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성흔 (5)
* * *
'역시 수도인가. 들어가는 관문의 규모부터가 다르네.'
마차에서 내린 직후,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거대한 관문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에일라의 기억에서 본 적이 없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에일라는 수녀원으로 쫓겨나기 전까지는 수도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관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에일라가 수녀원으로 쫓겨났을 때는 지금 눈앞에서 수도의 웅장한 규모를 미리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한 남쪽의 관문이 아니라 수도의 관문 중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이용하는 사람의 수도 적은 북쪽의 관문으로 별다른 지원도 없이 쫓겨나듯 보내졌으니, 사실상 에일라로서도 나로서도 수도 리아트로 들어오는 인원 대부분이 이용하는 남쪽 관문은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금의환향인가.'
에일라의 기억에 남아있던, 비교적 초라한 북쪽 관문의 모습과 화려한 남쪽 관문의 모습을 비교하자니, 과거와는 달라진 지금 에일라의 처지를 반영하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지! 수도를 방문한 목적과 반입하는 물건을 장부에 기재해 주십시오!"
"이단 심문소의 마르셀 코르파 심문관이다. 교단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고 복귀하는 길이다."
"교단의 문장과 이단 심문소의 문장…확인했습니다. 통과하십시오."
군기가 바짝 든 위병들이 바쁘게 오가며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을 통제하며 검문을 시행하는 탓에 관문 앞은 마치 시장처럼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우리 일행은 마르셀이 위병에게 다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빠르게 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도의 위병도 이단 심문관이라는 이름을 두려워하는 모양이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네 침착함은 이해가 안 돼."
형식적인 검문조차 없이 위병으로부터 곧바로 출입허가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짧은 감상을 꺼내 들자 티아는 이제는 반쯤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 수도에 도착했으니 우선은 에일라가 정식 성녀 후보생으로 인정받는 것이 먼저야.'
그런 티아의 모습을 무심하게 받아넘기며, 나는 수도에서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교단으로부터 정식으로 성녀의 자질이 있는 '성녀 후보생'으로 인정받는 것은 내가 세워둔 계획의 근간이 되는 전제조건이니 가장 우선순위가 높았다.
개인이 지닌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인간 하나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이미 힘을 합쳐 에일라를 끌어내리려던 이들의 협공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기반을 잃고 몰락한 전적이 있는 에일라였기에 '교단'이라는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 의지할 수 있는 배경은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이셀 오스라드를 비롯한 에일라의 적들에 목줄을 채워서 혹시나 모를 위협을 제거하는 것.'
내가 빙의하기 전, 에일라가 이미 저지른 악행은 다시는 컵에 담을 수 없게 바닥에 엎질러진 와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엎질러진 와인을 내버려 두면 바닥에 얼룩이 남아버리는 법.
그 엎질러진 와인을 어떻게 수습할까 이리저리 고민해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사과하며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묵은 앙금을 풀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으로 수습할 수 없다면 철저하게 짓밟아서 우위를 확보해야겠지.'
잔혹하다면 잔혹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앞뒤 사정도 제대로 모르고 에일라의 몸을 차지한 내가 직접 저지르지도 않은 악행을 사과한다고 한들 그 사과에 진정성이 있을 리가 없었고, 그 사과를 상대가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미운털이 박힐 대로 박혔는데 사과 한 번 했다고 곧바로 원수를 용서할 리가 없지.'
더군다나 인간은 본디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기 쉬운 존재.
아이셀 오스라드처럼 아예 에일라를 제거할 목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자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상황에 내가 괜히 사과하겠답시고 자리를 만들어봐야 그 상황을 음모에 이용당하거나 괜한 오해만 받고 손해만 볼 가능성이 컸다.
결국, 내가 택할 방법은 최선이 아닌 차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그쪽은 내 목숨을 빼앗아가려고 했는데 목숨도 붙여주고 곤란한 상황도 해결해 주면 충분히 자비로운 거 아니겠어?'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고,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티아는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일라 자매."
"크론 교구장 주교 각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음 에일라의 몸으로 마주했던 수녀원의 성당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장엄한 규모를 지닌 수도 리아트의 대성당에서 나는 어지간해서는 1명조차 보기 힘든, 하나의 교구를 담당하는 주교급의 사제 3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면면을 살펴보자면,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가장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넨 주교는 키니아 제국의 남서부에 해당하는 크론 교구의 교구장 직을 맡은 주교였다.
"에일라 자매, 수녀원에서 수도까지 오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 덕분에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덴 교구장 주교 각하."
이에 질세라 수도까지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냐며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주교는 제국의 북서부에 해당하는 보덴 교구를 담당하는 교구장 주교.
"에일라 자매가 앞으로 걸어갈 길에 길더스텐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보드바 교구장 주교 각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척이나 담담한 태도로 나를 맞이하는 주교는 제국 동북부에 있는 보드바 교구의 교구장 주교였다.
'벌써 경쟁이 치열한데.'
속을 알 수 없는 보드바 주교는 일단 넘어가더라도, 크론 주교와 보덴 주교 사이에는 에일라를 두고 불꽃이 튀는 듯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허허허. 보덴 주교님, 언젠가 같이 교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언제나 고대하던 바입니다. 그러는 크론 주교님이야말로 목회를 이끄는 사제로서 수양을 충분히 쌓고 있습니까? 설마 제국 내에 사악한 요언을 퍼뜨리는 것은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수도에 도착하기 전 마르셀 이단 심문관이 내게 넌지시 언급해 주었던 교단 내의 권력다툼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 지독한 교단 내의 권력다툼을 견뎌낼 각오가 되었냐고 물었었지.'
성녀 후보생으로 뽑힐 수습 수녀를 걱정하는 이단 심문관이라니.
내가 생각했던 이단 심문관의 모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교단 내의 파벌 다툼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마르셀에게 간단하게나마 교단 내부의 상황이라는 정보를 듣고 교단 내의 파벌 다툼을 마주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은 자명했으니 말이다.
'교단 내부의 파벌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자세히 알려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다만, 자신은 길더스텐님의 뜻을 대행하는 칼날에 불과하다며 철저한 중립을 고수하던 마르셀 이단 심문관답게 그가 알려준 교단 내부의 권력다툼에 대한 정보는 극히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현재 하얀 장미 수도회와 푸른 십자 수도회가 크게 대립하고 있고 그 외에 중립을 지키는 수도회가 여럿 있다고 했지. 그럼 크론 주교와 보덴 주교는 각각 다른 수도회 출신이겠지. 보드바 주교는 아마 중립을 표방하는 다른 수도회 출신일까?'
그러나 마르셀 이단 심문관의 호의가 없었다면 곧바로 눈앞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두 주교와 대립하는 수도회를 연결지어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 내가 투덜거릴 입장은 아니었다.
"자, 자존심 싸움은 그쯤 해두고 어서 성녀님을 접견하러 가세. 성녀님도 에일라 자매를 어서 만나보고 싶어 하시니 말일세."
내가 아직도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두 주교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보드바 주교가 아직도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크론 주교와 보덴 주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둘의 싸움을 중재했다.
신경전을 벌이던 두 주교는 불만스러운 듯 보드바 주교에게 무어라 말하려다가 내가 빤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떠올렸는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비로소 나는 두 주교가 신경전을 벌이는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 교황의 집무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대성당의 규모가 황궁에 버금간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모양이야.'
이번 대의 성녀가 집무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향하기 위해 앞서가는 세 주교의 뒤를 따라,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나긴 복도를 걷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보다 신성력이란거 대단하네. 보통 나이 드신 어르신에게 이렇게 긴 복도를 걸으라 하면 앓는 소리부터 하기 마련인데.'
이미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거나 드문드문 백발이 섞인 초로의 나이에 접어드는 주교들이었음에도, 이들은 온갖 성화(?)와 종교적 상징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기나긴 복도를 걷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이 내게 알려준 정보에 섞여들어 있었던 대로 주교들이 신성력을 사용하여 신체의 능력을 끌어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보통은 강력한 신성력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보다도 많은 체력을 가진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에일라는 그렇게 많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도 이렇게 허약한 것인지….'
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겉으로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계속해서 걷는 에일라의 몸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계속해서 내지르고 있었다.
점점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의 풍경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녀원에서 일하면서 체력을 이전보다는 길렀다지만, 마차로 수도까지 이동하면서 여독으로 쌓였던 피로가 어느새 발목을 붙잡은 모양이었다.
'…참아야 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으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 하는 에일라의 몸을 억지로 붙들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조만간 한계가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등 뒤로는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미지근한 땀방울이 느껴지고, 복도의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성화의 모습조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의 초점까지 흐려지고 있는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자.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힘든 법이니까.'
몸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 것을 급히 다잡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보낸 나는 복도 벽에 그려진 성화에 정신을 집중했다.
'괜찮아. 나는 미술관에 온 거야. 저 주교들은 미술관의 큐레이터고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벽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하면 되는 거야.'
몸의 피로함을 잊기 위해 그렇게 자기암시를 건 것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음, 이건 내가 리피샤 수녀원장에게 핑계를 댈 때 썼었던 성 베르기스의 일화를 그린 그림이네. 또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른 성화의 내용도 외워두자.'
다행히도 나보다 앞서 걸어나가던 주교들 역시 이따금 뒤돌아 나를 바라볼 뿐, 별다른 제지 없이 도중에 멈춰 서서 성화를 감상하는 내 행동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복도를 걷는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이번 대의 성녀가 머무르는 집무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를 바라보는 주교들의 표정이 저렇게 놀란 표정이지? 내가 뭔가 저지르기라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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