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28화 (28/80)

〈 28화 〉 목줄 (7)

* * *

"아…."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든 생각은 무척이나 창피한 짓을 또 반복하고 말았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죽고 싶다….'

주변을 살펴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절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 쥐며 절규했다.

'이런 머저리 같으니! 지금 네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거야!'

대성당에 성녀 후보들이 모여 정식으로 성녀 후보생이 되었음을 인정받는 세례 의식을 치르는 미사가 열리기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한 번 쓰러지면 꼬박 하루 또는 이틀 내내 잠만 자야 하는 강력한 기적을 사용하는 대형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고개를 돌려 창가 너머로 시선을 옮기니, 창밖으로는 이제 막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적어도 하루는 날아갔다….'

그것으로 나는 최소 하루 이상의 시간을 날렸음을 직감했다.

내가 이단 심문관에게 '치유'를 사용하고 쓰러진 것이 해가 중천에서 막 내려올 무렵이었으니, 겨울에서 초봄으로 넘어가는 때의 일출 시간을 고려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날려버린 시간이 19시간에 달한다는 계산이 나왔으니 말이다.

"…티아를 구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건에는 최소한의 피해로 그 사건을 종결시킬 수 있는 골든 타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곧바로 이단 심문관들을 불러 티아를 납치한 자들의 뒤를 쫓게 하기는커녕 어떻게 티아가 납치된 것인지 제대로 된 사정조차 듣지 못한 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렇다면 이미 나는 티아를 구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요."

티아를 납치하도록 사주한 자의 최종 목표는 결국 에일라다.

아마도 티아를 인질로 삼아 내 행동에 제약을 걸거나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이 목적일 터.

'그렇다면 티아의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사실 그것조차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측일 가능성이 컸지만, 일단은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자꾸만 밀려오는 초조함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우선은 이단 심문소로 가서…."

"아마 가도 없을 거다."

도움을 청하러 급히 이단 심문소로 향하려던 나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이단 심문관들이 구출을 위해 떠났다는 말이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티롤프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티롤프가 여기에 있는 거지?

*

"끄응…."

티롤프는 도서관에서 에일라를 만난 이후부터 언짢은 기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그 악녀가 성녀 후보라니, 주교님들과 성녀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혹여나 길더스텐님의 기적처럼 에일라가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납득시키려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티롤프가 도서관에서 만난 에일라는 분명 전보다는 사람을 대할 때의 날카로움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타인의 뻔뻔하게 상대방의 속을 긁어대는 점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따악

''저를 아는 눈치시군요'라고? 하, 뻔뻔하기는.'

수련을 아예 거를 수는 없었기에 목검을 쥔 티롤프였지만, 도서관에서 짐짓 자신을 모른척하는 에일라를 떠오르니 목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따악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지도 않으면서.'

티롤프의 검격을 버티지 못하고 밀짚을 채워 넣은 허수아비의 옆구리가 터져나가며 밀짚이 우수수 흩날렸다.

─따악

"티롤프!"

"…아차."

자신을 부르는 벽력 같은 목소리에 티롤프는 비로소 자신이 어제처럼 목검에 감정을 담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죄송합니다. 루이스 상급 기사님."

티롤프의 이름을 우렁차게 외친 것은 성기사단을 이끄는 루이스 상급 기사.

티롤프가 동경하는 이상적인 성기사 중의 하나이자, 티롤프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검술을 직접 지도해준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검에 지나치게 감정이 실려있구나. 어찌 그리 화가 났느냐."

"…면목 없습니다."

티롤프는 루이스 상급 기사의 지적에 즉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부끄러움이 밀려와 티롤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네가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하니 사정은 묻지 않으마. 하지만 오늘 수련은 이만 쉬는 것이 좋겠구나. 네가 계속 이렇게 검을 휘두른다면 기사단에 남아나는 목검과 허수아비가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에일라 넬런 때문에 완전히 글렀군.'

결국, 티롤프는 루이스 상급 기사의 조언을 따라, 조금만 허수아비를 두드려도 부러질 정도로 수명이 다해버린 목검을 수명이 다한 무구를 따로 담아놓는 수거함에 집어넣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수련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렇게 수련장을 빠져나온 티롤프였지만, 하루 대부분을 수련으로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던 티롤프로서는 막상 생겨난 자유시간이 무엇보다 거북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시 여기인가.'

그저 찝찝한 기분이 풀리기를 바라며,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티롤프가 마침내 도달한 곳은 하필이면 아침에 에일라를 만났던 도서관 앞이었다.

'돌아가자.'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티롤프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괜히 도서관에 다시 들어갔다가 에일라를 마주치면 안 그래도 찝찝했던 기분이 더 나빠질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역시.'

티롤프의 예감이 맞았음을 증명하듯, 티롤프가 도서관에서 발길을 돌리자마자 도서관 쪽에서 에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가는 무척이나 어색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할 일도 없는데, 에일라 넬런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살펴볼까.'

그렇게 에일라와 마주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티롤프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 딱히 할 일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기적에 관한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던 에일라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경각심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에일라님,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우선은 몸의 상처부터 돌보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게 은밀하게 에일라의 뒤를 밟던 티롤프는 얼마 안 가 의외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지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왼손은 아예 짓뭉개진 이단 심문관 한 명이 티아 이글라스라는 이름의 자매를 호위하는 것에 실패했다며 에일라에게 사죄하고, 에일라는 우선 몸의 상처부터 돌보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는 모습을.

'…무슨 일이지? 저 에일라가 저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그 광경을 본 티롤프는 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에일라 넬런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이용하는 것에 도가 튼 악녀가 아니었던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괴롭히다 못해 나중에는 독살까지 시도한 악녀야말로 에일라 넬런이었을 텐데.

그런 에일라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먼저 걱정하다니?

"…조금 따끔할 수 있으니 참고 가만히 있으세요."

"예? 에, 에일라님?"

하지만 티롤프를 본격적으로 경악시킨 것은 에일라가 그다음으로 한 행동이었다.

갑자기 에일라는 이단 심문관의 짓뭉개진 손을 붙잡고 경전의 구절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에일라의 손끝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에일라 넬런이 저런 것이 가능할 리가….'

그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티롤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주교급의 사제가 사용해도 극히 미미한 효과밖에 얻을 수 없는 기적인 '치유'.

그런 상식이 종교와 기적과는 일절 관련 없는 삶을 살아왔던 에일라의 손끝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상처가 완벽하게 회복되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졌던 이단 심문관의 왼손이 다시 멀쩡한 형태를 되찾았고, 몸 곳곳에 나 있던 상처 역시 깨끗하게 치유되었다.

그야말로 교단의 역사에 기록될 교황이나 성녀가 아니고서야 일으킬 수 없는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기절했군. 그야 저런 기적을 쓰고서 몸이 멀쩡할 리가 없지.'

티롤프는 기적을 사용하고 얼마 안 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에일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적을 사용한 대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납치당했다는 다른 자매의 안위를 묻던 에일라의 모습.

'믿을 수 없지만…에일라 넬런의 행동은 분명 고결했다.'

여전히 티롤프에게 있어 에일라 넬런은 싫은 사람이었지만, 교단에 속한 성기사로서 티롤프는 에일라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문관님, 저는 기사단의 하급 기사 티롤프라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습니다만…."

티롤프는 기적을 사용하고 기절한 에일라를 앞에 두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이단 심문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심문관님은 어서 납치당한 자매를 구하러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랬었지. 알겠다. 그럼 형제에게 에일라님을 맡기지."

티롤프의 지적에 곧바로 자신이 할 일을 떠올린 이단 심문관은 기절해 쓰러진 에일라를 부탁한다는 말을 티롤프에게 남기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바뀐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에일라 넬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이단 심문관을 돌려보내고, 티롤프는 조금 전에 엄청난 기적을 일으킨 에일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에일라를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물어야 할 것이 산더미군.'

에일라가 깨어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추궁을 해서라도 알아내겠다는 무시무시한 생각과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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