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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성녀 같다-32화 (32/80)

〈 32화 〉 성녀의 자격 (2)

* * *

'성녀가 되기 위한 자격이라….'

성녀님과의 면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성녀님이 내려준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성녀의 자격.

에일라의 몸으로 깨어나, 처한 상황에 대응하기도 바빴던 나로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진지하게 성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한 에일라의 몸으로 발버둥 치면서 살아남으려면 성녀 후보라는 신분이 필요했던 것에 불과했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시네티 마을에서 악마를 물리쳤던 일이라던가, 성녀님의 집무실로 가는 길에 있었던 시험을 통과한 것과 같은 일로 막대한 신성력을 가졌단 것이 알려져 교단 내외의 여러 세력으로부터 관심을 받게 된 상황.

보유한 신성력과 처세술을 보아 내가 차기 성녀가 될 것이 유력하다며 나를 후원하겠다고 한 솔름 백작이라던가, 은근히 자기 세력을 편들어주길 바라는 교단의 여러 수도회 같은 경우는 차라리 상대하기 편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겐 신앙심이라는 것도 없는데 그런 기대를 받으니 부담스러워.'

반면에 성녀님이나 마르셀을 비롯한 이단심문관 등이 내게 거는 기대는 무척이나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앞서 말했던 이들은 현실적인 권력이나 이익에 관심을 지녔다면, 이들은 내가 막강한 신성력을 다룰 수 있었던 과거의 사제들처럼 훌륭한 사제가 되어 엄청난 위업을 남겨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실리안 대륙의 종족들이 섬기는 열두 주신 중 하나인 길더스텐에 대한 신앙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가 기적을 사용하는 것은 흔한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마법을 사용하는 감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신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하지만, 막상 신을 향한 믿음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성녀 후보.

그런 모순된 존재가 바로 나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성녀의 자격을 생각해보라고 한들,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어렵네요."

어찌 되었든 현직 성녀님이 조언한 것이니 나는 어떠한 형태로든 답을 구해내야 했다.

더군다나 성녀 후보들에게 정식으로 성녀 후보자의 자격을 내리는 미사가 있기 전이라는 제한 시간까지 존재하니, 절로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저기…."

"티아? 무슨 일이죠?"

그것으로 고민이 그쳤으면 좋으련만,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이셀 님…아니, 아이셀 쪽에서 저번에 제안한 '그래놀라'의 시험 판매 결과를 보내왔어…요."

아이셀로부터 사과와 함께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내는 대신 던져준 당근인 '그래놀라'라는 상품이 제대로 시장에 안착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 역시 내가 할 일이었으니, 사실상 나는 성녀 후보자인 동시에 오스라드 상단에서 '그래놀라'라는 상품을 전담하는 마케팅 담당자가 되었다고 해도 좋았다.

"…일단 반응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네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그래놀라'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첫 출시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제조과정에 꿀이나 시럽이라는 고급 식자재가 들어가는 탓에, 어느 정도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그래놀라를 전파하여 소비자의 절대적인 수를 늘린다는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시제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총 마흔 명 중에 서른두 명….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어요."

그 대신 내가 택한 것은 고급화 전략이었다.

수도 리아트의 여러 유력 귀족 가문에 오스라드 상단의 이름으로 시제품을 보내 호기심과 관심을 유도하고, 이들이 시제품과 함께 전달한 소개장을 지닌 경우에만 그래놀라를 한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아 그 희소성을 올렸다.

'솔직히 다른 건 참아도 한정판매를 참기는 어려울걸.'

발달한 마케팅 기술에 포위당해 살아가는 현대인도 대부분 동의하듯, '한정판매'라는 단어에는 무시무시한 마력이 있었다.

설사 그 가격이 상품의 원가와 비교해 봤을 때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가격이라 할지라도,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다시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소유욕을 자극하여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열게 하는 마력이.

거기에다 소개장이 없으면 구매조차 불가능한 판매 방식이라는 귀족 특유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달콤한 소스까지 끼얹었다.

이렇게 되면 한정판매로 다른 데서는 구할 수도 없는 그래놀라를 사서 소비하는 것 자체가 처음 시제품과 소개장을 전달받은 유력 귀족들과의 인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되니, 귀족 사회에서 그래놀라라는 상품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질 터.

'아이셀이 판매량을 더 늘리라고 독촉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게 그래놀라가 잘 팔리면 그래놀라를 복제한 복제품이 등장하지 않겠냐고?

키니아 제국 제2의 규모를 자랑하는 '오스라드 상단'이라는 이름을 무시하고 배짱을 부릴 정도로 담이 큰 상인의 수는 아주 적었다.

게다가 '진짜 그래놀라'를 소비하는 수도의 여러 귀족 가문에서 자신들이 이용하는 진짜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며 알아서 단속할 것이니 더더욱.

다시 말해 이쪽에서 품질관리에 실패하여 먼저 신뢰를 잃는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티아, 아이셀이 보낸 전령에겐 처음 사업계획서 그대로 가도 좋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아, 아니에요."

사실상 옆에서 내 비서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는 티아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있자니, 문득 회의감이 밀려왔다.

전생에서도 업무에 치여 살면서 휴가, 휴가 노래를 부르던 주제에 여기서도 똑같이 이러고 있느냐는 회의감 말이다.

'…잠깐 쉴까.'

갑자기 든 회의감에 의욕이 팍 식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잠깐 휴식을 취하러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우물쭈물하며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티를 팍팍 풍기는 티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 티아, 왜 그러죠?"

"그, 그게…아이셀 님, 아니 아이셀 말고도 수녀원에서도 편지가…."

"…수녀원에서요?"

티아가 어째서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리피샤 수녀원장이 수녀원에서 계율을 어기고 일탈을 벌였던 수습 수녀들을 본격적으로 색출하기 시작했으니, 아이셀과의 연줄을 통해 외부의 물건을 반입하는 등의 일탈을 벌였던 티아로서는 수녀원에서 온 편지라는 말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

"…발신인이 리피샤 수녀원장님이네요."

"…히끅."

게다가 발신인조차 그 리피샤 수녀원장의 이름으로 되어있었으니, 티아의 불안함은 더욱 배가되었음이 분명했다.

"제, 제발 더 외진 수녀원으로 쫓겨나는 것만큼은…!"

"…아직 내용도 확인하지 않았으니 벌써 그렇게 절망하기엔 일러요."

이제는 불안감에 몸을 와들와들 떨기까지 하는 티아를 진정시키며, 나는 편지를 봉인하고 있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인장을 페이퍼 나이프로 떼어냈다.

"티아,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평범하게 수도 생활은 어떠냐며 안부를 묻는 편지에요. 티아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그, 그래…?"

대충 편지에 적힌 내용을 훑어본 내가 내용을 알려주자, 무척이나 불안하게 떨리던 티아의 눈동자가 비로소 또렷한 빛을 되찾았다.

"다, 다행이다…."

'리피샤 수녀원장이 고작 이런 안부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을 텐데?'

티아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는 동안, 나는 미간을 좁히며 리피샤 수녀원장이 보낸 편지를 노려보았다.

수도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물어보는 안부 확인과 무사히 성녀 후보가 되어 돌아오라는 격려가 전부인 편지.

내가 에일라의 몸에 빙의한 뒤로 어느 정도 평판을 복구했다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 그렇게 냉랭한 시선을 보냈던 리피샤 수녀원장이 이런 따뜻한 내용의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무슨 암호라도 숨겨놓았나?'

괜히 편지지를 뒤집어 보고,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는 등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편지지에 숨겨진 메시지 같은 것은 없었다.

'어?'

오히려 무언가가 발견된 곳은 편지지가 아니라 봉인을 뜯은 후 신경도 쓰지 않았던 편지 겉봉이었다.

편지 겉봉을 열어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알같이 적혀있는 글자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에일라 자매에게

에일라 자매라면 이 숨겨진 편지를 알아차렸겠죠.

본래라면 이런 번거로운 방식은 쓰지 않겠지만, 성녀 후보가 된 에일라 자매와의 관계가 드러나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세이사 자매의 부탁으로 제 이름으로 대신 편지를 보냅니다.」

요약하자면 리피샤 수녀원장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 것은 성녀 후보가 된 나와 각별한 사이인 세이사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내용.

나와 같이 다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티아가 납치당하기도 했던 만큼, 리피샤 수녀원장의 이런 배려는 기꺼웠다.

하지만 괜히 나와의 관계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어 고작 편지 한 통조차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는 리피샤 수녀원장의 글 바로 아래에 적힌 세이사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에일라에게

잘 지내고 있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예전처럼 식사를 거르지는 않고?

혹시 팔에 입은 상처가 아프지는 않아?

시네티 마을에서 곧바로 떠날 줄 알았으면 연고를 따로 챙겨주는 건데…미안해.」

세이사의 편지는 과연 세이사답달까, 서두부터 에일라를 향한 걱정투성이였다.

수도에서 잘 지내고 있느냐는 걱정, 식사는 잘하고 있느냐는 걱정, 오른팔의 상처는 괜찮으냐는 걱정까지.

어떻게 보면 극성맞은 부모님이 생각날 정도의 걱정이었지만, 세이사가 원래 이렇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고맙다는 감정이 앞섰다.

「요새 수녀원이 엄청나게 바빠졌어.

자매 중에 계율을 어기고 일탈을 저질렀던 자매들이 저지른 일탈의 경중에 따라 처벌을 받고 다른 수녀원으로 옮겨간 탓에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일할 자매들은 적어졌거든.」

역시 리피샤 수녀원장은 수습 수녀들의 일탈을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번거롭게 매번 솎아내기보다는 한 번에 대청소로 끝내겠다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니, 일탈을 저질렀던 상당수의 수습 수녀가 더 외진 수녀원으로 쫓겨나게 되었을 터.

이는 당연하게도 자급자족을 미덕으로 삼는 수녀원의 노동력이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자매들을 뽑게 되었어.

수도에서의 일을 마치고 에일라가 수녀원으로 돌아오면 새로 수녀원에 들어온 자매들을 볼 수 있을 거야.

어서 시간이 흘러서 성녀 후보가 된 에일라를 빨리 만나보고 싶어.

힘내! 에일라!

─에일라의 친구, 세이사가」

줄어든 노동력을 벌충하기 위해 새로 수습 수녀를 뽑았다는 내용은 관심 밖의 내용이었지만, 세이사가 편지 말미에 덧붙인 문구는 묘하게 마음을 간질이는 힘이 있었다.

'친구라….'

내가 에일라의 몸에 빙의한 이후, 내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인 세이사.

그녀와 내가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이것이 최대라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동시에, 이런 사소한 내용을 전하는 편지조차 교단 내부의 정치 싸움에 이용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어 맘 편하게 보낼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면서 편지를 붙잡은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에, 에일라? 너, 너…눈이…!"

갑자기 들려온 경악성에 세이사의 편지에 못 박혀 있었던 고개를 드니, 티아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티아, 무슨 일인가요?"

"네, 네 눈이 금빛으로 변했다고! 거울을 봐!"

"뭐라고요?"

티아의 말대로 방에 있던 거울 앞으로 다가서니, 거울 너머에는 평소처럼 청발벽안의 에일라가 아닌, 청발금안의 에일라가 특유의 매서운 눈매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대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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