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21화 (21/80)

〈 21화 〉 성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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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에일라 자매는 제게 무엇을 요구할 건가요? 성녀가 내려주는 축복? 아니면 성녀의 권한으로 넘겨줄 수 있는 무언가?"

어떻게 하면 단 한 번의 기회를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진 나를 바라보며 성녀는 간단한 예시를 제시했다.

"축복이라 하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말 그대로 축복이죠. 교리와 신앙심에 관해서는 제법 자신이 있지만 타고난 신성력이 부족해서 아쉬움을 느끼는 자매분의 경우에는 부족한 신성력을 채워주는 식으로 축복을 받은 자매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죠."

'일종의 능력치 보정인가?'

성녀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축복이 축복을 받은 사람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준다면 내가 성녀의 축복을 받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저질스러운 체력의 개선일 것이 분명했다.

'나쁘지 않긴 한데.'

무슨 배터리로 인해 가동시간에 제한이 있어 한정된 시간 안에 결판을 내야 하는 거대로봇도 아니고, 신성력을 사용하거나 체력적으로 힘든 일을 하다 보면 얼마 안 가 픽픽 쓰러지는 에일라의 체력은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붙잡을 위험을 품고 있었다.

만약 성녀에게 축복을 받아 이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면 제법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하지만 영 석연치 않아. 나름대로 에일라의 몸에 체력이 붙도록 노력했는데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는데 성녀의 축복이라고 다를까?'

다만, 성녀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에일라의 체력이 향상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단 1번밖에 없는 기회를 소모하여 성녀에게 축복을 받아도 되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수녀원에서도 나 역시 에일라의 허약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모로 방법을 모색해봤다.

세이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간단한 재활 체조나 운동을 시도해 보기도 했고, 검소한 수녀원의 식단 내에서도 최대한 영양소의 균형을 맞춰서 식사량을 점진적으로 늘려보기도 하는 등, 이 세계에서는 다소 생소해 보일지라도 지구에선 그 효과가 충분히 입증된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그 결과, 그다지 신통한 효과는 없었다.

다소 체력이 붙은 것 같다는 느낌이 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에일라의 오른팔에 난 상처가 심하게 쑤셔오면서 아물었던 피부가 난도질한 것처럼 갈라졌고, 그것을 기점으로 체력도 이전의 상태로 초기화되고 말았다.

'저주를 받은 걸지도 모르지.'

만약 내 짐작대로 에일라의 이 허약한 체질이 단순한 체력문제가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어 성녀가 내려준 축복이 아무런 효용도 없다면 나는 아까운 기회를 그대로 날려버리는 꼴이 되어버릴 수 있으니 절로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흐음…. 에일라 자매는 특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

"예. 지금으로써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특전에 관심이 없느냐는 질문에 긍정하는 나를 보며 성녀는 나를 향해 재미있다는 시선을 보내며 그 조그마한 손을 자신의 턱으로 가져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요? 에일라 자매가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허심탄회하게 말해보세요. 거기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 그거라면 사실…."

순간 성녀에게 에일라의 몸으로 겪고 있는 이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어차피 성녀도 답을 내놓지 못할 현상이라면 이 현상은 그 누구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할 현상일 것이라는 것에 생각에 나는 지금 겪고 있는 현상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 사실인가요?"

환자를 문진하는 주치의처럼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성녀는 내 이야기가 끝나자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예. 길더스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대답에 한 치의 거짓도 섞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성녀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서가로 다가가 무척이나 두꺼워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이 책은 교단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에요."

역사서를 꺼내 들어야 할 만큼 내가 겪고 있는 현상이 드물다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설명해 달라는 시선을 성녀에게 보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교단에 속한 사제와 성기사의 신성력은 대를 거듭해 오면서 약해지고 있어요. 에일라 자매는 그 이유를 아나요?"

"죄송합니다. 아직 수습 수녀에 불과한 몸이라 그런 지식은 거의 없습니다."

수녀원에서 매일같이 필사하는 경전의 내용과 기도시간마다 외우는 기도문 정도야 어느 정도 숙지하게 되었지만, 교단의 역사 같은 전문적인 지식은 나나 에일라의 기억에서도 없었기에 완전한 백지상태였다.

"그렇군요. 하긴, 교단에 보관하고 있는 장서를 모두 읽고 기억하는 괴짜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지식이죠."

스스로 자조하듯 쓴웃음을 지으며 성녀는 펼친 역사서에 적힌 한 단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흔…?"

성녀가 가리킨 것은 '성흔'이라는 단어였다.

단어 아래로는 깨알같이 세세한 글귀로 이 '성흔'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요점만 말하자면 '성흔'은 그것을 타고난 자에게 강력한 신성력을 부여하는 대신 그 신성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소유자를 무척이나 허약한 체질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발견된 사례가 없어서 최근의 성직자와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비유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단어죠. 에일라 자매, 잠시 그 상처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붕대를 풀어 오른팔을 보여주자, 성녀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문헌에 기록된 것과 비교해서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분명 에일라 자매가 겪은 현상은 역사서와 경전에서 성흔을 묘사하는 것과 일치해요. 그렇다면 성흔을 보유한 사람의 출현이 급격히 감소한 것과 성직자가 보유한 신성력의 평균치가 떨어진 것은…."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가득 찼던 성녀의 눈빛은 이제 새로운 이론을 발견해낸 학자의 그것처럼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당장에라도 내 오른팔의 상처를 뜯어다가 연구해 보고 싶다는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에 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잠시 평정심을 잃었네요. 미안해요."

그래도 성녀는 괜히 성녀가 아닌지, 성녀는 자신의 탐구욕에 집어 삼켜지지 않고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은 뒤 내게 사과했다.

"아무튼, 에일라 자매의 성흔은 당분간 숨겨두는 편이 좋겠네요. 수백 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았던 성흔을 지닌 성녀 후보생이라니,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사람이 교단을 제외하더라도 한둘이 아닐 테니까요."

"…조언 감사드립니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떨떠름한 조언이었다.

에일라가 지닌 강력한 신성력과 유난히도 약한 체력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은 좋았지만, 교단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의 관심까지 끌게 된다면 일이 어떻게 복잡해질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강력한 힘도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인데.'

지금 성녀 후보생이 되는 것에 문제는 없지만 내 입지는 여전히 좁았고, 그런 상황에서 과도한 관심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고민이 길어지는 내 모습을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성녀는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 하나를 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라플리 산맥에서 드물게 산출되는 라플리움을 장식으로 단 반지에요. 켈돈 금화를 산더미처럼 가져와도 이 반지의 가치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 거에요."

성녀의 말마따나 테이블 위에 올려진 반지 위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은은하게 흩뿌리는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은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성녀님. 성직의 길을 걷는 제게 있어서 재물은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속으로는 저 반지를 팔아치우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손익을 따져보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많은 재물을 가져봐야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거절하는 대답을 성녀에게 되돌려주었다.

"후훗. 물론이죠. 저도 그런 생각으로 이 반지를 제시한 것이 아니에요. 이 반지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에일라 자매, 교단의 성기사가 입단하면서 치르는 의식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성녀의 질문에 나는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고, 성녀는 "그런가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성기사는 우리 같은 사제와는 달리 직접 병장기를 휘두르면서 신성력을 사용하는 전사들이에요. 하지만 에일라 자매 역시 직접 겪어서 알듯이 신성력이란 것은 한 번 쓰고 나면 무척이나 지독한 피로를 몰고 오죠. 당연히 근접전을 벌이는 성기사에게 있어 그런 피로는 치명적이었죠."

어째서 갑자기 성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없는 정보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호응했다.

"그렇기에 성기사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한답니다. 바로 '서약'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죠. 그리고 이 '서약'은…"

이어지는 성녀의 설명은 꽤 길게 이어졌지만, 요점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교단에 속한 모든 성기사는 '서약'이라는 방식으로 신성력을 다룬다.

둘째, '서약'이라 함은 자신에게 금제를 걸어 보다 적은 리스크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며 그 효율은 금제의 수가 늘어날수록, 금제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더 좋아지지만, '서약'을 어기게 될 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동이 돌아온다.

셋째, 교단에 속한 모든 성기사는 첫 '서약'으로 '서약의 반지'를 지닌 자가 내린 명령에 복종한다는 내용의 금제를 건다.

"성녀님, 그럼 이 반지는…."

그 사실을 조합하자 나온 결론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교황이나 성녀, 혹은 허가를 받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다룰 수 있는 서약의 반지랍니다."

비슷한 것을 찾아보자면 조선 시대에 암행어사가 임금에게 직접 하사받았던 마패와도 같달까, 성녀가 내게 내민 반지는 사실상 교단에 소속된 모든 성기사를 필요에 따라 차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소유자에게 부여하는 물건이었다.

"어떤가요? 이 정도라면 에일라 자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성녀의 제안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성녀의 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성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정말 이것으로 사용해도 괜찮은가?

"저는…."

나는 잠시 숙고를 거친 뒤, 입을 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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