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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22화 (22/80)

〈 22화 〉 목줄

* *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보드바 주교는 면담을 마치고 나온 에일라 넬런이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이나 성녀 본인이 아닌 이상에야, 가증스러운 악마 놈들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벌이는 성전을 지휘하는 지휘관에게나 지급되는 반지가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 빛을 흩뿌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성녀님께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약의 열쇠'를…? 지금까지 연구와 교단의 일에만 힘썼지, 교황 성하와 대립각을 세운 적이 없는 성녀님이 아니셨던가?'

당대의 성녀는 좋게 말하자면 큰 다툼없이 무난하게 교단을 운영해온, 조화를 추구하는 성녀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일 없이 공의회에서 교황의 거수기 역할만을 수행해온 무기력한 성녀였다.

'설마,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는 경고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보드바 주교는 자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웅크린 채 어느 세력의 편도 들지 않던 성녀라는 세력이 안 그래도 복잡한 교단 내 정쟁에 끼어든다면, 성녀의 지지를 얻은 세력 쪽으로 승부의 추가 기울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보드바 주교는 조바심을 느끼며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현임 교황이 추진 중인 교단 내의 개혁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려면 성녀의 지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에일라 넬런이 어떻게 성녀의 지지를 이끌어냈는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나중에 알아볼 일이었지 지금 당장 해소해야 할 의문은 아니었다.

"에일라 자…."

"…성녀님께선 에일라 자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만큼 에일라 자매가 성녀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보드바 주교 하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급히 에일라에게 말을 붙이려는 보드바 주교를 견제하듯 보덴 주교가 끼어들었고, 이에 질세라 크론 주교 역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쯧, 너무 성급했군.'

두 주교의 간섭 덕에 자신이 과도하게 조급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드바 주교는 일단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두 주교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은 곤란하군. 나중에 기회를 만들도록 해야겠어. 어서 교황 성하께도 이 사실을….'

물론 그렇다고 그가 에일라를 포섭하는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 적당한 기회가 아니었을 뿐, 그는 조만간 억지로라도 기회를 만들어 낼 작업에 들어갈 인물이었다.

'성녀님의 말대로네. 코미디가 따로 없어.'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인 에일라는 차가운 시선으로 보드바 주교를 비롯한 주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형국이었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왼손 엄지에 '서약의 열쇠'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본 티아 이글라스의 격한 반응은 경악이라는 감정을 무엇보다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성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받았을 뿐이에요."

사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거짓말이 섞인 것도 아닌 데다 굳이 사실을 그대로 전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웃으면서 일부러 애매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반지가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교단에 소속된 성기사에게 원하는 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성물(?物)이라고!"

"물론이죠. 성녀님께 직접 설명을 들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진짜 미쳤어. 어떻게 그런 걸 가지고도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거야…."

자신은 대체 무슨 녀석을 건드린 것이냐며 한탄하는 티아의 푸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마찬가지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동행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로나 종기사님.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동행인은 마르셀 이단 심문관이 접견이 끝나면 자신을 찾아오라며 붙여준 종기사 로나였다.

"…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급히 놀랐던 기색을 숨기는 로나였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자각하며 느낀 부끄러움으로 살짝 붉게 상기된 얼굴은 숨길 수 없었다.

"이단 심문소를 찾아갈 생각이야? 저기…나는 안 가면 안 돼?"

"안돼요. 티아는 중요 참고인으로 증언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이단 심문소를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티아는 안색을 파랗게 물들이며 자신은 빠져도 되겠느냐며 물었지만, 당연히 나는 안된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그렇겠지…."

체념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티아의 모습은 마치 처형장으로 향하는 사형수의 걸음걸이처럼 보였다.

"티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약속은 꼭 지키는 편이랍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불안한 거라고!"

그렇게 소리치며 성난 고양이처럼 날을 세웠던 티아는 내가 아무런 대답 없이 웃음으로 응수하자 절로 기가 죽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약속은 꼭 지키라고."

"…두 분은 사이가 참 좋으시군요."

로나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가볍게 농담 삼아 한마디를 덧붙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사이가 좋기는 무슨! 저 녀석은 수녀원에서 매일 세이사랑 딱 붙어서 다니던 녀석인데!"

끓는점이 낮은 티아가 로나의 말에 발끈하여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안 그래도 어색했던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지고 말았다.

"아…그게 아니라…."

자신이 순간적으로 발끈하여 소리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티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아아, 몰라! 그냥 다 내가 잘못했어!"

─결국, 성대하게 자폭했다.

하필이면 그 시점이 이단 심문소에 거의 다 도착한 시점이라 이단 심문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대하게 자폭한 티아의 절규를 듣고 고개를 내민 것은 덤이었다.

*

"대단하군."

이동하는 과정에 잠깐의 소란이 있었지만, 우리는 무사히 마르셀 이단 심문관이 집무실로 사용하는 방에 도착하여 마르셀 이단 심문관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 역시 내가 손에 낀 '서약의 열쇠'를 보는 순간 놀라움에 눈동자가 잘게 떨렸지만, 언제나 냉철한 모습으로 성스러운 임무에 임하는 이단 심문관답게 이내 평정심을 되찾으며 감탄했다.

"그래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할 생각이십니까. 에일라 성녀 후보님."

내가 성녀 후보생이 되었음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면 조만간 열릴, 성녀 후보생들에게 교황이 직접 세례를 내리는 미사에 참석해야 했지만, 마르셀 이단 심문관은 이미 내가 성녀 후보생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했는지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굳이 존대를 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셀 이단 심문관님. 이전처럼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물론 에일라와 비교해서 나이 차가 상당히 나는 마르셀 이단 심문관에게 존대를 듣는 것은 전생의 삶에서 배웠던 도덕관념을 지독하게 자극해댄 탓에, 나는 마르셀 이단 심문관에게 존대를 붙이는 것은 그만둬 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성녀 후보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혹시 하명할 일이 있다면 부디 말씀해 주시길."

"아, 그것에 관해서는 부탁할 일이 있어요."

"말하게. '서약의 열쇠'를 지닌 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성기사로서 서약을 맺은 자의 의무이니."

마르셀 이단 심문관을 비롯하여 이단 심문소에 소속된 이단 심문관들 역시 성기사로서 서약을 맺은 인물이니 '서약의 열쇠'를 가진 내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앞길의 여기저기에 깔린 지뢰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이 권리를 아낌없이 사용할 생각이었다.

'아이셀 오스라드라고 했던가? 어디 낯짝을 좀 볼까. 아, 그러고 보니 성기사단의 그 녀석도 있었지.'

*

"만나서 반가워요. 아이셀 오스라드 씨."

"날 모욕할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드디어 나를 죽이려 했던 아이셀 오스라드와 마주한 나는 내 인사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아이셀의 모습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사납게 짖는 개는 사실 겁쟁이라 물지 않는 개'라는 말마따나 이미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것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셀의 반응에 위축될 일은 없었으니, 오히려 아이셀의 날카로운 반응은 가소로웠기 때문이리라.

"흐읍…."

…방 밖에서 대기하도록 이단 심문관들을 내보내고, 내 옆에 동석하게 한 티아의 경우는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뭐, 방금 그 말로 인사는 받은 셈 치도록 하죠. 하지만 딱히 그쪽을 모욕할 생각은 없다는 건 알아두세요."

"그 독사 같은 혀는 여전히 잘도 놀리는군."

아이셀은 여전히 내게 독설만 내뱉을 뿐, 증언으로 사용될 만한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은 금이라고 하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아이셀 오스라드 씨, 당신에겐 일부러 청연초를 시네티 마을 안에서 불태우는 것으로 시네티 마을 사람들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혐의가 걸려 있습니다."

아이셀에게 걸린 혐의는 이단 혐의였다.

청연초라는 물건은 본래 불에 태우면서 나는 냄새가 주변의 마수를 불러모은다는 특성 탓에 교단과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등에 의해 철저한 관리를 받는 물품이다.

그런 물건을 몰래 대량으로 시네티 마을 내에 들인 것도 모자라 사람을 해할 목적으로 청연초가 가득 들어찬 창고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으니, 아이셀이 저지른 일은 이단 심문소에 끌려가 그 악명을 직접 확인할 기회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야기할 곳을 잘못 찾아온 것 같군. 나는 그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아니면 내게 억지로 혐의를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셀.

그러나 아이셀에게는 안타깝게도, 이미 전황은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상황이었다.

"흐음, 아이셀 오스라드 씨는 티아 이글라스, 니어 파른햄, 브렌다 발렌, 그리고 이외에도 몇몇 수습 수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던 전적이 있더군요. 그리고 마침 그 당사자도 증인으로 여기 참석했고 말이죠."

수도 리아트로 올라오기 전에 레이첼 수녀를 통해 건네받은 문서를 꺼내 아이셀 앞에 들이대니 문서의 내용을 확인한 아이셀의 표정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주 뛰어난 조력자분이 있으셨거든요."

이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리피샤 수녀원장이었다.

자료를 건네준 레이첼 수녀의 말대로라면 언젠가 한 번 기회를 잡아 솎아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참에 대청소를 하는 기분으로 싹 밀어버릴 생각이라고 했다.

아마 수녀원에서도 자신들의 비리가 밝혀진 수습 수녀들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겠지.

"자, 어쩌실 생각인가요? 아이셀 오스라드 씨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입니다."

하나는 계속해서 혐의를 부정하다 그대로 혐의가 확정되어 이단 심문소를 쉴 틈 없이 풀코스로 즐기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는 아이셀 오스라드 씨가 현명한 상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거래를 하죠."

내가 내민 목줄을 받아들이고 아이셀 자신의 혐의를 직접 일을 실행한 부하에게 모두 떠넘기는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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