티 마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중요 참고인으로서 증언해야 하니까.'

아이셀 오스라드.

이번 기회에 그에게 목줄을 채워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에일라로 살아가야 할 내 삶에 번번이 어깃장을 놓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이번에 크나큰 약점을 노출했다고는 하나 키니아 제국 제2의 규모를 지닌 상단을 이을 후계자였다.

현대의 재벌가에서도 자식들의 행동으로 무언가 스캔들이 터지면 어떻게든 그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기 일쑤인데 여기라고 다르겠는가.

철저하게 상대를 붙잡고 물어뜯을 끈기를 지닌, 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면 재력이라는 무기를 앞세운 상대에게 굴복당하는 미래 말고는 없을 것이다.

'이단 심문소라면 그 힘이나 끈질김은 확실하겠지.'

마르셀을 비롯하여 동행했던 이단 심문관의 모습으로 보아 교단의 이단 심문소는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광신에 가득 찬 광신도 집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저 사람 좋은 널널한 인간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

지금도 마차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으며 쉴 새 없이 주변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는 티아 이글라스가 그 증거였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요."

"……."

입은 열지 않은 채 시선과 표정만으로 '넌 어째서 저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냐.'는 질문을 던지는 티아.

"티아. 지금 우리들은 우리는 물론이고, 죄 없는 시네티 마을의 사람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 범인을 붙잡으러 가는 길이에요. 적어도 이단 심문관분들은 우리의 아군이지 위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아니죠."

하지만 나는 그런 티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조목조목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건 네 생각에 따라 달라지겠지."

주변의 분위기에 눌려있던 탓에 계속 유지하던 침묵을 깨고 티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다소 날이 서 있는, 짜증이라는 감정이 담긴 퉁명스러운 대답. 하지만 내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죠."

그 대답은 티아가 자신의 목줄을 붙잡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티아, 딱히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티아의 인식에서 교정할 오해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이용가치가 있어서겠지."

"아뇨.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 앞길을 방해하지 않는 이상 제가 당신에게 가져야 할 원한은 없거든요."

이전에 나를 두엄더미에 처박은 일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목숨을 거두거나,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꼴을 보게 하는 것은 사이코패스나 할 법한 발상이었다.

더군다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성녀 후보가 될 기회가 열린 지금, 내가 티아 이글라스를 건드려서 얻을 것이라고는 추잡한 가학심을 충족하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뭐? 그게 무슨…."

"수도 리아트에 도착했다! 모두 하마한다!"

"예!"

내가 꺼낸 의외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무어라 되묻는 티아였지만, 바깥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이단 심문관들의 목소리에 티아의 질문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자, 그럼 다 도착한 모양이니 우리도 마차에서 내리도록 하죠."

"…알았어."

마차에서 내리자는 내 제안에 티아는 내키지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체념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얌전히 뒤를 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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