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목줄 (3)
* * *
"…그럼 이 내용을 바탕으로 계약하도록 하지."
"좋아요. 이 내용이라면 저도 불만은 없어요."
나와 아이셀이 대략적인 합의를 마친 뒤, 아이셀은 자신이 부리는 할렌디스의 사제를 호출했다.
"저는 아이셀 님의 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비켜 주시죠."
"지금 방 안에선 성녀 후보님이 심문을 진행하는 중이다. 심문이 끝나기 전에는 들여보낼 수 없다."
잠시 후, 문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말다툼을 하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다.
아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이단 심문관과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할렌디스의 사제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들여보내세요."
"에일라 후보님, 그렇지만 이 죽음의 사제가 후보님께 어떤 짓을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할렌디스의 사제를 방 안으로 들이기를 요청했지만, 방문을 지키고 서 있던 이단 심문관은 죽음의 사제를 함부로 방 안에 들일 수 없다며 난색을 보였다.
"괜찮으니까 들여보내세요. 저도 굳이 명령을 내리고 싶진 않아요."
"…에일라 님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못마땅하다는 감정이 여전히 이단 심문관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내 요청에 이단 심문관은 마지못해 할렌디스의 사제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이셀 님. 부르셨습니까."
아이셀의 호출을 받고 방으로 들어온 할렌디스의 사제는 무척이나 조그마한 체구의 소녀였다.
기독교의 그것과 비슷한 복장을 하는 길더스텐의 사제들과는 달리 소녀의 복장은 까만색의 로브로 온몸을 뒤덮는 허름한 차림새였고,거기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은빛의 가면과 한 손에 든 등불, 등에 짊어진 체구에 비해 커다란 낫은 마치 사신(死?)을 연상케 했다.
"히익."
티아는 그런 소녀의 모습에 압도되었는지 한심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피했고, 방금 문을 열어준 이단 심문관은 무슨 일이 있다면 곧바로 호출하라는 눈빛을 내게 보내왔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지만 소녀는 방 안의 다른 이에게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고 아이셀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죽음의 신께 맹세하는 계약'을 준비해줘. 계약하는 건 나야."
아이셀은 귀찮다는 듯이 팔을 휘휘 저으며 당장 '죽음의 신께 맹세하는 계약'을 준비할 것을 소녀에게 명령했고,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것을 거부했다.
"안됩니다. 저는 아이셀 님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아이셀 님을 돕기로 했습니다. 아이셀 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순 없습니다."
"너…."
아이셀이 소녀의 눈을 노려보며 압박을 주었지만, 소녀는 그런 아이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셀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흐음, 어째서 이 계약이 오스라드 씨에게 해가 된다는 거죠?"
그대로 두면 일이 전혀 진행되지 않겠다 싶어 내가 질문하자, 소녀는 계속 아이셀을 향하던 고개를 비로소 내 쪽으로 돌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소녀는 놀란 얼굴을 하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어째서 두 사람의 영혼이 한 몸에 공존할 수 있는 거죠?"
─그대로 폭탄을 터뜨렸다.
*
에일라가 아이셀과의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마차 안.
'대체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티아 이글라스는 도저히 에일라 넬런이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수녀원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더니, 어느 날을 기점으로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는 에일라 넬런은 티아 이글라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네티 마을에 나타난 악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입혔던 그 거대한 빛의 창은 도대체 무엇이었으며, 그 무시무시한 이단 심문관을 마주하고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성녀를 면담하더니 교단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성기사단을 원하는 대로 차출할 수 있는 '서약의 열쇠'를 차고 나타나지를 않나, 이번에는 그 오스라드 상단의 후계자인 아이셀 오스라드조차 한 번 훑어보고 나서 감탄할만한 사업계획서까지 미리 작성해서 거래의 재료로 던져주었다.
그리고 죽음의 신을 모시는 사제도….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을 건드린 거야?'
에일라 넬런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티아 이글라스는 자신의 손으로 에일라의 뺨을 쳐서 두엄더미에 처박은 전적이 있었다.
설사 에일라가 이 일로 앙심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전적이 있는 이상, 티아 이글라스는 현직 성녀의 총애를 받는 성녀 후보를 괴롭혔던 마녀라는 오명이 따라붙을 것이 분명했다.
'성녀 후보를 악독하게 괴롭힌 사악한 마녀라는 오명을 달고 멀쩡히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성녀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교황과 함께 교단을 대표하는 두 개의 태양이며 길더스텐을 신앙하는 키니아 제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오물 위에 구르게 했다는 악명을 가진 사람의 말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안돼! 그런 악명까지 달고 평생 수녀원에서 썩고 싶지 않아!'
이미 아이셀 오스라드가 에일라 넬런에게 굴복한 이상, 그녀를 지켜줄 배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리피샤 수녀원장이 휘두르기 시작한 칼날을 피할 길이 없었고, 더 혹독한 생활을 강요받는 수녀원으로 옮겨질 것이 분명했다.
"부, 부탁입니다. 살려주세요…."
결국, 티아 이글라스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에일라 넬런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자비를 애걸하는 것뿐이었다.
"왜 그러시죠? 저는 티아를 죽일 생각이 없는데요?"
거짓말이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에일라 넬런이 티아 이글라스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굳이 에일라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알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지,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티아 이글라스를 가만히 둔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제발…부탁입니다. 어떻게 다뤄도 좋으니까 부디 목숨만은…."
티아는 자신의 얼굴에서 눈물과 콧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막무가내로 에일라에게 매달렸다.
그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 말고는 살아날 방법이 없는 자의 발악이었다.
'얘는 또 왜 이래?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그러나 정작 티아 이글라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에일라는 어이없음과 짜증이 반씩 섞인 시선으로 자꾸만 자신에게 매달리는 티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흠, 일단 뭐라도 말을 해 줘야 떨어질 텐데 어쩐다….'
슬슬 숙소로 돌아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만만치 않게 쌓인 피로를 털어내고 싶었던 에일라는 자꾸만 들러붙는 티아를 떼어낼 핑계를 고민했고, 이내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티아에게 맡겨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어떤가요?"
"뭐, 뭐든 하겠습니다!"
즉답이 돌아왔다.
티아로서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담긴 대답이었지만, 에일라의 눈에 그 모습은 산책가자는 말에 재빨리 꼬리를 흔드는 애완견의 행동처럼 보였다.
"좋아요.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보죠. 티아는 '뤼네의 꿈'에 대해서 잘 아나요?"
"……."
찔리는 것이 있었던 티아는 입이 순식간에 합죽이가 되면서 불안한 시선으로 에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제겐 바로 그 지식이 필요한 거니까요."
"무, 무슨 일을 시키실 생각인가요?"
긴장한 목소리로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묻는 티아의 질문에 에일라는 짧게 대답했다.
"마약 단속이라고나 할까요?"
*
"어이, 티롤프! 그 소식 들었어?"
"일단 진정해. 무슨 소식이길래?"
길더스텐 교단 소속의 성기사들이 모여 수련하는 수련장.
조만간 다가올 승급시험을 앞두고 수련에 전념하던 티롤프는 놀라운 소식이라며 호들갑을 떨며 들이닥친 동료를 진정시키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티롤프 너, 승급시험에 바빠서 바깥소식은 영 깜깜이인 모양이구나? 지금 수도가 에일라 영애가 돌아왔다는 소식으로 떠들썩해!"
동료의 입에서 '에일라'라는 이름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티롤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에일라 영애가?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묻는 티롤프의 목소리는 온기가 완전히 빠져나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눈빛은 당장에라도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진정은 네가 해야겠는데? 어우, 눈빛 살벌한 것 봐라."
그 모습에 소식을 전하러 온 동료 성기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티롤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됐으니까 말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하지만 여전히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티롤프의 모습에 동료 성기사는 알았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망할 악마 놈이 마수를 이끌고 한 마을을 습격했는데, 그 공격에서 홀로 마을을 지켜낸 것이 에일라 영애라서 이번에 성녀 후보로 뽑히게 되었다고 해."
수도에 퍼진 소문은 사실보다 상당히 부풀려져 있었지만, 직접 시네티 마을을 찾아간 마르셀 휘하의 이단 심문관이 아닌 이상에야 수도에서 그 사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믿을 수 없어. 그 여자가 홀로 악마를 쓰러뜨려?"
티롤프는 동료가 전해온 소식이 무척이나 질 나쁜 농담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에일라 넬런은 신의 축복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오히려 신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죄악의 숫자만 하더라도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였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을 상처입힌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에일라 넬런이 성녀 후보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
도저히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던 티롤프의 손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고, 티롤프가 손에 쥐고 있던 연습용 목검의 손잡이에서 '뿌드득'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야, 야! 그러다 손잡이 부러지겠어! 야! 그렇다고 던지진 말고!"
그 소리를 들은 동료 성기사가 황급히 티롤프를 말렸지만, 티롤프는 이가는 소리와 함께 연습용 목검을 수련장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빠각
어찌나 세게 내던졌는지, 수련장 바닥에 부딪힌 연습용 목검은 떨어진 수련장 바닥에 흙을 흩뿌리며 두 조각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미안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어. 나중에 고해소를 찾아가 봐야겠어."
연습용 목검이 쪼개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던 티롤프는 곧바로 동료 성기사에게 사과했다.
"아, 아냐. 너도 참 어지간히도 싫어하는구나. 내가 괜한 소리를 했어. 미안하다."
동료 성기사의 놀람 섞인 사과에 티롤프는 두 조각으로 쪼개져 버린 연습용 목검을 다시 주워들면서 대답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런 인간말종에게 성녀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아. 그건 길더스텐 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어."
그렇게 말하는 티롤프의 말투에는 에일라에 대한 짙은 적의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