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목줄 (5)
* * *
'하아,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여기서 티롤프를 만날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의 충격에 도저히 책을 읽을 기분이 들지 않아, 나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설마 도서관을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에일라의 기억 속에서 티롤프는 항상 수련장에 박혀 수련에만 전념하는 '수련 바보'의 이미지가 강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수련에나 전념하지, 책이라고는 전혀 읽을 것 같지 않은 인상의 티롤프가 도서관을 찾아올 것이라고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에일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엄청나게 열 받은 표정이 되었지.'
티롤프는 에일라를 향한 적개심만 놓고 보자면 아이셀보다도 더한 사람이었다.
에일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라니, 무척이나 사무치는 원한을 품지 않고서야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분별없이 화를 아무렇게나 막 터뜨리는 사람은 아니야.'
조금 전의 티롤프는 도서관이라는 주변 환경과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자신의 분노를 억눌렀다.
혹시나 싶어 도발하는 말을 몇 마디 던져보았지만, 티롤프는 끝끝내 자신의 분노를 삭이며 서가에서 꺼내왔던 책까지 대출받아 도서관을 떠났다.
만약 티롤프가 단순무식한 성격이었다면 주위의 시선이나 상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에일라를 향한 자신의 분노를 터뜨렸을 것이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잘만 다루면 충분히 목줄을 채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주변 환경을 살펴 자신의 충동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을 보면, 티롤프의 행동을 억제할 환경만 조성할 수 있다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약의 열쇠를 사용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상대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사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서약의 열쇠'를 사용하면 티롤프를 내 뜻대로 따르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결국 더 큰 반감만 사게 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원래 사람이란 건 억지로 억누르면 어디로든 반발심이 튀어나오는 존재니까.'
어찌 되었든 성기사단의 촉망받는 인재로서 성기사단을 이끄는 고위 성기사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티롤프다.
계속 적으로 삼아 다른 성녀 후보에 힘을 싣게 두느니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내게는 장기적으로 훨씬 이득이었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할까.'
아직 생각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고, 티롤프에 관한 문제 말고도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기저기 산적해 있었다.
'위클라인 백작가의 차남, 아덴츠와도 접선할 필요가 있는데 접선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네.'
차라리 아덴츠가 차남이 아니라 장남이었다면 내가 위클라인 백작가를 이을 차기 가주라는 명분을 이용해 억지로라도 만나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작가를 이을 장남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새로이 작위를 받아 기사가 되든, 황궁에 들어가 관료가 되든 해서 가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수성가를 이루어야 하는 차남의 입장인 아덴츠가 단순히 내가 저택을 방문했다고 나를 만나러 올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손을 쓰기엔 가진 패가 너무 없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함정이 득실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나 다름없고.'
게다가 아덴츠는 아이셀처럼 약점을 잡힌 것도 아니고, 티롤프처럼 강제로라도 말을 듣게 할 수단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덴츠도 시간을 두고 방법을 찾아봐야 할까? 그럼 황실 호위대의 필라스가 남는데…이쪽은 그냥 포기하는 게 좋겠어.'
교단과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황실의 충직한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황실 호위대의 인물을 섣부르게 만나려 했다가는 자칫 교단 내에서 내 입지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이미 키니아 제국의 황실은 고위 성직자의 임명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교단과의 알력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황실의 손이 닿지 못하는 지방의 제국민에게까지 닿는 교단의 입김은 상당히 강력했고, 황실은 그런 교단의 잠재력을 경계하며 교단을 향한 견제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녀 후보인 내가 황실 쪽의 인물과 접촉하는 것은 교단 내부의 지지를 끌어모아도 모자랄 판에, 친황실파를 제외한 교단 내부의 지지를 내다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남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자를 끄적이던 종이 위에는 어느새 단어 두 개가 적혀있었다.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 넬런 백작가인가.'
둘 모두 어떻게 보면 에일라가 겪는 문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상대였고, 가장 해결하기도 어려운, 골치 아픈 문제였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지금 내가 이 둘을 건드려도 되는 걸까?'
에일라가 수녀원으로 쫓겨나게 된 원인은 '에일라 넬런 영애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음지에서 괴롭혔다.'는 사실을 연회장에서 폭로 당한 탓이었다.
그러나 사실, 귀족 사회에서 경쟁 상대를 묻어버리기 위해 마차, 와인, 테라스로 대표되는 지저분한 암투를 벌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은밀하게 서로의 잔에 독을 타고, 며칠 전만 해도 멀쩡했던 마차 바퀴가 갑자기 떨어져 나가는 살벌한 귀족의 세계에서, 에일라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에게 저지른 악행은 따지고 보면 가문에서 쫓겨나 수녀원에 유폐될 만큼의 악행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던 셀린 엘리어드 영애야말로 '귀족적이지 않다.'면서 사교계에서 웃음거리로 취급했을 만큼, 에일라의 행동은 수도 귀족 사이에서는 흔하디흔한, 소소한 '견제'에 들어가는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에일라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독살하려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야.'
티롤프, 아덴츠, 필라스, 그리고 아마도 정보를 제공했을 아이셀까지.
그들도 사교계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기에, 에일라를 올가미 안으로 집어넣기 위한 결정적인 증거로 독살 시도가 있었음을 결정적인 증거로 내세웠다.
에일라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격렬하게 항변했지만, 모든 상황이 에일라를 가리키고 있었던 탓에 에일라는 결국 다니던 황립 아카데미에서도 제명되고, 가문에서도 쫓겨나 강제로 수녀원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내가 볼 수 있었던 에일라의 기억 속에서 에일라는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해 정신적으로 괴롭히기는 했어도,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몸에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려는 시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독살 시도라니, 너무나도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는가.
거기다 너무나도 딱 맞아 떨어지는 알리바이, 너무나도 딱 맞아 떨어지는 증거물, 너무나도 딱 맞아 떨어지는 증언까지.
'에일라는 함정에 빠진 거야.'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문제라면 그 함정을 기획한 것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다는 것.
셀린 엘리어드 영애보다는 넬런 백작가 쪽이 더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그 모든 것을 기획하고 연기를 해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지금은 교단의 비호를 받는 에일라를 건드리기 껄끄러워서 직접 손을 뻗지는 않겠지. 하지만 에일라가 교단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지체 없이 손을 쓸 거야. 어쩌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노릴 수도 있고.'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 언제 나를 향해 뻗어올지 모르는 모략을 떠올리자니 절로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에일라님. 죄송합니다. 시장에서 티아 이글라스 자매가 의문의 무리에게 납치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도서관을 나와 숙소로 돌아온 나를 맞이한, 상처투성이의 이단 심문관의 사과와 함께 현실이 되었다.
*
'내가 어째서 이런 일을….'
티아 이글라스는 참으로 오랜만에 수녀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었다는 해방감을 만끽할 틈도 없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숙소를 돌아보았다.
"잘 다녀오세요. 티아."
"……."
하지만 티아가 그런다고 에일라가 티아에게 명령한 내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저, 저기요…."
"예. 말하십시오."
"……."
용기를 내어 무척 위축된 목소리로나마 이단 심문관에게 말을 걸어본 티아였지만,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하는 이단 심문관의 모습에 기가 죽은 티아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서워!'
수도의 길거리를 걷는 동안 시종일관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하는 이단 심문관이 두렵기도 했거니와, 티아 이글라스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으…이럴 때 한 대 딱 피우면 좋았는데….'
티아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손을 보며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도리질을 치며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미쳤어? 뤼네의 꿈을 시장에 유통하는 상인을 만나서 배후를 조사해 보라는 명령을 받아놓고 뤼네의 꿈을 피울 생각을 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뤼네의 꿈을 유통하는 이들을 조사해 보라는 임무를 내려준 에일라였고, 티아는 에일라라는 구명줄을 붙잡기 위해서는 무조건 유의미한 성과를 내야만 했다.
'아, 그래. 이러면 조금 낫지 않을까?'
문득 티아의 머릿속에 무시무시한 이단 심문관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에일라가 내려준 임무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명안이 떠올랐다.
"저, 저기.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으니 좀 거리를 두고 이동하는 편이 좋, 좋지 않을까요?"
여전히 남아있는 두려움으로 인해 다소 더듬거리는 말투였지만, 티아가 전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이단 심문관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에일라님께선 제게 티아 이글라스 자매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거리가 너무 벌어지면 유사시에 대응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아무래도 어렵다는 거절이었다.
너무 거리를 두고 이동하면 티아를 호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 하지만…."
무언가 항변하기 위해 입을 떼었지만, 덤덤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단 심문관의 얼굴을 본 티아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만 갔다.
"아! 그래요. 위장. 위장이에요."
다시금 명안을 떠올렸는지, 티아는 이번에는 말조차 더듬지 않고 자기 생각을 이단 심문관에게 말했다.
"우선 저는 뤼네의 꿈을 유통하는 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받고 나왔어요. 하지만 뤼네의 꿈은 정당하게 거래하기에는 여러모로 하자가 많은 물품이죠. 호위를 대동하고 가면 수상히 여겨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할 수도 있어요."
티아와 동행하는 이단 심문관은 위장을 위해 일단 평범한 일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티아에 비해 너무나도 건장한 이단 심문관의 체격이 문제였다.
아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이단 심문관이라는 정체까지는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싸우는 법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라는 사실까지는 눈치챌 수 있을 터.
티아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되, 호위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의 거리를 두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티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 이단 심문관은 곧바로 티아와의 거리를 벌렸고, 티아는 멀어져 가는 이단 심문관의 모습을 보고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낫네.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
아이셀에게서 받아낸 정보를 토대로 알아낸, 뤼네의 꿈을 거래하는 상인이 운영하는 가게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파는 것이 알려져서 떳떳한 물건은 아니었기에 가게는 시장에서도 무척이나 외진 골목길을 여러 번 거쳐 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장소에 있었으며, 한낮임에도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 그럼 도착했으니 문을 노크…."
"티아 자매! 물러서십시오!"
아이셀에게 받아낸 정보대로 가게 문을 노크하려던 티아의 손은 자신을 향해 외친 이단 심문관의 외침을 듣고 멈춰 섰으나, 티아가 두드리려던 문은─
"꺄아악!"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벌컥 열리며 티아를 어두컴컴한 내부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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