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성흔 (6)
* * *
'믿을 수 없군. 성녀라는 이름에 현혹된 불나방에 불과한 불행한 자매가 아니라 정말로 이전의 성녀님들을 뛰어넘을 길더스텐 님의 안배인가.'
보드바 교구의 장을 맡은 교구장 주교, 엘리튼 에체코스는 완전히 탈진하여 기진맥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기어이 복도 끝까지의 기나긴 길을 완주해낸 에일라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느꼈다.
'설마 끝없는 복도의 시련을 끝까지 통과하는 자매가 나올 줄이야.'
끝없는 복도의 시련.
실제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지만 신성력으로 작동하는 특수한 장치가 복도에 들어선 이의 감각에 혼란을 일으켜 같은 복도를 수백 회나 계속해서 맴돌게 하는 시련으로, 성녀 후보생이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인 인내심을 시험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문이었다.
'수많은 자매가 이 첫 관문을 넘지 못하고 자격을 잃었건만.'
성녀 후보생으로 뽑히는 최소한의 합격선은 복도의 절반을 넘는 것이었으나, 이조차도 가벼운 마음으로 성녀 후보생에 도전한 자매들을 걸러내는 거름망이 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미처 절반을 채우지도 못하고 도중에 지쳐 쓰러지는 자매가 태반이었으며, 귀족영애 출신의 자매 중 이 시험이 자신을 우롱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주교들에게 상스러운 욕을 퍼붓다가 자격을 박탈당한 이도 존재했으니 이 시련은 제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가 없군.'
교단에 속한 성직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지닌 성녀 후보생이 나타난 것은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보드바 주교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하필이면 그런 시련을 최초로 돌파한 자매가 수도 내에서 여러모로 나쁜 소문이 무성하던 넬런 백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은 그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끝없는 복도의 시련'은 신성력을 사용해 신체능력을 끌어올린 보드바 주교를 비롯한 주교들 역시 육체적인 피로는 없을지언정 신성력을 사용한 여파로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험난한 관문이었다.
다시 말해, 제아무리 우수한 신성력을 보유했다 한들, 그 신성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숙련도가 쌓인 것이 아니라면 이 관문을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홀로 마을에 쳐들어온 악마 무리를 물리쳤다는 소문이 마냥 과장된 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사람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면 그 사실을 어떻게든 자신이 아는 현실에 끼워 맞추려고 시도하기 마련이었다.
보드바 주교 역시 믿을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해 현재 수도 리아트의 사교계에 널리 퍼진 소문을 떠올렸다.
한 변방의 마을에 악마의 무리가 쳐들어 왔고, 정식 수녀조차 아닌 수습 수녀의 신분에 불과했던 에일라 넬런이 강력한 기적을 행하여 마을을 습격한 악마들을 물리치고 마을을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소문.
수도의 사교계에서 도는 소문이 대부분 그렇듯이 다소 과장되고 부풀려진 소문이겠거니 하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보드바 주교였지만 이제는 그 소문을 마냥 과장된 소문이라며 무시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겠군. 그냥 하얀 장미 수도회나 푸른 십자 수도회의 손에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다.'
이미 그는 에일라 넬런이라는 뛰어난 성녀 후보생을 어떻게 하면 포섭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그가 소속된 현임 교황 직속의 비밀결사, '새벽'의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
'…왜 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거지?'
나는 이 노괴들이 도대체 무엇에 놀랐는지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예비 성녀 후보생을 기나긴 복도를 걷도록 하는 게 일종의 테스트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이걸 완주했다고 이런 반응을 보이나? 에일라처럼 체력이 완전히 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이상 무난하게 통과할 텐데?'
제법 긴 거리를 걷긴 했지만, 그 거리는 내가 체감하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굳이 비교 대상을 찾자면 건강을 위해 종종 권유되곤 하는 '하루에 10km 걷기' 정도일까.
에일라의 저질스러운 체력 때문에 고생했을 뿐이지, 주교들의 경악을 유발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빨리 정신 좀 차려라. 성녀님이 기다리다가 지치시겠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주교들에게 함부로 말을 걸 수는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침묵하는 것을 선택했다.
높으신 분들이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멋모르고 방해했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불똥이 튀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체득한 군필자의 처세술이었다.
"…어흠. 못난 모습을 보였군."
주교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이번에도 보드바 주교였다.
"…어흠, 어흠."
"…크흠."
보드바 주교가 본의 아니게 나를 방치(?)한 것을 사과하자, 뒤이어 정신을 차린 크론 주교와 보덴 주교 역시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민망함을 털어내 보려 시도했다.
"…주교님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보다 성녀님이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문을 노크해도 될는지요?"
"그래, 그랬지. 그렇게 하게나."
계속 주교들을 상대하고 있어 봐야 괜히 머리만 아플 것 같았기에 문을 노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낸 나는 곧바로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고,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자마자 재빠르게 성녀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양해의 인사말을 건네며 성녀의 집무실로 들어선 내 눈에 곧바로 들어온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의 탑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번에 새롭게 예비 성녀 후보생으로 뽑힌 에일라 자매라고 했던가요?"
그리고 이미 하나의 성채를 이루었다고 봐도 좋을 그 서류의 탑 사이에서 내 인사말에 반응한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사의 부품으로 일하던 때가 생각나네.'
이렇게 엄청난 양의 서류를 매일같이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성녀가 되면 나 역시 저런 무지막지한 양의 서류를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네. 맞습니다. 성녀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내 대답에 반응하듯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류의 탑 중의 일부가 철거되며 비로소 서류 더미 사이에 감춰져 있던 성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대충 들었어요.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을 축하해요."
서류 더미 사이로 드러난 성녀의 얼굴은 앳된 소녀의 얼굴이었다.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은 업무에 방해되지 않도록 대충 말총머리로 묶어 뒤로 늘어뜨린 상태였고, 복장은 다른 수녀와 비교해도 크게 다를 것 없는 검은색의 수녀복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 성직자가 착용하는 베일은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에일라와 비교해도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을 것 같은, 기껏해야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성녀의 모습에 내 표정은 놀라움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혹스러운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성녀의 말에 대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괜찮아요. 저를 본 다른 분들이 흔히 보이던 반응이니까요."
성녀는 내 놀란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하고는 집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어서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선은 성녀가 요구한 그대로 소파에 앉은 나였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수도 리아트까지 오면서 마르셀 이단 심문관으로부터 성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듣기는 했다.
공식 석상에 나오는 일이 무척이나 드물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위엄이라고는 전혀 없는 소녀가 성녀랍시고 모습을 드러내 봤자 교단의 권위만 깎여나갈 것이 뻔하니 최대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집무실 안에서 사무를 보게 한 것이리라.
"에일라 자매는 딱히 이유를 물어보진 않는군요? 어째서 제가 이런 외모인지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여태껏 저를 처음 만난 분들은 다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내가 소파에 앉은 것을 확인한 성녀가 나를 향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 질문을 건넸다.
"…괜한 호기심에 독사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굴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현명한 이의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하하! 레젠서에 나오는 구절이군요."
복도에 그려진 성화에 달린 설명을 머리에 떠올린 내가 내놓은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성녀는 손뼉을 치며 다소 경박해 보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에일라 자매님은 참으로 현명하네요. 제가 이런 외모를 가졌다고 해서 성녀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은 절대 아니죠. 겉모습은 이렇게 보여도 저는 올해로 50세를 맞이하니까요."
"…예?"
이번에는 내가 당황한 것을 조금도 숨길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이를 높게 잡아봐야 20대 초반의 외모를 가진 눈앞의 성녀가 실제로는 50세라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에일라 자매님은 몰랐나요? 아주 강한 신성력을 지닌 사람은 나이를 매우 느리게 먹는답니다."
"…처음 들었습니다."
'신성력이란 도대체 어디까지 만능인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시에 새삼스럽게도 이 세상이 판타지 세계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래. 외모에 속지 말자. 저 성녀 역시 속에 능구렁이를 품고 있는 주교들과 다를 바 없어.'
"그보다…놀랐어요. '끝없는 복도의 시련'을 완주할 줄이야. 제가 그 시련을 마주했을 때는 완주를 앞두고 기력이 다 떨어져 버렸는데 말이죠."
성녀의 페이스에 점차 말려드는 것 같아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속으로 각오를 다지고 있자니, 성녀는 내가 통과했던 관문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요?"
어째서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성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50세가 되어서도 20세 초반에 가까운 외모를 지닐 만큼 강한 신성력을 보유한 성녀라면 집무실을 떠나지 않고도 바깥의 상황을 확인할 방법 하나쯤은 있으리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최근 100년 사이 역대 성녀와 성녀 후보생을 통틀어도 '끝없는 복도의 시련'을 완주한 사람은 에일라 자매를 제외하면 없어요. 아, 그렇다고 시련에 대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성직자로서의 모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니 주의하세요."
'에일라 자매를 제외하면 없다.'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 성녀의 말에 나는 비로소 주교들이 보였던 당황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나는 말도 안 되는 업적을 달성한 모양이었다.
'뭐, 나쁠 건 없지. 게임식으로 생각하면 히든 업적을 달성한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혹여나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치우는 동시에 추가적인 이득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 그리고 에일라 자매에게 더 알려줄 내용이 있어요."
더불어, 성녀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발견한 아이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내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최근 100년간 '끝없는 복도의 시련'을 완주한 사람이 없어서 잊혀가던 내용이지만, 이번에 에일라 자매가 완주에 성공했으니 다시 이 구절이 세상의 빛을 보겠군요."
그 내용이란….
"'끝없는 복도의 시련'을 통과한 예비 성녀 후보생은 당대의 성녀에게 한 가지 요구사항을 요청할 수 있다. 당대의 성녀는 요구의 내용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이 요구사항을 거절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커다란 특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