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전조 (3)
* * *
포티아족.
카르실리안 대륙의 남동부에 주로 거주하는 종족으로, 열두 주신 중에서 불과 전쟁을 관장하는 신, '플레온'을 신앙하는 것으로 알려진 종족이다.
카르실리안 대륙의 남동부에 거주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근거지로 삼은 지역은 키니아 제국의 남부에 접해 있었고,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키니아 제국 남부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포티아족 역시 존재했다.
그러나 키니아 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 특히 그중에서 남부 출신의 인물에게 포티아족에 관해 물어본다면 결코 좋은 대답을 듣기는 어려웠다.
포티아족이 신앙하는 신, 플레온이 관장하는 것이 불과 전쟁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몹시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종족이었고, 매년 가을이 다가올 때마다 키니아 제국의 남부를 침략하여 약탈을 벌이기 일쑤였으니 포티아족이야말로 악마보다도 더한 놈들이라며 치를 떠는 이들이 많았던 탓이다.
"불이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에 사소한 도발에도 쉽게 흥분하는 호전적인 성격. 그건 분명 포티아족의 특징이었죠."
"…이번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내가 담담히 포티아족의 특징을 설명하자, 티아는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티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저는 티아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니까요."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 같은데."
티아의 불신 가득한 대답에 나는 잠시 티아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수녀원에서의 다소 불편했던 첫 만남부터, 시네티 마을에서 마수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원흉으로 지목된 티아를 구명한 일, 수도 리아트에서 '뤼네의 꿈'을 유통하던 범죄조직에 납치되었다가 이단심문관들에게 구조된 일까지.
"…전 언제나 티아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요?"
수도에서의 일은 내가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티아가 납치당하는 위기를 겪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내가 티아에게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되었지, 손해를 끼치는 행동을 한 적은 없지 않았던가.
아니, 오히려 적대적으로 대하던 티아를 내치지 않고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로운 행동이 아닌가.
"웃기지 마!"
하지만 나와는 생각이 달랐는지, 티아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너랑 같이 다니면서 몇 번이나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는데! 심지어 저번 납치사건 때는 조금만 늦었어도 악마한테 살해당했을 거란 말이야!"
"…악마라고요?"
"앗…."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다무는 티아였지만, 이미 내 귀는 티아가 외친 '악마에게 살해당할 뻔했다.'는 말을 똑똑히 들은 뒤였다.
"티아, 악마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주세요."
"모, 몰라! 말이 헛나온 거야!"
다른 주제로 말이 헛나온 것이었다면 나도 이렇게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말이 되나요. 대성당이 있는 수도 리아트에 악마가 나타난 일이예요. 당장 교단에 이 사실을 알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해야죠."
"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나 악마가 연관된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성녀님이 내게 서약의 열쇠를 맡기면서 했던 부탁이 악마와 뤼네의 꿈을 유통하는 범죄조직의 연관성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또 다른 공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흔들리는 눈동자는 가만히 붙잡아 두고서 그런 말을 하세요. 티아에겐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게 할 테니까 진실을 알려주세요."
"정말 말을 잘못한 거라니까!"
티아의 어깨를 붙잡고 계속 사실을 추궁하는 나의 질문과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벽까지 몰리게 된 티아의 절박한 부정이 서로 부딪치며, 나와 티아의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시후, 잠깐 물러나는 걸 추천하고 싶은데요.]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에일라가 도중에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지만, 한창 티아를 추궁하는 것에 집중하던 나는 그 조언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 안녕…하심까?"
에일라의 충고를 무시한 대가는 너무나도 빠르게 찾아왔다.
어느 틈에 도착한 것인지, 과거의 트라우마와 친근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말투로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문가에 서 있는, 타오르듯이 붉은빛을 띠는 적단발의 성기사.
"…어서 오세요. 칼린 씨."
내가 티아를 앞으로 내세워 설득하고자 했던 호위기사, 칼린이었다.
*
"하하하하, 역시 에일라 님을 찾아온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임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을 목격해 놓고서도, 자리를 피하거나 꺼리는 눈치도 없이 넉살 좋게 숙소의 한 자리를 차지한 칼린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교단에서 엄선한 성기사이니 실력이야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성정이 사납기로 유명한 포티아족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너무나도 뛰어난 친화력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교단에서 세뇌라도 받았나?'
[…교단까지 그런 꼴이라고는 생각도 하기 싫네요.]
'…그래. 내가 잘못했다.'
에일라의 자조적인 대꾸에 나는 에일라에게 사과를 건네는 동시에 영양가 없는 생각을 멈추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칼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 이건 뭠까? 먹어도 되겠슴까? 비싼 검까?"
"…마음대로 하세요, 가격이라면…아마 한 조각에 리벤 은화 한 닢 정도 할 거예요."
"…금이라도 바른 검까?"
아이셀이 샘플로 보내온 탓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그래놀라를 본 칼린이 마침 잘되었다는 듯이 달려들려고 했지만, 초코바 정도의 크기로 잘려 나온 한 조각에 1리벤 정도 한다는 내 설명을 듣자마자 곧바로 물러섰다.
성기사와 일반 기사를 막론하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제법 풍성한 식사를 하는 편인 기사의 하루 식비가 4~5리벤 정도이니, 한 조각에 1리벤이나 하는 과자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목구멍으로 넘겨 버리기엔 무척이나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금은 아니지만, 설탕을 졸여서 만든 시럽과 꿀이 들어갔죠."
"완전 사치품 아님까…."
참고로 말하자면, 키니아 제국의 계량 단위로 설탕 1리온, 그러니까 대략 500g 정도의 설탕 가격만 하더라도 12리벤이었다.
꿀은 그래도 키니아 제국 각지의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양초를 만드는 밀랍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양봉을 시행하고 있어 설탕보다는 쌌지만, 현대식 양봉처럼 설탕물을 꿀벌에게 먹여가며 꿀을 채취하는 것이 불가능해, 2년에 1번꼴로 꿀을 채취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비싼 것은 설탕과 매한가지였다.
"뭐, 저도 공짜로 받은 물건이니 먹어도 상관은 없어요."
"오, 그럼 사양 말고 감사히 먹겠슴다."
하지만 그것까지 내가 알 바인가.
어차피 제조법을 아이셀에게 넘긴 이상, 그래놀라를 만들어서 파는 것은 아이셀의 일이었고, 나는 그 제조법과 판매전략을 제시한 대가로 로열티만 쪽쪽 빨아먹으면 그만이었다.
아이셀도 '죽음의 신께 맹세하는 계약'을 나와 맺은 이상, 제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게 아니라면 감히 계약을 어기고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을 테고 말이다.
─와작와작
"오, 이거 진짜 맛있슴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린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 곧바로 그래놀라를 집어 입 안에 집어넣더니 그 맛에 감탄을 내뱉었다.
"에일라 님을 따르면 이런걸 매일 먹을 수 있는 검까?"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의욕을 보이는 칼린.
그런 칼린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요."
"오, 알겠슴다! 그럼 저는 에일라 님이 성녀가 될 때까지 함께하겠슴다!"
그래놀라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은 칼린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자신이 들어왔던 문 앞을 막아섰다.
"앗…아…."
내가 칼린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자리를 피하려던 티아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그런 티아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칼린에게 부탁했다.
"칼린, 출입구에 다른 사람이 다가오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나요?"
"얼마든지 명령만 내려주시지 말입니다."
흔쾌히 내 부탁을 수락한 칼린의 손에 문이 닫혔고, 티아는 마지막 탈출구가 눈앞에서 닫혀 버리기라도 한 듯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 안 돼!"
"돼요."
닫혀 버린 문을 향해 손을 뻗는 티아의 절규를 일축하며, 나는 다시 티아의 심문에 들어갔다.
*
문을 닫자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칼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성녀 후보님을 모시게 되었어.'
사실, 칼린은 이미 다른 성녀 후보들을 만나 보고, 마지막으로 에일라 넬런을 찾은 상황이었다.
"클라우디아 앨러나흐 후보님, 만나서 반갑슴다."
"아, 말투가 조금 독특…하시네요."
처음으로 찾은 후보, 클라우디아 앨러나흐의 반응은 정석 그 자체였다.
칼린의 외모를 보고 포티아족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칼린의 표를 얻어내기 위해 겉으로는 예의를 차리면서 적당히 좋은 말을 늘어놓는 것으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모습에 칼린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포티아족이시군요."
"네, 그렇슴다. 어릴 때부터 교단에서 거둬줘서 길더스텐 님의 가르침을 배웠슴다."
두 번째로 찾은 후보, 에리올 루펜의 반응은 싸늘했다.
차라리 익숙하고 솔직한 반응이라, 어설픈 배려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던 클라우디아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평가하며, 칼린은 에리올 루펜과의 만남을 짧게 끝냈다.
"언니는 누구야?"
"…성녀 후보님들을 호위할 호위기사 중의 하나로 선발된 칼린임다."
"으응…이상해! 언니한테서 왠지 가까이하기 싫은 느낌이 들어!"
에린 에드피드의 만남에서는 아예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했지.'
묘하게 에린 에드피드 후보를 보면 칼린에게 내재한 포티아족의 본능이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어, 칼린 역시 에린 에드피드 후보와의 만남을 빠르게 끝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후보인 에일라 넬런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라니까!"
"티아! 제게 숨기지 말고 똑바로 말하세요!"
에일라 넬런 후보가 머무르는 숙소를 찾아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안에서 말다툼이 벌어지기라고 했는지 날카로운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왠지 싫은 느낌이 들지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기에, 칼린은 인내심을 가지고 세 번에 걸쳐 문을 노크했다.
그러나 그렇게 노크를 해도 방 안에서는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고, 문이 열리지도 않았다.
"실례인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슴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칼린은 굳게 닫힌 문의 문고리를 밀었다.
─끼이익
잠금이 걸려 있지 않은 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곧바로 열렸다.
그리고 칼린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 안녕…하심까?"
푸른 가을철의 하늘처럼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에일라 넬런이 그와 대비되게 해 질 녘의 눈부신 노을빛과도 같은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부르르 떠는 티아 이글라스를 벽으로 몰아놓는 모습이었다.
'뭐야 이게.'
얼떨결에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칼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일부 수녀들이 동성애에 눈을 떠서 음행을 벌이다 발각되었다는 소문이나 소식을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느낌에 저 적갈색 머리…포티아족?'
칼린의 혼란은 티아 이글라스의 모습을 보면서 더 심해졌다.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 색이라는 종족의 대표적인 특징을 가려도 동족을 알아볼 수 있는 포티아족의 날카로운 감이 티아 이글라스는 분명 포티아족의 피를 이은 존재임을 알려온 탓이었다.
"…어서 오세요. 칼린 씨."
서로 모습을 확인하고 당황하여 꽤 긴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비교적 빠르게 정신을 차린 에일라 넬런이 칼린에게 인사를 건네오자, 칼린 역시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설명을 요구했다.
"…에일라 후보님,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심까?"
"…네. 일단 앉으시죠. 설명에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키니아 제국에서 살아가는 인간 대부분은 포티아족을 봤을 때, 거의 무조건 배척하고 원수 보듯 하는 것이 기본이고, 그나마 대우를 해 주는 것이 무시였다.
대성당에서 칼린이 호위기사로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소란이 일지 않았던 것은 예복으로 포티아족의 특징인 머리카락을 가려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
하지만 에일라 넬런이라는 이 성녀 후보님은 그런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후보님은 제법 재미있겠어.'
에일라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으며, 칼린은 속으로 묘한 기대를 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