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목줄 (4)
* * *
'진짜 들키는 줄 알았네….'
교단에서 제공한 숙소의 푹신한 침대 위에 누운 나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어째서 두 사람의 영혼이 한 몸에 공존할 수 있는 거죠?"
아이셀이 불렀던 할렌디스의 사제, 유마가 나를 보자마자 꺼낸 말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상황 자체는 내가 시치미를 떼는 것으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아이셀과의 거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물론이고, 지금도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처음 수녀원의 성당에 들어갈 때만 해도 빙의한 에일라의 몸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고, 어떻게 해야 내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상황을 달관했다고 해야 할지, 좋든 싫든 에일라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유마의 말을 들음으로써 다시금 그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한 몸에 공존하는 두 사람의 영혼….'
영문도 모르고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나'라는 존재가 에일라의 몸을 차지했다면 원래 에일라의 몸에 있었던 '에일라'라는 존재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 말이다.
'내가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마의 말대로라면 내가 에일라의 몸을 빼앗은 걸까.'
차라리 유마가 나를 보고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의문은 생각 한구석에 묻어둔 그대로 가만히 있었겠지만, 이미 말을 들은 이상, 나는 이 사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에일라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 멋대로 입이 움직였던 현상…. 그건 에일라의 영혼이 한 일일까?'
생각해보면 꽤 가능성이 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입은 특수한 질환을 앓는 것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그런 질환은 특정한 단어가 반복적으로 튀어나오는 증상을 보이지,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바를 완전히 다른 어투로 바뀌어 말하는 증상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아직 에일라의 몸에 남아있던 에일라의 영혼이 개입한 결과라면 그 증상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유마의 말대로라면 에일라의 영혼은 분명히 이 몸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
하지만 그 사실을 떠올린다고 한들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에일라의 영혼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런 시도를 했다가 신체의 주도권을 에일라에게 빼앗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찝찝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는 수밖에 없나.'
결국, 나오는 해결책이라고는 '방치'말고는 없었다.
'…교단이 관리하는 도서관이라도 뒤져봐야 할까.'
계속 고민하던 와중, 문득 성녀와 담소를 나누던 도중에 잠시 이야기의 주제로 나왔던 교단 산하의 도서관이 떠올랐다.
독서를 무척이나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성녀가 말하기를, 장서의 수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평생을 들여도 다 읽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 그중 어딘가에 내가 고민하는 것에 관한 해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내일 티아를 보내고 가 볼까요."
티아에겐 이미 맡겨놓은 임무가 있으니 이단 심문관 몇 명을 붙여서 보내놓고 나는 홀로 도서관을 찾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내가 내일 할 일이 정해졌다.
어차피 성녀 후보를 임명하는 임명식까지는 일주일 가까이 여유가 있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
"감사합니다. 신부님. 길더스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길더스텐님 앞에서 고백한 형제님에게 길더스텐님의 자비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고해를 담당하던 신부와 인사를 주고받는 것으로 고해를 마치고 어두컴컴한 고해소 바깥으로 나온 티롤프의 눈앞으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내리 쬈다.
'후우. 이렇게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서야.'
이름 모를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소리와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가 고해소를 막 빠져나온 티롤프의 귀를 간지럽혔고, 티롤프는 자신이 어제 자신이 범했던 죄를 떠올리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동료를 놀라게 했으며, 엄연히 성기사단의 재산인 연습용 목검을 망가뜨렸다.
이래서야 어떻게 길더스텐님의 뜻을 대리하여 악을 물리치는 훌륭한 성기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너희 역시 죄지은 이를 용서하라, 그리하여 너희 역시 용서를 받을지니….'
성전(??)의 구절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티롤프는 평소의 일과처럼 곧바로 수련장을 찾는 대신 도서관을 찾았다.
아침 수련을 거르는 것은 무척 뼈아팠지만, 도서관에 비치된 수많은 경전과 복음서, 신학 연구서 등을 탐독하는 것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이번에 읽을 것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 중인 부제를 향해 묵례로 가볍게 인사를 건넨 티롤프는 우선 평소에도 자주 찾는 서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가에는 가죽으로 표지가 튼튼하게 장정된 것은 물론이고, 조악한 품질의 종이에 인쇄한 탓에 손을 대면 부스러질 것만 같아 섣부르게 손을 대기 꺼려지는 것까지 다양한 '성전'들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자신이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지론디서부터 시작하자.'
티롤프는 그중에서 무엇을 읽을까 잠시 고민하다 '용서'와 '사랑'을 주로 논하는 지론디서를 선택했다.
어제의 일이 반영된 도서 선정이었다.
"……?"
자신이 읽을 책을 정한 티롤프는 책을 뽑아 독서대로 향하던 도중, 이상한 풍경을 마주했다.
"아니에요. 이건 넘어가죠…."
독서대에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 그 내용을 부지런히 읽어내려가는 자그마한 체구의 자매.
'…열심이군.'
여기까지는 그리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자매가 쉬이 구할 수 없는 책을 찾아 교단의 도서관을 방문하여 열정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종종 있던 일이었으니까.
'…기적 연구서?'
하지만 그 자매가 부지런히 탐독하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길더스텐님과 여러 성인의 말씀을 전하는 성전이나 복음서가 아닌, 그저 길더스텐님의 위광을 드러내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한 '기적'을 연구한 책들이었다.
'아직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습 수녀인가.'
보통 그런 책을 부지런히 읽는 사람은 대부분 기적을 행하는 사제의 모습을 선망하여 자신도 빠르게 기적을 행하고 싶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제자매인 경우였다.
당연하지만, 길더스텐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길더스텐님의 힘에만 집착하는 이런 방식은 교단에서도 옳지 못한 방식이라며 피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괴짜는 존재하는 법.
갓 입교한 수습 수도자 중 열에 한 명꼴로 기적의 사용법과 그 원리에 관해 탐구하려는 형제자매는 꼭 나타나곤 했다.
'눈앞의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일단 말을 붙여볼까?'
티롤프는 저 자매 역시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고, 저 자매가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한마디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매가 차지한 독서대를 향해 다가갔다.
"자매님, 집중하는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티롤프는 우선 주위에 폐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자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이 방식은 몸에 걸리는 부하가 너무 심하군요…."
하지만 이미 책에 몰입할 대로 몰입한 자매에게 티롤프의 말은 전혀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책의 내용을 중얼거리면서 되짚는 자매의 모습에 티롤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전과 복음서를 저렇게 집중해서 읽었다면 나중에 훌륭한 성녀가 될 자매라고 생각했을 텐데.'
힘을 쏟아야 할 곳을 엉뚱한 곳에 쏟아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이나마 앞서서 길을 걸었던 이로서의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자매님."
그 안타까움에 다시금 자매에게 말을 거는 티롤프였다.
"…글로만 보니 복잡하네요. 역시 '성스러운 화살'을 배울 때 코니엘 신부님이 잘 가르치신 거였어요."
자매의 주위엔 마치 소리를 흡수하는 보이지 않는 방벽이라도 쳐진 듯, 티롤프의 말은 전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자매님."
결국, 티롤프는 말로 불러서는 이 자매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판단에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
─털썩
마침내 뒤를 돌아보는 자매의 모습에 티롤프는 준비했던 설교는커녕,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에일라 넬런…."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분노로 인해 티롤프의 얼굴에는 피가 쏠리고, 안정적이었던 호흡이 급격하게 거칠어졌다.
"…저를 아는 눈치시군요?"
짐짓 자신을 모르는 척하며 태연하게 되묻는 에일라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티롤프는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분노를 억눌렀다.
'…참아야 한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교단의 도서관,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다가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생각에 티롤프는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어째서라니요. 저 역시 엄연한 교단의 일원으로서 자유롭게 교단의 도서관을 이용할 권리가 있답니다."
마치 티롤프를 조롱하듯 태연하게 대꾸하는 에일라.
티롤프는 그 뻔뻔한 모습에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에일라로부터 등을 돌렸다.
"어떤 비열한 수를 사용해서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는 너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다."
티롤프는 맹수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에일라에게 경고했지만, 에일라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고 티롤프가 떨어뜨린 책을 집어 티롤프에게 건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고결한 성기사가 성전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되겠나요?"
마치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며 되묻는 것만 같은 에일라의 말에 티롤프는 굴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에일라가 건넨 책을 잡아채듯 받아들고서는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대출을 부탁합니다."
물론, 도서관의 장서를 무단으로 반출할 수는 없으니 사서역을 맡은 부제를 찾아가 책을 대여한다는 절차는 확실히 밟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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