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35화 (35/80)

〈 35화 〉 성녀의 자격 (5)

* * *

"당연히 길더스텐님을 모시는 성녀라면 길더스텐님의 가르침을 더 널리 퍼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황의 질문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였다.

자신이 내놓은 대답이야말로 정답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당당한 자세로 답하는 모습에 신도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호응했고, 질문을 던졌던 교황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의 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길더스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니 너희들은 나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하여라. 나의 가르침은 너희들을 비추는 등불이자, 그 누구도 무게를 속일 수 없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저울추를 얹은 저울이다.'라고 말입니다. 클라우디아 자매의 대답은 경전의 구절과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교황이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클라우디아의 대답에 힘을 실어주자, 클라우디아의 자신만만한 어깨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의 수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성녀뿐만이 아니라 길더스테님을 모시는 사제와 신도 모두가 힘써 행해야 할 일입니다. 오직 자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칫 '핏빛 교황'의 재림이 될 수 있음을 항상 자매의 마음에 새기길 바랍니다."

그러나 교황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클라우디아의 대답에 담겨있는 허점 또한 명확하게 지적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핏빛 교황.

그 말에 당당하던 클라우디아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정확한 법명은 루키니스 2세.

그가 교황으로 재임하던 시기는 교단이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던 시기였으나, 교단의 사제들이 약자를 돌보는 일을 도외시하며 권력에 취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참으로 부끄러운 시기였다.

감히 교단의 권위에 대항하는 자에게는 파문이라는 처분에 악마에 협력하는 사악한 마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고, 성기사들은 온갖 잔인한 형벌을 고안하여 마녀라 낙인찍힌 이들을 처형하던 시기.

결국 교황과 교단의 폭주를 참다못한 일부 양심적인 성직자들과 제국 각지의 귀족 가문, 황실이 손을 잡고 검을 뽑아 들었고, 길고 지루한 내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교황을 사로잡아 심판대 위에 세울 수 있었다.

"아, 나는 의심암귀에 빠져 스스로 백치가 되어버리고 말았구나!"

루키니스 2세가 처형대에 오르며 유언으로 남긴 탄식처럼, 밝혀진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교황이라는 자리에 올랐으나 언제나 자신이 과분한 자리에 올랐다는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루키니스 2세의 마음에는 빈틈이 벌어지고 말았고, 악마들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그의 열등감과 의심을 자극하여 교황 스스로가 교단을 망가뜨리게 유도한 것이라는 진실.

이 사실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교단의 권위는 땅으로 곤두박질쳤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황실은 이 기회에 교단을 견제할 겸, 교단과 황실의 관계에서 황실의 우위를 주장하여 이를 통과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루키니스 2세에 반대하며 그를 막기 위해 반 교황 연합에 참여한 사제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대로 교단이 공중분해 될 위기였지만, 그들은 철저한 내부개혁으로 교단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단심문소라는 내부감찰용 기관을 설치하는 등의 자정작용이 성과를 거두며 교단은 잃었던 신뢰를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요컨대, 교황이 교단을 무너뜨릴 뻔했던 교황의 이름을 언급하며 주의하라고 한 것은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클라우디아에게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저, 저저 망할 늙은이가…!"

그리고 그것은 자기 막내딸이 성녀 후보로 당당히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자 자리에 참석했던 앨러나흐 백작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 이유로 충분했다.

"백작님, 진정하시지요. 주위에 사람이 많습니다."

"자네는 화도 안 나는가? 저 늙은이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었는데?"

"하아, 영지의 일을 보실 때는 더없이 합리적이신 분이 어째서 아가씨와 관계되었다 하면 이성을 잃으시는 겁니까. 제발 진정하십시오."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면 흥분한 앨러나흐 백작이 교황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흔드는 진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나, 백작의 바로 옆에 앉아있던 시종이 급히 백작을 뜯어말린 덕에 백작 주위의 여러 사람 사이에서 소란이 이는 정도로 끝났다.

실제로 백작이 교황에게 달려들었어도 호위를 담당하던 성기사들에 의해 끌려 나갔을 것이기도 했고.

"제가 생각하는 성녀의 자격은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헌신입니다."

앨러나흐 백작의 행동으로 발생한 약간의 소란을 가라앉힌 것은 두 번째로 교황의 말에 답한 에리올 루펜이었다.

"역대 성녀님들 중에서도 자신을 희생한 경우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희생은 모두 사특한 악마로부터 카르실리안 대륙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고, 저 또한 그런 성녀님들을 본받고자 합니다."

클라우디아처럼 가만히 있다가 반론을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에리올은 교황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렇게 말한다면 대부분은 상대방이 '그래, 그런 경우도 많았지.'라며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상대는 성녀와 더불어 교단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라 불리는 교황이었다.

"헌신이라, 헌신 역시 성직자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지요. 하지만 무조건 자신을 가볍게 여기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희생하는 것은 3차 대원정 때의 경우처럼 무책임한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리올은 교황이 이전 대의 성녀와 성녀 후보들이 행했던 숭고한 희생을 무책임한 행동으로 격하하는 것에 순간적으로 발끈하여 반박하려 했으나, 교황은 가볍게 손을 들어 에리올의 행동을 제지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3차 대원정에 실패한 원정군을 무사히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희생하신 벨린다 성녀님과 성녀 후보들의 선택은 분명 숭고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벨린다 성녀님과 성녀 후보들이 3차 대원정에서 모두 스러진 탓에 교단은 10년이 넘도록 성녀가 없는 혼란에 빠져야 했습니다. 적어도 성녀 후보 하나라도 원정군과 함께 귀환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

교황의 지적에 에리올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꽉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성녀의 숭고한 희생을 평가절하당한 것은 분하지만, 성녀의 뒤를 이을 후보들조차 한꺼번에 희생한 것으로 교단에 혼란을 불러왔다는 교황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각각 굴욕감과 분노를 참아내는 클라우디아와 에리올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도 동감이에요. 교황과 성녀 후보의 사이가 나빠져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요.]

나름대로 근거와 자신감을 가지고 대답한 두 성녀 후보의 대답이 면전에서 부정당했다.

사실상 성녀 후보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는 교황의 행동은 아무리 그 이유를 짐작해보려 해도 의문인 행동이었다.

교황과 성녀는 교단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인데, 그 기둥의 하나가 될 성녀 후보와 관계가 나빠질 것이 분명한 행동을 교황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길들이기인가? 아니면 이것도 시험인가?'

[길들이기라기엔 수위가 너무 약해요. 차라리 이것도 시험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어요.]

'시험이라….'

아마 이것이 시험이라면 교황은 성녀 후보가 어떠한 대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다른 근거를 들어 반박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딱히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주고 그에 관해 고민해 보라던 성녀님의 조언은 어째서인가.

미리 탄탄한 논리를 구성해서 반박할 구석을 아예 주지 않는 것?

아니다. 아무리 성녀 후보들이 뛰어난 행적을 보여 후보로 뽑히게 되었다고 한들, 몇십 년이 넘도록 교황직에 재직하며 경험을 쌓아온 교황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 시험은….'

내가 모습을 드러낼 듯 말 듯 하며 숨바꼭질하는 정답을 찾아 고민하는 사이, 세 번째 대답이 나왔다.

"모르겠어요!"

자리에 모인 성녀 후보들과 사제들은 물론이고,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까지 충격에 빠뜨린 파격적인 대답이었다.

에린 에드피드가 아무리 성녀 후보 중에서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라고는 하지만, 성녀의 자격을 물어보는 대답에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것이 에린 자매의 대답입니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교황이 물었지만, 에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전 아직 그런 어려운 건 잘 몰라요!"

"알겠습니다. 에린 자매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답하면 성녀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까?"

교황이 그러면 성녀가 될 수 없을 수도 있다며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음에도 에린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네! 전 계속 이렇게 지내도 괜찮아요!"

우렁차게 대답하는 에린의 모습에 에린을 수도까지 데려왔던 수녀들은 결국 에린이 일을 저질렀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천진난만한 에린의 모습에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려있었다.

"자, 그럼 마지막 대답을 들어볼 차례로군요."

이미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교황은 에린에게 질문을 던지던 것을 그만두고, 내게 대답을 독촉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이미 당신이 마음속으로 정한 답이니 실컷 떠들어보세요.]

사실, 다시 깨어난 에일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리 정해놓은 대답은 있었다.

정말 이대로 말해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조금 전 교황과 에린의 문답으로 내게는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상태였다.

어차피 이 질문은 정답이 없다는 사실과 에일라의 말에 용기를 가지고 나는 입을 열었다.

"자격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으니 성녀가 될 겁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을 넘어 오만함까지 느껴지는 내 대답은 조금 전 에린이 보였던 파격적인 대답보다도 충격적이었는지, 대성당에 모인 모두가 입을 다문 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격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에일라 자매."

다른 성녀 후보들의 말에 반박하던 때보다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어째서 그러한 대답을 내놓았냐고 물어오는 교황.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모습에 지레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정답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질문이라면 완전히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것은 모두 정답으로 취급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조금 전 에린의 대답도 하나의 대답으로 인정하는 교황의 모습으로 증명되었다.

'차라리 악평을 들어도 좋아. 지금까지의 악명을 뒤덮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지 않으면 앞서나갈 수 없어.'

더군다나 그런 계산도 머릿속에 이미 세워져 있었기에, 나는 교황의 질문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대답을 망설임 없이 내놓을 수 있었다.

"자격이란 것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녀가 되고자 하는 성녀 후보라면 응당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신념을 가져야지, 타인의 시선에 휘둘려서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극언이라고 할 수 있는 독한 말이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저는 성녀가 될 겁니다.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한, 반드시."

여기서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 봤자 웃음거리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절박함이었다.

"……"

내가 할 말은 모두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교황의 판정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교황의 대답을 기다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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