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외전 세이사 밀턴의 이야기
* * *
─쏴아아아
키니아 제국의 수도, 리아트의 얼음의 달(1월) 23일은 매섭고 사나운 냉기의 신 아가드의 힘을 온전히 받지 못한 탓에 얼어붙어 눈이 되지 못한 비가 대지를 차갑게 적시던 날이었다.
"흑…흐윽…."
차가운 겨울비를 그대로 맞으며 리아트의 골목길에 주저앉아 울음을 삼키는 금발의 소녀.
그저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부랑아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소녀가 입은 옷은 그렇게 생각하기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너무나도 말끔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최근 수도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리본과 레이스 등의 장식이 잔뜩 달린 값비싼 드레스.
그런 것을 길거리의 부랑아가 어떻게 입을 수 있을 리가 없기에 평소라면 소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을 것이지만, 오늘은 차가운 겨울비를 피해 외출을 삼가고 있었기에 소녀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뭘 그렇게 한심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건가요."
─마침 비가 오는 날임에도 외출을 감행한, 단 한 명의 괴짜 같은 영애를 제외하곤 말이다.
"…훌쩍."
설마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금발의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마치 시비라도 거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길거리의 부랑아는 아닐 테고…집에서 쫓겨나기라도 하셨나요?"
금발 소녀를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날린 사람은 구름 한 점 없는 날의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머리카락에, 한없이 깊은 호수와도 같은 푸른 눈을 지닌 소녀였다.
"…아니에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푸른 소녀의 질문을 부정하는 금발 소녀.
"그렇다면 반대로 당신이 집을 나온 건가요?"
그 모습에 푸른 소녀는 다시 질문을 던졌고, 금발 소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 이런 궂은 날씨에 집을 나올 일이라…짐작 가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무엇일지 짐작도 안 되네요."
"…푸흡."
푸른 소녀의 괴상한 말에 금발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짐작 가는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평범하고 멍청하게 자라난 영애들과는 달라서 말이죠. 좀 더 세상을 일찍 깨우쳤다고 할까요? 그래서, 집을 나온 이유가 뭔가요?"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푸른 소녀의 말에 금발 소녀는 참지 못하고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건가요."
웃음을 터뜨린 금발 소녀의 행동에 불만을 표하는 푸른 소녀의 노려보는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그런 걸 물어서 어쩌게요? 당신이 제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서른 살이나 차이가 나는 매매혼을 피해 집을 도망쳐 나온 걸 어떻게 당신이 해결해 줄 수 있냐고요!"
금발 소녀는 방금까지 웃던 얼굴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만큼, 속에 맺혀있는 것을 맹렬히 토해내며 푸른 소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흐음…."
해결도 못 할 일에 괜한 관심이나 동정을 주지 말아 달라는 금발 소녀의 말에도 푸른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제가 찾던 세이사 밀턴 영애가 맞네요. 당신을 도우러 왔어요."
"뭐라고요?"
─그것이 에일라 넬런과 세이사 밀턴의 첫 만남이었다.
*
"얼음의 달 23일…벌써 그날이 되었네."
세이사 밀턴은 수녀원 창문 너머 지평선에서부터 하늘을 파랗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음의 달 23일은 길더스텐 교단에서 정한 축일이나 특별한 기념일은 아니었지만, 세이사 밀턴이라는 소녀에게 있어 '얼음의 달 23일'이라는 날은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날이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네…에일라는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세이사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날이 에일라라는 은인을 만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집에 들어오기만 했다 하면 술만 들이켜며 주먹을 휘두르는, 아버지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작자가 멋대로 빚을 져 놓고서는 빚을 갚는 대신에 세이사를 나이 차이만 서른 살이 넘는 졸부에게 팔아넘기려 했던 것을 막아준 은인.
비록 그 일로 사실상 멀쩡히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던 밀턴 가문은 작위를 몰수당하고, 세이사는 도망치듯 수도를 빠져나와 수녀원으로 출가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세이사는 자신을 괴롭히던 자들에게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금욕적인 수녀원 생활은 귀족 영애로서 사는 삶이 익숙했던 세이사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이사는 수녀원 생활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자, 오늘도 힘내자."
수녀원에서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역시 세이사의 성격이었다.
수도에 있었을 때의 세이사는 마음에 여유가 없고 항상 초조해하며 주위를 살피는 성격이었다면, 수녀원 생활에 익숙해지며 마음에 여유가 생긴 세이사는 어지간한 일은 다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성격으로 변모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새로 자매들을 받는 날이구나."
또한 그런 변화에 힘입어, 세이사는 수녀원 내에서 기나긴 수습 기간이 끝나면 가장 먼저 정식 수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받는 모범생으로 리피샤 수녀원장을 비롯한 다른 정식 수녀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수녀원에 새로 들어오는 수습 수녀들을 맞이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 역시 그런 믿음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자, 우선…라이아 자매. 만나서 반가워요."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전과 다름없이 리피샤 수녀원장으로부터 건네받은 명단을 확인하며 수녀원의 입구에 몰려든 새 자매들을 맞이하던 세이사.
"다음은…아."
그런 세이사의 눈에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 들어왔다.
"에일라…넬런?"
에일라 넬런이라는 이름이 명부에 적혀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제대로 감사도 표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수녀원으로 오게 된 것이 계속 마음의 짐이었는데.
"에일라? 저기, 나…기억…안나?"
세이사는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에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에일라를 향해 달려가 물었다.
"누구시죠?"
그러나 에일라는 세이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마치 세이사를 처음 본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것이 에일라 넬런과 세이사 밀턴의 재회였다.
*
에일라가 수녀원에 들어온 뒤, 세이사는 어떻게든 에일라와의 관계를 회복해 보고자 노력했다.
"에일라의 머리는 무척 결이 좋네요."
"……."
에일라의 머리를 직접 손질해 주기도 했고.
"에일라, 이것 좀 먹어보세요."
"……."
가끔가다 맛있는 부식이 들어오면 자신의 것을 아껴두었다가 에일라에게 권해보기도 했다.
"……."
그러나 그때마다 에일라는 세이사를 거부하듯, 옆으로 밀쳐내며 아무런 말 없이 세이사를 노려볼 뿐이었다.
"세이사 자매, 자매가 아무리 모범적인 수도 생활을 하고 에일라 자매를 아낀다 한들 에일라 자매의 행동은 선을 넘었습니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다행이었겠지만, 에일라가 수녀원에서 일으키는 온갖 사고와 말썽은 이전의 에일라를 기억하는 세이사를 무척이나 곤혹스럽게 했다.
"아, 아니에요! 에일라는 분명…분명…!"
'에일라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란 말이에요!'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에일라가 하루가 멀다 하고 수녀원에서 벌이는 온갖 패악질은 그 말을 계속 세이사의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돌게만 했다.
"에일라…어째서…."
세이사는 에일라를 막아서 보기도 하고, 말로 타일러 보기도 하는 등, 어떻게든 수녀원 내에서 떨어져만 가는 에일라의 평판을 수습해 보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에일라의 패악질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
"…에일라?"
세이사는 평소처럼 에일라를 만나기 위해 에일라의 방을 찾았지만, 방 안의 풍경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세이사가 에일라의 머리를 손질할 때 사용하곤 했던 조그마한 가위.
그 가위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일라…뭐 하는 거야?"
세이사는 그 광경에 놀라 황급히 에일라를 향해 다가가 에일라를 붙잡으려 했다.
"……."
하지만 그런 세이사의 시도는 허약했던 평소와는 다른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에일라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에일라…그 눈…어떻게 된 거야?"
에일라의 눈은 어째서인지 평소의 푸른빛이 아니라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그 사실을 지적한 세이사의 말이 방아쇠였을까, 에일라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또다시 자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위를 들어 올렸다.
─푸욱
다시 사정없이 에일라의 손목으로 내리꽂히는 가위.
가윗날이 지나간 에일라의 오른쪽 손목에서 피가 튀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마치 물을 가득 저장하고 있던 저수지가 무너져 내리듯 에일라의 손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량의 피.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세이사는 갑자기 피를 많이 쏟아 빈혈 증상이 왔는지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에일라의 모습에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너에게 구원받았는데, 어째서 너는 나를 밀어내는 거야.
나는 너무나도 못나서, 너를 구할 자격조차 없는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세이사는 급격히 북받쳐오는 감정의 격류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가 에일라를 껴안았다.
"같이 죽어줄게…. 그러니까 혼자 떠나가지마. 제발…."
간절한 바람을 담은 세이사의 절규.
그 염원이 잠시나마 에일라에게 닿았던 탓일까.
"…미안해요."
아주 잠깐, 눈이 원래의 푸른 빛을 되찾은 에일라는 그렇게 말하고서….
"'나'를 잘 부탁해요. 세이사."
…상처가 가득한 오른팔에 가윗날을 다시 찔러넣으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 안 돼요! 에일라! 에일라!"
다급히 에일라를 흔들어 깨우는 세이사였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에일라는 실이 끊어져 버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 세이사가 흔드는 대로 사지를 흔들거릴 뿐이었다.
─그것은 에일라 넬런과 세이사 밀턴의 이별이었다.
*
"에일라, 오늘도 왔어."
세이사는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와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그날 이후로 에일라는 여전히 숨을 쉬며 살아있었지만, 사실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에일라, 오늘 기분은 좀 어때?"
"……."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으며,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웃지 않는다.
"몸을 닦을게. 물이 좀 차가워도 참아줘."
"……."
몸을 건드려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도 눈앞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닌, 그저 허공을 응시하는 공허한 눈동자만을 마주할 뿐이다.
"난 에일라가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믿어."
"……."
그러나 모두가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내저어도 세이사는 믿고 기다린다.
"그러니까 어서 돌아와 줘."
"……."
에일라가 언젠가 돌아온다는 것을.
"그럼, 이제 나는 약을 가져올게."
"……."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대답.
하지만 세이사는 마치 에일라와 대화라도 나누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에일라의 방을 나선다.
"…아."
그리고 그 직후, 에일라의 몸에 깃든 다른 이의 혼은 눈을 뜬다.
─그것은 에일라 넬런과 세이사 밀턴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