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31화 (31/80)

〈 31화 〉 성녀의 자격

* * *

"…골치 아프네요."

티아가 납치당한 사건은 자신들의 동료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한 이단 심문관들이 달려가 범인들을 때려잡는 것으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그 뒤처리를 고민하며 골머리를 앓았다.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

티아를 찾겠다며 이단 심문관들이 수도 리아트에 존재하던 온갖 범죄조직을 이 잡듯이 뒤지며 들쑤시고 다닌 탓에,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비대와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교단과의 마찰을 염려한 수비대가 한발 물러서고, 검거한 범죄자를 인도하는 동시에 공적 역시 수비대에게 돌리겠다는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자, 이단 심문관이라는 강력한 무력에 편승하여 손쉽게 '성과'라는 이름의 달콤한 과실을 딸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벌게진 수비대 역시 이 커다란 파도에 합류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악!"

"사, 살려줘!"

수도 리아트에 뿌리내렸던 범죄조직들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난데없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비밀리에 밀수품과 장물을 들여오던 창고는 이단 심문관이 일으킨 성화의 불길 아래 활활 타오르거나 수비대의 직인이 찍힌 압류 딱지를 받았으며, 오늘도 충실하게(?) 악행을 일삼던 범죄조직의 졸개들은 개처럼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가는 통에 범죄자들을 묶을 밧줄이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다.

'…이건 100% 불만을 제기하겠네.'

너무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부패와 비리가 없을 리가 없다.

이번 대규모 소탕 작전에 쓸려나간 범죄조직 중에 귀족을 뒷배로 두고 있었던 범죄조직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었고,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주던 수족을 잃은 귀족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안 그래도 교단과 황실이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지금,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이번 일로 황실에 힘을 실어준다면 힘의 균형추는 필연적으로 황실을 향해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손을 쓴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아무리 에일라가 성녀 후보가 되었다고 한들, 손을 쓸 수 있는 일이 있고 손을 쓸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물론 교단에 속한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압도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반지가 내게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황실과 대놓고 싸우자는 주장을 했다간 나보다 더 위에 있는 교황이나 성녀, 대주교 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떻게든 에일라의 은원 문제를 청산할 기회를 만든 것으로 마음이 홀가분해졌던 것도 잠시, 이제는 교단과 황실의 알력 다툼에 본격적으로 휘말리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나오는 것이라고는 한숨밖에 없었다.

─움찔

그리고 그런 내 말에 반응하여 잔뜩 몸을 움츠리는 사람이 한 명.

"…티아."

"네? 네에엣!"

내가 가늘게 뜬 눈으로 티아를 바라보자, 티아는 작게 움츠렸던 몸을 더더욱 작게 움츠렸다.

"…티아를 탓하려는 게 아니니 진정하세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긴장을 풀라며 잔뜩 위축된 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음, 이건 너무 애처럼 다루는 건가?

"내…내가 언니인데…. 왜 이런 꼴을…."

아니나 다를까 내 쓰다듬을 받은 티아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까보다도 더욱 위축된 모습이 되어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티아가 에일라보다 연상이었나.

'뭐…확실히 '그곳'의 발육에서 차이가 나긴 한다만…크흠."

티아의 말을 듣고 잠시 잡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에, 나는 새삼스럽게 에일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현대로 치자면 대략 중학생 즈음의 나이, 수녀원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또래의 평균보다 조금은 왜소한 신장, 그리고 보통 육안으로 남녀를 구별하는 가장 큰 기준인 '그것'.

'아니, 위화감은 적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자신이 그곳에 존재한다며 존재감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티아의 '그것'과 원래는 남자였던 내가 위화감을 거의 느끼지 않을 정도로 납작한 에일라의 '그것'.

나는 그 사실에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원래 내 몸도 아닌데 무슨….'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소름이 끼쳤다.

에일라의 몸으로 있었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점점 에일라와 나라는 존재 사이의 경계선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관통했다.

'정신 차리자. 난 남자잖아.'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별 도움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어쩔 수 없이 에일라의 몸으로 깨어난 사실을 마지못해 받아들였을 뿐, 나는 아직도 내가 '남자'라는 정체성까지 잃지는 않았다.

고민해봤자 별 도움도 안 될 이런 생각에 시간을 할애하느니, 차라리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리라.

'이단 심문관들은 자기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은데….'

사실 그들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인 것은 같은 이단 심문관이 상처를 입은 것에 분노한 것도 있었지만, 다친 이단 심문관을 에일라가 기절해 가면서까지 치료해 주었다는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가끔 이런 일을 벌여도 이단 심문관이니 그러려니 넘어갈 것이라며 이단 심문관들은 대수롭지 않게 굴었지만,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자니 양심이 너무나도 찔렸다.

'하아, 진퇴양난이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잃어야 할 것이 상당했기에 고민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저, 저기 머리를 쓰다듬는 건…그만둬 주세…요. 에, 에일라…님."

"…아. 미안해요. 티아."

머리로는 계속 고민하면서 손은 나도 모르게 티아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는지, 티아의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막 잠에서 깬 사람의 머리처럼 부스스하게 변해있었다.

"에일라 님. 계십니까?"

"네. 들어오세요."

관성적으로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들어오라고 대답한 나였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 행동을 후회했다.

"성녀님께서 에일라 님을 호출…아,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반쯤 울먹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티아, 내가 계속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벗어나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면서 잔뜩 흐트러진 티아의 머리와 옷매무새.

성녀가 보낸 전령은 그 광경을 보고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을 급히 어색한 미소로 바꾸며 문을 다시 닫으려 했다.

명백히 오해받았음이 분명한 상황.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해명하려 하는 것은 안 그래도 납치 사건으로 인해 엉망진창인 티아의 멘탈을 두 번이나 죽이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저쪽에서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 주겠다는데 괜히 풀숲을 들쑤셔서 뱀을 놀라게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뇨, 곧바로 준비해서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

결국 나는 해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를 받은 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성녀님이 부른다니 차라리 잘 되었어.'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에는 심란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랜 시간 교단에 머무르면서 교단 내부의 권력 다툼에도 닳고 닳은 성녀라면 나 혼자 골머리를 앓으며 고민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거웠던 마음의 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게 등가교환인가?

*

"…이단 심문소에서 화려하게 일을 벌였더군요."

며칠 만에 다시 찾은 성녀님의 집무실.

성녀님은 여전히 거추장스러운 베일 따위는 쓰지 않겠다는 듯, 베일은 소파 위에 내버려 놓고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뒤로 묶어 올린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맡기신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면목 없습니다. 성녀님."

'서약의 열쇠'를 전달받으며 성녀님에게 '수도 안에 잠입하여 뤼네의 꿈과 같은 마약을 유통하는 악마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사해 보라'는 임무를 받았건만, 본의 아니게 일을 크게 벌이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성녀님의 호된 질책이 쏟아질 것을 예상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예상외로 성녀님의 반응은 잠잠했다.

"아니에요. 이번 일로 수도에 뿌리내린 범죄조직에 잠입한 악마가 없었거나, 있었어도 한동안은 잠잠할 거란 사실에 안도해야 할 상황이죠. 이건 에일라 자매의 공적이랍니다."

오히려 그 딱딱한 이단 심문관들이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일에 나서줄 줄은 몰랐다며 나를 칭찬하는 성녀님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분명 이번 일로 불만을 품을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이 일로 교단에 누를 끼칠 수는…."

"에일라 자매는 걱정이 많은 편이로군요."

하지만 성녀님은 귀족들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투로 내 걱정을 일축하며, 집무용 책상에 잔뜩 쌓여있던 서류 더미의 한가운데에서 문서 한 장을 솜씨 좋게 빼내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성녀님이 내게 건넨 문서에는 수도의 여러 귀족이 그동안 어떤 범죄조직과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그 대가로 무엇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상세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문서가 교단의 손안에 있는 이상 귀족들의 움직임을 견제하기는 간단할 터, 결국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에일라 자매는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려 하는 경향이 강한 편이에요. 자신을 아끼지 않는 그런 태도는 분명 고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홀로 고립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되죠."

"…이것도 일종의 시험이었군요."

그제야 나는 성녀님이 내려준 과제의 의미를 깨달았다.

"티아 자매를 이단 심문관 하나를 대동해서 보냈다가 티아 자매가 납치당하고 호위인 이단 심문관이 다쳐서 돌아온 것에 책임감을 느낀 것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이단 심문관을 치료하려다가 너무 많은 신성력을 소모한 탓에 정신을 잃어버렸고, 에일라 자매는 그사이 일어난 일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죠."

조곤조곤 내 부족했던 점을 짚어주는 성녀님의 말씀에 나는 다시금 내 부족함을 절감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습니다. 역시 이건 부족한 제가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짐인 것 같습니다. 다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손가락에 끼고 있던 '서약의 열쇠'를 빼서 조금 전에 받았던 문서와 함께 성녀님께 내밀었다.

'아쉽지만 어차피 내가 오래 가지고 있어 봐야 괜한 견제나 받을 테고, 티롤프도 이젠 마냥 에일라를 적대하지는 않을 테니 이 반지의 쓸모는 이제 다했다고 봐야지.'

강력한 권력은 그것을 지켜낼 힘이 없다면 그 권력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을 불러 모으는 화근이 되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이번 사건으로 '서약의 열쇠'를 반납함으로써 내게 집중될 견제를 회피할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도 좋았다.

"…역시 에일라 자매는 재미있군요."

내가 내민 문서와 '서약의 열쇠'를 받아들고서 얼굴에 웃음을 띄우는 성녀님.

그런 성녀님의 모습에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은 성녀님의 머릿속에서 이미 결과까지 나와 있었던 일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좋습니다. 에일라 자매. 하지만 무엇을 나누어 줬다가 다시 뺏는 행동은 자칫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죠. 그러니 저는 '서약의 열쇠'를 대신할만한 조언을 에일라 자매에게 드리겠습니다."

성녀님은 '서약의 열쇠'를 반납하는 대신 조언을 들려주겠다고 말했지만, 너무나도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내가 '서약의 열쇠'를 반납하지 않았을 경우의 수 역시 준비했을 것이 분명했다.

"…경청하겠습니다."

이쯤에서 모든 일이 성녀님의 손바닥 안이었다는 내 직감은 이미 확신으로 바뀌었고, 나는 최대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성녀님의 조언을 기다렸다.

"조만간 성녀 후보자들을 모아 그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미사가 집전될 것이란 사실은 이미 에일라 자매도 알고 있겠죠? 그날이 오기까지 에일라 자매는 성녀가 되려면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일지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이것이 성녀님의 또 다른 시험임을 직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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