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37화 (37/80)

〈 37화 〉 전조

* * *

[포기하세요. 교단이 그렇게 느슨하게 운영되는 조직일 리가 없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칠요의 성석'이 무척이나 값비싼 물건이라는 에일라의 설명에 잠시 물욕이 동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그만두라는 에일라의 만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에일라의 말마따나, 팔아치운다면 어지간한 영지의 성을 열두 채가 넘도록 살 수 있는 목걸이에 교단이 아무런 보안장치도 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은 이단심문관들과의 사이를 망칠 생각도 없고.'

게다가 내가 목걸이를 들고 도주한다면, 교단의 추격자로 당연히 따라붙을 이단심문관들을 생각하니 그럴 마음도 싹 가셨다.

의도한 것 절반, 의도하지 않은 것 절반으로 얻은 우호적인 관계를 고작 물욕 하나로 날려버리는 것은 잠깐의 현재를 위해 금방 다가올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걸이를 장식하는 보석이 무엇인지 벌써 알아차린 형제자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이 자리의 모두에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성녀 후보들이 받은 목걸이를 장식하는 저 검은 보석들은 사실 '칠요의 성석'입니다."

게다가 내가 목걸이를 보고 동요했다는 사실을 교황에게 읽히고 말았으니 목걸이를 들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뭐?! 칠요의 성석?"

"조그마한 조각으로도 성 한 채를 살 수 있는 보석이잖아!"

"소문을 들은 강도들이 흉악한 마음을 품고 성녀 후보님들을 노리면 어떡하지?"

"…당장 우리 앨러나흐 백작가 휘하의 기사단을 소집하게! 우리 클로가 위험하지 않은가!"

"아니, 백작님, 그것은…."

웅성웅성하며 대성당에 모였던 인파가 저마다 한마디씩 이야기를 보태기 시작하자, 대성당 안은 어느새 시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북새통을 이루었다.

"정숙, 정숙하십시오!"

결국, 미사를 보조하던 사제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에야 그 북새통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성녀 후보로 뽑힌 자매들을 걱정하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녀 후보들에게는 교단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뛰어난 성기사가 호위로 따라붙을 것입니다."

그렇게 소란이 가라앉자, 교황은 자신의 발언으로 말미암아 조금 전의 혼란이 빚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무척이나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 모두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교황의 말이 끝나는 것에 맞추어, 은백색의 예복을 걸친 네 명의 남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교단에서 성녀 후보를 호위할 호위기사로 뽑은 성기사의 대열 맨 앞에 선 것은 티롤프였고, 맨 마지막에 선 것은 수도로의 여정을 함께 했었던 마르셀 이단심문관의 종기사였던 로나였다.

'…어째 낯익은 사람 같은데.'

[낯익은 사람 같은 게 아니라 낯익은 사람이 맞잖아요.]

나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현실도피를 시도했지만, 에일라의 딴죽에 금방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형제자매들은 모두 교단에서 그 자질을 인정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성기사들입니다. 이들이라면 성녀 후보들이 어떠한 위험 속에 있더라도, 성녀 후보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교황의 설명을 들은 많은 이들은 교황의 설명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성기사에게 자신의 호위를 맡길만한 신뢰를 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부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어떤 성녀 후보의 호위기사가 될 것인지 정하는 것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될 예정입니다."

사람들에게 설명을 마친 교황은 이어서 나를 포함한 성녀 후보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매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이들을 만나 그들의 마음을 얻도록 하십시오. 결과는 이들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사로잡은 자매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미사를 마무리하는 성가를 부르도록 합시다."

순식간에 설명을 마친 교황은 마치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미사의 마무리를 선언했고,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덮여버렸다.

─♬

'곤란한걸. 남는 시간에 수도에서의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나는 적당히 눈치껏 성가를 따라부르며 생각에 잠겼다.

교황의 말을 요약하자면, 교단에서 선별한 호위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에게 호위기사를 지명할 우선권을 준다는 말이었다.

요컨대 인망이 뛰어난 후보에게 마음이 맞고 뛰어난 실력을 지닌 호위기사를 붙여주겠다는 것인데, 이미 성녀 후보로 지명받는 의식이 끝난 후의 계획을 세워두었던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단심문소 소속이다 보니 그런 규칙에 엄격한 로나야 그렇다 치고, 티롤프는 왜 아무런 말도 없었던 거지?'

[그 고지식한 남자는 미리 말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으면 그에 관해서는 정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남자니까요.]

'이걸 성실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규칙을 잘 지킨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 기간에 나와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의 약속을 잡아놓는 것은 대체 무슨 심술이란 말인가.

'호위기사를 설득하는 시간에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었으니 어쩔 수 없나.'

그래도 나로서는 방도가 없었다.

호위기사들을 하나하나 만나볼 시간이 상당히 빡빡해지겠지만, 에일라 넬런과 셀린 엘리어드 영애 사이의 묵은 원한을 청산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걸 물어보지 않았었네.'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의 일 말인가요?]

내 생각을 읽었는지, 곧바로 핵심을 찔러오는 에일라였다.

'맞아.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계속해서 몰아세운 일이 네가 꾸민 일이 아니라면 설마 이것도?'

[시후, 당신의 추측이 맞아요. 셀린 엘리어드 영애는 '그들'이 무척이나 탐내던 실험체였을 거에요. 그들의 명령을 거부하는 실패작인 저를 폐기하는 명분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정신적으로 몰아세운 뒤, 그 약점을 빌미로 그녀를 설득하여 그들이 원하는 실험체로 확보하려는 생각이었겠죠.]

'골치 아프네. 그놈들이 어설프게 일을 진행했을 리도 없는데,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과연 믿어줄까? 게다가 나와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만날 약속을 잡았다는 사실도 어쩌면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고.'

에일라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측한 수수께끼의 조직은 키니아 제국 전체에 깊게 뿌리를 뻗친 무시무시한 비밀결사였다.

그런 조직이, 이미 폐기당해 사라졌어야 할 에일라 넬런이 멀쩡히 기적을 사용하고 성녀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말해, 지금 꽃잎을 뿌려대며 성녀 후보들을 축복하는 인파 사이에도 그들이 심어놓은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어쩌면 지금도 감시받고 있을지 몰라.'

[아마도 그럴 거예요. 그들의 집념은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지 오래예요.]

'혹시 탐지와 관련된 기적은 없어?'

[악마의 기운을 탐지하는 기적이라면 있지만, 그것 말고 특정한 대상만을 탐지하는 기적은 없어요. 감각을 증폭시켜 인지능력을 끌어올리는, 성기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적은 있지만, 이전에 신성력을 사용했을 때처럼 출력의 조정이 어려워서 연비가 너무 나쁜 것이 문제에요. 일부러 악용할 수 없도록 출력 조정 기능을 망가뜨려 놓은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알았어. 차라리 안 쓰느니만 못하다는 거네.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지.'

기적으로 습격자나 밀정을 미리 찾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랬다가는 또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니 그냥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위기사 건은…일단 티롤프를 호위기사로 곁에 두고 싶진 않아.'

셀린 엘리어드 영애와 화해를 위해 만나기로 한 것에 관한 고민을 일단 접어두고, 나는 호위기사로 누구를 선택하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네 명의 호위기사에서 일단 티롤프는 후보에서 제외했다.

실력과 재능은 호위기사로 선발된 성기사 중에서 가장 뛰어날 것이 분명하지만, 너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답답한 성격이 나와는 맞지 않아, 적당히 우호 관계만 수립해두고 평소에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역시 안면이 있고 실력도 있는 로나를 선택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일단 티롤프를 제외하고, 안면이 없어 실력도 이름도 모르는 두 호위기사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로나밖에 없었다.

'그럼 먼저 로나를 찾아가서 설득해 봐야겠어.'

…솔직히 나는 이때만 하더라도 로나를 설득하는 일이 간단하게 이루어질 일이라며 낙관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에일라 님. 에리올 선배님께는 이전에 목숨을 빚진 적이 있어 차마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아, 이건 글렀네.'

학연, 지연, 혈연.

전생에서 수도 없이 내 발목을 잡아대던 빌어먹을 연(?)놈들은 이 세계에서조차 내 발목을 여지없이 잡아채고 말았다.

*

"보고해라."

"예, 알겠습니다. 부네 님."

카르실리안 대륙의 동부에 접한, 악마들이 지배하는 대륙 칼라탄.

그곳의 남쪽에 영지를 지닌 악마 공작이자 용공(?)이라는 이명을 지닌 대악마, 부네는 온갖 동물과 종족의 뼈로 기괴하게 장식된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카르실리안 대륙에 파견했던 부하 악마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우선은 키니아 제국에 뤼네의 꿈을 퍼뜨린 것부터 듣도록 하지."

"예, 파견한 체인질링들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뤼네의 꿈은 순조롭게 키니아 제국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 뒤따라 나온다는 말이겠지. 머뭇거리지 말고 말해라."

나쁜 소식을 전하면 자기 목이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부하 악마의 기색을 읽어낸 부네는 머뭇거리지 말고 대답하라며 대답을 독촉했고, 부하 악마는 부네의 독촉을 듣자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입을 열었다.

"길더스텐 교단에서 뤼네의 꿈이 무언가 수상하다며 의심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합니다. 이단심문관들이 수도 리아트를 들쑤시며 뤼네의 꿈을 비밀리에 유통하던 범죄조직을 모조리 때려잡는 바람에 뤼네의 꿈을 유통하는 일에도 조금씩 차질이 생길 것 같다고 합니다."

"오호라. 길더스텐 교단 놈들도 제법이군. 하지만 그래봐야 그저 잠깐의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지만 부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냐는 질문이었고, 부하 악마는 이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빠르게 맞장구를 쳤다.

"그, 그렇습니다. 조금 일이 귀찮아지기는 했지만, 조금만 힘을 쓴다면 금방 복구가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게다가 한 체인질링의 보고에 의하면, 뤼네의 꿈을 장복했음에도 약간의 의존증만 있을 뿐, 강한 의존증을 앓고 있지는 않은 개체를 하나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재미있군. 안 그래도 첫 성공작이 망가져 버려서 다음 성공작은 언제일지 고민이었는데. 잘 되었어. 명령을 내리겠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며 얼굴에 짙은 미소를 띠는 부네의 모습에 부하 악마는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부네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부복했다.

"키니아 제국의 '바하이트 주허'를 움직여라. 자기네들이 악마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멍청한 얼간이들이라면 이 소식에 광분하겠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영원토록 지배하실 지옥의 공작이시어."

부네는 자신의 명령을 받들어 부하 악마가 작은 새끼용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날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자, 언제가 되어야 카르실리안의 얼간이들은 진실을 깨우칠 수 있을까."

나른한 표정을 지은 부네는 옥좌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피처럼 붉은 와인을 한 잔 음미하며 카르실리안의 종족들을 비웃었다.

"뭐, 늦어지는 것도 늦어지는 대로 나쁘지는 않겠지. 그만큼 절망이라는 감정이 짙게 숙성되어 그윽한 향을 낼 테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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