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목줄 (8)
* * *
'어쩌면 좋지?!'
졸개들이 지하실을 빠져나간 이후, 나름대로 탈출하거나 바깥에 도움을 청할 방법을 찾아본 티아였지만,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뜨고 지하실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곤 무언가를 가득 담은 나무상자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응? 이 냄새 뭔가 익숙한데? 설마?'
나무상자 사이로 새어 나오는 냄새는 티아에게 있어 무척이나 익숙한 냄새였다.
'설마 저 상자 안에 든 게 다 뤼네의 꿈이야?'
그 사실을 깨닫자 묘한 기분이 된 티아였다.
뤼네의 꿈은 특수한 조건에서만 재배가 가능한 식물이었기에 그 가격은 결코 싸다고 말할 수 없었다.
티아가 아이셀에게 뤼네의 꿈을 요청했을 때도, 아이셀이 보내준 것이 한 손안에 다 들어갈 정도로 작은 주머니에 들어가는 양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설마 다른 상자까지? 아니, 여기에 있는 상자 전부가 다?'
그런데 티아를 납치한 수수께끼의 조직은 그런 뤼네의 꿈을 가득 담은 상자로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 비싼 뤼네의 꿈이 잡동사니처럼 쌓여있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마주한 티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대체 난 뭐 하는 녀석들에게 납치당한 거야?!'
"으…으으…."
그러나 동요할 시간조차 없이, 갑자기 들려온 남자의 앓는 소리에 티아는 급히 떴던 눈을 감으며 다시 기절한 척을 해야 했다.
"젠장, 아직도 머리가 울리잖아…."
소리의 근원은 괜히 말대답했다가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비 오는 날에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고 기절했던 졸개였다.
'하필이면 지금….'
티아는 긴장하며,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지 똑바로 걷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는 졸개가 깨어나 무엇을 하는지 실눈으로 바라보았다.
"하, 너무한 거 아냐.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졸개가 시작한 것은 푸념이었다.
뤼네의 꿈을 대량 재배하는 기술을 발견하고, 조직을 키우는 일에 자신이 얼마나 공헌해 왔는지에 관한 푸념.
"…에휴, 작전도 뭣도 없이 부하의 재량에 맡기다니 생각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역시 멍청한 인간은 조종하기는 쉽지만, 섬세하질 못해서 금방금방 바꿔줘야 한다니까."
별안간 푸념을 늘어놓던 졸개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자, 곧 있으면 이단 심문관 녀석들이 여기로 들이닥칠 테니 슬슬 다른 녀석을 찾아볼까. 부네 님은 하필이면 이런 번거로운 임무를 맡겨서는…."
몹시도 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서 아직 변성기가 찾아오지 않은 소년의 미성으로의 변화, 그와 동시에 그 졸개…였던 것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꾸드득, 꾸드득
중년 남성의 몸이었던 것은 소년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고, 그 분량만큼의 살덩이를 벌충하듯 박쥐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한 쌍의 날개와 짐승의 그것처럼 털로 숭숭 뒤덮인 세 쌍의 팔이 새롭게 돋아났다.
'체인질링!'
티아는 그 모습에 곧바로 졸개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체인질링.
자기 모습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악마의 한 종류로, 그 특성을 이용해 카르실리안 대륙의 각 종족 사이의 내분을 부추기거나 내부의 정보를 탈취하여 다른 악마들에게 전하는 첩자 노릇을 하기에, 이단 심문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색출하려고 하는 악마였다.
'뤼네의 꿈이 악마와 연관된 물건이었다고?'
졸개가 사실은 악마였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도 잠시, 티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뤼네의 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에 악마가 관여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오랫동안 뤼네의 꿈을 피웠던 티아는 어떤 대우를 받게 될 것인가를 떠올린 것이다.
'난 벌써 죽고 싶지 않아!'
티아의 머릿속으로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녀로 몰려 화형장으로 끌려 나가는 모습과 악마의 꾐에 넘어간 녀석이라며 군중들이 연신 던져대는 돌덩이와 오물까지.
'그, 그래. 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본 게 없는 거야.'
그렇게 자신을 억지로 납득시키며 티아는 자기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틀어막았지만, 티아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몸에서 뤼네의 꿈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던데…."
체인질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티아에게 관심을 보이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가라고! 이런 악마 같은…아니, 진짜로 악마였지?'
그 모습에 여전히 약에 취해 기절한 척 누워있는 티아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확인해 볼까?"
'안돼!'
티아가 속으로 내지르는 절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애초에 들을 수가 없었으니), 체인질링은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날카로운 바늘의 형태로 변형했다.
─푸욱
'차, 참아야 해! 여기서 비명을 질렀다간 저 악마에게 죽을 거야!'
체인질링의 바늘처럼 변한 손가락이 티아의 팔뚝에 꽂히면서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지만 티아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아냈다.
"호오, 뤼네의 꿈을 제법 오랫동안 복용한 몸이야. 보통 이 정도쯤 되면 강한 의존증에 시달리는 것이 보통인데…."
티아가 고통을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기절한 척을 하든 말든, 체인질링은 바늘처럼 변형한 손가락으로 티아의 팔뚝을 찔러 채취한 피를 보며 상당히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녀석이라면 '성공작'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나온 건 '실패작'뿐이었는데 말이야."
티아로서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대로 시간만 잘 끌 수 있다면 이단 심문관들이 들이닥쳐 자신을 구해줄 상황인데, 하필이면 악마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이다.
'제발 가라고!'
그렇게 속으로 내지른 티아의 절규가 닿은 것일까, 체인질링은 티아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쉽지만 시간이 없겠군. 역시 이단 심문관 놈들은 행동이 빠르단 말이야."
체인질링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직후, 큰 충격이 지하실을 뒤흔들었다.
"비, 빌어먹을!"
들이닥친 이단 심문관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상처를 입은 것인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졸개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구르듯 지하실로 내려왔다.
"뭐, 뭐야!"
"시끄러운 건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품위가 없거든."
당연하게도 운 없는 졸개는 지하실에 있는 체인질링과 눈이 마주쳤고, 졸개가 체인질링을 향해 삿대질하는 동시에 체인질링의 팔 하나가 졸개의 목을 꿰뚫었다.
"그워어얽@#$%!"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지는 졸개의 단말마.
"이런,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군."
과연 악마답다고나 할까, 인간 하나 죽은 것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체인질링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그래. 나중에 또 보도록 하지. 예비 실험체."
마치 잊어버린 것을 떠올렸다는 듯, 표정에 옅은 미소까지 띠며 티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체인질링.
당연하게도 그 인사를 받은 티아의 반응은─
"다시는 안 봐! 이 더러운 악마야!"
─체인질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
"다행이에요.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네요."
이단 심문관들이 무사히 데려온 티아를 앞에 두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단은 먼저 사과하도록 할까요. 티아를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않은 심문관을 데리고 조사를 보낸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 티아."
티아를 납치한 자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는지, 티아의 납치를 사주한 자가 누구이고,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사주했는지에 대한 것은 나중에 조사를 통해 알아낼 것이었고, 지금은 위험한 임무를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보낸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였다.
"아, 아닙니다. 에일라님…."
내 사과를 받는 것이 어색했는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티아.
"티아, 굳이 존댓말이나 '님'자는 붙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면, 제 옆에 있는 성기사분이 불편한가요?"
"아, 아니야. 아직도 납치 당했을 때를 떠올리면 불안해져서…."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하지.'
납치라는 사건은 정신에 커다란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만한 사건이다.
갑자기 팔을 끌어당겨져 마취제를 들이마셔 정신을 잃은 뒤, 어둡고 눅눅한 지하실에서 자신의 온몸이 묶인 채 내버려져 있었다고 생각해보라.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 아닌 이상, 크게 충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아직도 납치당했을 때의 불안함을 느끼는지, 티아의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요. 티아는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아직도 납치당했을 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붙잡고 있어 봐야 정신적인 고문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나는 일단 티아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아, 알았어."
묘하게 안도하는 기색이 되어 자신의 방으로 떠나가는 티아.
나는 그 뒷모습에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인정한다. 너는 바뀌었군."
티아가 떠나간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얼굴을 굳히고 서 있었던 티롤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는 언제나 저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렇게 남의 속을 긁는 습관은 좀 버렸으면 한다만."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티롤프가 표정을 와락 구기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티롤프를 바라보았다.
"사실 저도 티롤프를 처음 봤을 때는 이 반지를 내보여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어요."
"서약의 열쇠…성녀님이 그것까지 내주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저도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규율을 어기게 되니 어렵겠네요."
나는 엄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티롤프는 또다시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구겨졌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아무튼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서, 제가 서약의 열쇠를 써서 티롤프를 제 앞에 무릎 꿇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건 관뒀어요."
"그건 고맙군. 내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지독한 시험이 되었을 테니."
'…성기사로서의 힘을 잃는 것이고 나발이고, 그냥 에일라가 싫어서 성기사를 때려치울 생각까지 했다는 거지?'
티롤프의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런 고지식한 사람일수록 한 번 마음을 얻어두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경우가 많으니까.
"뭐, 그래요.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것만큼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일도 별로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티롤프는 제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 화해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해 주세요."
"서로 불편할 자리일 텐데? 게다가 내게 그럴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티롤프가 은근슬쩍 자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며 몸을 빼자, 나는 속으로 고소(??)를 삼켰다.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두고 서로 경쟁 중인 주제에 무슨.'
아이셀, 티롤프, 아덴츠, 필라스 모두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사랑을 받기 위해 저마다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티롤프는 이런 상황에서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 에일라의 화해를 주선했다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마음이 멀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 뻔했다.
"언제까지고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 불편한 사이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여자는 항상 아첨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다고 느낀다죠?"
"…알았다.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지."
'길더스텐님, 한 놈 더 올라갑니다.'
은근슬쩍 티롤프의 아픈 곳을 찌르니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 여심 운운은 양심에 찔렸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과정이 조금 엉성해도 결과만 훌륭하다면 세상은 그것을 훌륭한 일이었다고 기억하는 법이다.
'이걸로 티롤프에게도 '목줄'이 채워졌으니 충분히 훌륭한 결과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