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38화 (38/80)

〈 38화 〉 전조 (2)

* * *

'시작부터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는데.'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로나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거절을 받으니, 절로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일단 에리올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에리올 선배는 제가 마르셀 이단심문관님의 종기사가 되기 전에 마르셀 님의 종기사를 맡으셨던 분입니다."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미간을 문지르는 것으로 진정시키며 나는 어째서 거절하는 것인지 이유를 물었고, 로나는 담담하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에일라 님도 아시다시피, 성기사는 악마를 비롯한 이단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서는 이들입니다. 거기에 이단심문관이라면 교단 내부에서 길더스텐 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훼손하려는 자들까지 상대해야 합니다."

"…계속하세요."

로나의 이야기는 제법 길어질 것 같았지만, 지금 로나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경쟁상대인 에리올 루펜의 과거와 연관된 정보이기도 했다.

그만한 정보를 공짜로 얻는 것이라면 내 시간을 할애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로나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가만히 경청했다.

"교단의 이름을 참칭하며 그릇된 믿음을 전파하던 이단자들을 상대하던 도중, 에리올 선배는 저를 비롯한 동료들을 지키려다 왼팔과 오른 다리를 잃고 성기사의 책무를 더는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만요. 에리올 루펜 씨의 팔과 다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는데요?"

내 질문에 로나는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낯빛이 어두워졌다.

"대주교님이 친히 치유의 기적을 베푸셔서 에리올 선배의 잘려 나간 팔과 다리는 다시 회복할 수 있었지만, 회복된 팔과 다리는 에리올 선배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 미안해요. 사정도 모르고 무심한 말을 해 버렸네요."

'이 정도로 마음의 빚이 쌓인 걸 봐선 말로 설득하기는 글렀네.'

안색이 어두워진 로나에게 급히 사과하며, 나는 로나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기로했다.

로나라는 안정적인 지지자를 기반으로 다른 호위기사의 표를 끌어온다는 원래의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하겠지만, 내게는 로나가 짊어진 마음의 짐을 덜어내거나, 강제로 내 뜻에 따르게 할 수단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호위기사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나? 이왕이면 관리하기 쉬운 상대를 호위기사로 두고 싶었는데.'

교단 측에서는 호위기사를 붙여 성녀 후보를 호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었지만, 성녀 후보들에게 호위기사를 붙이는 진짜 이유는 성녀 후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감시하려는 감시역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음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성녀님이 서약의 열쇠를 회수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성기사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릴 권위를 부여하는 '서약의 열쇠'를 이용하면 성기사 출신인 호위기사들에게 자신에게 투표하라는 명령을 내려 손쉽게 1등을 차지하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까지 시선이 닿아있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 성녀님이었다.

매일 엄청난 양의 업무를 처리하는 탓에 집무실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 무척이나 드물다고 하던데, 능수능란하게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능력이라니.

'절대로 적으로 삼아선 안 될 사람이야.'

[동감이에요.]

나는 그 무시무시한 능력에 혀를 내둘렀고, 에일라 역시 성녀님의 엄청난 능력에 동감을 표했다.

'그럼 로나는 포기하고 다른 호위기사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나. 에리올 루펜은 로나를 호위기사로 삼을 생각인 것 같으니까.'

에리올 루펜이 로나를 먼저 찾아와 설득한 것은 분명 로나를 제 호위기사로 두겠다는 결정을 마음속으로 내렸기에 행한 행동일 터이니, 이미 로나의 한 표를 확보한 에리올 루펜이 가장 많은 표를 차지하여 호위기사 선발의 우선권을 따낸다면 그녀가 지명할 호위기사는 분명 로나일 터였다.

호위기사로 염두에 두었던 로나를 에리올에게 빼앗긴 것은 뼈아팠지만, 그것에 집착한다고 이미 성녀님에게 반납한 '서약의 열쇠'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로나를 설득할 재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네요. 로나 자매의 상황이 그렇다면 저는 다른 호위기사를 알아보는 수밖에요. 로나 자매,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미안함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이는 로나를 뒤로하며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로나에서 선수를 빼앗겼으니, 다른 호위기사까지 선수를 빼앗기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

"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라우디아 앨러나흐 후보님. 아, 에일라 넬런 후보님 역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햇볕에 타 가무잡잡한 피부에 처럼 빛나는 금발을 지닌 건장한 체격의 성기사, 아우룸은 마치 연극을 하듯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이 녀석은 뭔가 외모부터가 마음에 안 드는걸.'

[이쪽으론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네요. 이번에도 허탕인 모양이에요.]

너무나도 정석적인 '금발 태닝 양아치'인 아우룸의 외모에 내가 불길함을 느낀 것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아우룸은 우연히도 방문이 겹친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와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노골적인 차이를 두고 있었다.

"하하하! 그래서 제가 악마를 상대했을 때, 한 손에는 깃발, 다른 한 손에는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가다 보니 어느새 악마들은 바닥에 피를 뿌리며 널브러져 있고, 저만 서서 남아있지 뭡니까."

"대단하네요. 악마는 길더스텐 님의 힘을 다루는 성기사라고 해도 쓰러뜨리기 힘든 존재일 텐데 수백이 넘는 악마들을 쓰러뜨리다니요."

명백히 에일라 넬런과는 거리를 두고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추근거리는 것이 대놓고 '나는 클라우디아 앨러나흐 성녀 후보의 호위기사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클라우디아 앨러나흐가 그런 아우룸의 허풍 가득한 무용담에 눈을 빛내며 맞장구를 치고 있으니, 내가 끼어들 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 낭비인 것은 파악했으니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네.'

마음 같아서는 노골적으로 에일라 넬런을 무시하는 아우룸의 상판에 시원하게 물을 끼얹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사소한 소동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불쾌감을 감추며 쉴새 없이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는 아우룸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뭔가 구린 냄새가 나. 이쪽에서 굳이 포섭할 가치도 없고, 저쪽에서도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일단 거리를 두기로 할까.'

[제 생각도 같아요. 무엇보다 저 아우룸이라는 성기사, 지금 떠벌리는 무용담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을 만큼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 안 본 눈이랑 안 들은 귀를 사고 싶다….'

아우룸이 클라우디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기회를 내려 달라 간청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눈꼴사나운 모습이라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입꼬리가 저절로 내려갔다.

'부디 제게 클라우디아 영애를 호위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니, 저걸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하는 아우룸의 비위가 끝장나게 좋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빨리 돌아가자.'

[동감이에요. 어서 돌아가죠.]

그리고 그 느끼한 아우룸의 대사에 나와 에일라는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야."

두 명의 호위기사를 만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숙소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에리올 루펜에 한 표를 행사할 로나,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에 한 표를 행사할 아우룸.

이미 두 개의 표가 향할 곳을 정한 시점에서 남은 것은 티롤프와 아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성기사인 칼린의 표를 각각 에린과 에일라가 나누어 가진다면 모든 성녀 후보에게 1명씩 호위기사가 매칭되어 굳이 우선권을 따낼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도 모든 성녀 후보들이 만족스러운 호위기사를 하나씩 나눠 가지는 그림이 그려지니 교단 역시 기꺼워하면 기꺼워했지, 탐탁지 않게 여길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티롤프가 에린을 투표하도록 설득하고, 시후가 칼린이라는 성기사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겠죠.]

에일라가 냉정하게 상황을 상기시키며 그 과정도 마냥 순탄치 않을 것을 경고했지만, 내겐 제법 자신이 있었다.

'티롤프는 대충 설득할 방법을 생각해 뒀어. 남은 건 칼린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이지.'

"저기…왜 나를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아니, 보는 건가요…."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티아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불안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티아, 그러고 보니 티아는 남부 출신이었죠."

"그, 그렇죠…?"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티아의 눈동자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티아도 포티아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네요."

"뭐? 몰라! 그런건 모른다고!"

어설프게나마 붙이던 존칭마저 생략하며 격렬하게 부정하는 티아였지만, 그 모습에서 나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티아는 포티아족과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라는 것과, 티아는 그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가문에서 쫓겨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는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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