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성녀의 자격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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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상으로 성녀에 어울리는 자매는 없을 거예요.'
클라우디아 앨러나흐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옆에 나란히 늘어선 다른 성녀 후보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다 자신이 걸친 제의로 시선을 돌렸다.
순수함의 상징이자, 길더스텐님의 영광과 결백, 기쁨을 상징하는 순백색.
그것은 클라우디아라는 소녀가 수도 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금껏 단 한 점의 얼룩조차 생기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다른 후보분들이 걸친 제의도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역시 순수함에 있어서는 저를 따를 수 없죠.'
클라우디아의 자신만만한 말마따나, 붉은 제의, 녹색 제의 모두 좋은 의미가 담긴 복식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인 신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길더스텐님의 상징인 빛 그 자체를 의미하는 눈부신 백색에 비하면 그 빛이 바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역시 저 하얀 제의를 두른 성녀 후보분이 다음 성녀가 되시겠지?"
"그렇지 않겠어? 역시 길더스텐님 하면 떠오르는 색은 눈부신 백색이잖아."
게다가 클라우디아의 예상대로, 성녀 후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마다 수군거리는 신도들은 클라우디아가 차기 성녀로 가장 잘 어울리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나누고 있었고, 그 사실은 클라우디아가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자색 제의를 두른…저 후보분은 뭔가 엄청 신경 쓰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한 클라우디아라고 해도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상대가 있었다.
속죄라는 상징성을 가지기에 성녀 후보가 두르는 제의로는 거의 사용되는 일이 없는 자색 제의를 몸에 두르고 나타난 성녀 후보.
그 사실에 호기심을 느낀 신도들은 그녀를 향해 클라우디아에 절대 뒤지지 않는 관심을 보내고 있었으며, 이 자리에 같이 배석한 주교들 역시 그녀에게 비상한 관심이 있음이 눈빛에서 묻어나오고 있었다.
'에일라 넬런이라고 했던가요. 부디 좋은 경쟁상대가 되어 주었으면 하네요.'
길더스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매치고는 무척이나 매서운 눈매를 지닌 경쟁 상대를 바라보며 클라우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유력한 경쟁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는 상대를 보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자며 전의를 불태우는 그녀의 판단은 다소 안일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지역에 비하면 각 영주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어 분쟁이 적은 데다, 악마의 직접적인 침공과는 거리가 있어, 낙천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이 많은 키니아 제국 서부의 귀족 가문 출신임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더불어 막내딸인 것도 모자라 고명딸로 태어나 아버지인 앨러나흐 백작의 넘치다 못해 폭주하는 사랑과 지원을 받으며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수도 생활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클라우디아였으니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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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더스텐님. 제게 이런 기회를 내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에리올 루펜은 자신을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이들의 시선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본당으로 걸어들어올 때부터 본당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성표를 향해 속으로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녀로서는 정식으로 성녀 후보임을 인정받는 이번 미사에 대한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제겐 아직 움직일 수 있는 팔과 다리가 하나씩 남아있습니다!"
"유감이지만 에리올 자매, 자매의 부상은 악마와 직접 검을 맞대며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결격사유입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라는 꿈을 가졌고, 재능이 따라주어 어릴 때부터 성기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건만, 단 한 순간의 방심은 그 기회를 그녀에게서 영영 앗아가 버렸다.
"에리올 자매, 그렇다면 그 신실한 신앙심을 다른 방향으로 써보게. 길더스텐님의 적을 베는 것만이 길더스텐님을 모시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테니."
실의에 빠진 에리올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린 것은 그녀가 종자로서 모시던 한 이단심문관의 조언이었다.
길더스텐님의 뜻을 가로막는 적을 베는 것만이 길더스텐님을 모시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조언.
에리올은 자신이 따르는 이단심문관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녀의 삶은 전사의 삶에서 수도자의 삶으로 바뀌었다.
"……."
전사의 삶 역시 쉽지 않았지만, 수도자의 삶 역시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투에서 잃었던 팔과 다리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다고 여긴 한 대주교가 친히 치유의 기적을 사용해 주는 것으로 되찾았지만, 에리올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왼팔과 오른 다리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가로막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감내하겠나이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에리올의 의지를 꺾었냐고 한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였다.
이단심문관이 자신에게 건넸던 조언을 매일 가슴에 새기며, 오른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누구보다도 빠르게 일어나 기도에 참석하고, 왼팔을 전혀 사용할 수 없음에도 수녀원의 일과에 가장 앞장서서 참여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수도자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고, 마침내 그녀는 성녀 후보라는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마르셀 코르파 이단심문관님.'
에리올은 누구보다도 깊은 은혜를 자신에게 내려준 이단심문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흘끗 자신의 옆을 돌아보았다.
'에일라 넬런….'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옆의 세 번째 성녀 후보가 아니라, 성녀 후보의 대열에서도 끄트머리에 있는 네 번째 성녀 후보, 에일라 넬런이었다.
'마르셀 이단심문관님의 인정을 받은 후보….'
에일라 넬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던 에리올이었지만, 성녀 후보로 인정받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수도 리아트로 오는 도중 떠도는 소문을 듣는 것으로 대략적인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절대 질 수 없어요.'
자신의 은사로부터 인정받은 경쟁자.
그 사실이 그녀의 투지에 불을 붙였다.
선배로서 후배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이 절반, 은사의 인정을 자신보다도 먼저 받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질투가 절반씩 섞인 결과였다.
*
'와, 신기하다!'
에린 에드피드는 태어나 난생처음 보는 대성당의 모습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반짝였다.
"에린 자매, 미사 중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죠?"
"네!"
그래도 수도 리아트로 떠나기 전까지 그녀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하던 수녀원장이 걱정하던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에드피드 숲의 아이.
에린이 머무르던 수녀원에서 에린을 부르는 이명이었다.
그 이명은 수녀원 근처에 존재하는 에드피드 숲에서 강보에 싸여 버려진 채로 발견되어 수녀원에서 자라난 아이였기에 붙은 이름이기도 했지만, 숲의 종족, 발트르들이 종종 하는 것처럼 동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등 엉뚱한 행동을 자주 벌였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에린 자매. 이건 대체…."
"수녀원장님! 앤젤라가 다쳐서 울고 있길래 손을 잡아 줬는데, 상처가 사라졌어요!"
그런 그녀가 어째서 성녀 후보로 뽑혔느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치유의 기적이 그 대답이었다.
에린 본인은 그런 힘이 가지는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아픈 사람이 있다면 그곳으로 도도도 달려가 손을 잡아주는 것을 재미있는 놀이처럼 여겼지만, 에린이 아무런 자각 없이 펼치는 치유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에린의 모습이 지상에 강림한 아기 천사의 모습으로 보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녀원장님? 이 아저씨는 왜 울어요?"
죽어가던 이가 다시 건강을 되찾은 것에 연신 감사를 표하는 환자나 그 가족들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천진하게 되묻는 에린의 모습은 수녀원장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에린 자매. 에린 자매는 성녀 후보의 자격을 갖춰서 수도 리아트로 올라가게 되었답니다."
"수도 리아트요? 거긴 수녀원보다 재밌는 게 많아요?"
"…일단은 기본적인 예법부터 배우도록 하죠."
수녀원장과 휘하 수녀들의 눈물겨운 교육 끝에, 그녀들은 에린을 의젓한 척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교육하는 것에 성공했다.
'수녀원장님이 미사 중에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하셨어. 와, 그래도 사람이 진짜 많다!'
그 교육이 헛되지 않았는지, 에린은 당장에라도 뛰어다니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처음 와보는 수도 리아트는 신기한 것이 가득한 별천지였고, 성녀 후보로서 인정받는 의식도 수녀원에서 보던 미사나 기도와는 다른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앗!'
거기에, 에린의 관심을 한 눈에 끈 것까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저 언니에게서 나랑 비슷한 느낌이 느껴져!'
그것은 바로, 에린의 바로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미사에 임하고 있던 에일라 넬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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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진지하게 미사에 임하는 척을 하고 있자니,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시선이.
'…왜 다른 후보들이 나를 따가운 시선으로 보는지 모르겠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것은 다른 성녀 후보들밖에 없었으니, 그 시선을 보내는 것이 누구인지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벌써 이렇게 주목을 받다니…. 아무래도 후보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에일라가 불길한 예측을 꺼내 드는 것을 일축하며, 나는 어째서 그녀들이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인지 고민했다.
'…혹시 어린애한테 이유 없이 호감을 사는 편이었어?'
[아뇨. 오히려 제 눈매를 보고 울거나 도망치기 일쑤였죠. 그리고 후보 중에서 어린애라고는 녹색 제의를 걸친 후보 말고는 없잖아요.]
시네티 마을에서 봤던 엘리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에일라에게 물었지만, 그 대답은 영 신통치 않았다.
'그것도 그렇네.'
[어차피 그녀들이 호의를 가지든 적의를 가지든,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요. 다른 후보의 견제가 있더라도 이겨내면서 성녀의 자리를 쟁취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니까요.]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내게 다시금 우리의 목표를 상기시키는 에일라.
그래,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성녀라는 자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으니 에일라의 말은 분명 옳았다.
"지금부터 성녀 후보들의 세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에일라와 이야기를 나누며 겉으로는 미사에 진지하게 임하는 척을 한 것이 몇 분을 지나자, 미사는 어느덧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앞두고 있었다.
"세례식을 집전하기 전에, 성녀 후보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선 자매님들에게 묻겠습니다."
세례식을 집전하기 직전, 교황은 아래에 늘어선 성녀 후보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자매님들은 성녀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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