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전조 (4)
* * *
"늦는군."
티롤프는 약속보다 늦어지는 에일라 일행의 도착에 다소 짜증이 섞인 불평을 입 밖으로 꺼냈다.
"성녀 후보로서의 일이 바쁘더라도 너무 늦는군."
분명 에일라 넬런은 호위기사를 설득하느라 한창 바쁠 성녀 후보의 입장이었지만, 티롤프 역시 그 설득을 받는 호위기사의 하나로서 바쁜 상황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 그 악녀가 변했을 리가 없잖나.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 제 체면을 세우려는 생각이겠지. 사과도 성녀 후보로서의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준의 형식적인 사과에 불과하겠지."
티롤프가 에일라 넬런과 셀린 엘리어드의 화해를 주선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약속에 끼어든 불청객 중 하나인 아덴츠 위클라인은 늦어지는 에일라의 도착에 비웃음을 흘리며 빈정거렸다.
"……."
더불어 아덴츠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약속 장소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필라스 역시 아무런 말 없이 허리춤에 찬 검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쯤 해 둬라. 에일라 넬런은 적어도 약속을 파투 내지는 않을 거다."
그나마 에일라와 협력하면서 금전적인 이득을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오스라드 상단 내에서 흔들렸던 입지를 다시 회복한 아이셀 오스라드 정도가 에일라를 변호했다는 점이 에일라로서는 위안거리이리라.
"흥, 어설프게 손을 쓰다가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차마 주인님 욕은 못 하겠나?"
"…이 망나니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군."
"왜, 찔리는 거냐?"
에일라에게 발목을 잡혀서 고개를 숙였다며 연신 빈정거리는 아덴츠의 독설에 울컥한 아이셀이 똑같이 독설로 응수했지만, 아덴츠는 그런 아이셀을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가를 이죽거리며 비웃었다.
"싸우는 건 거기까지 해 둬라. 셀린 양이 저택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리고 이 자리는 화해를 위해 마련한 자리다. 공연한 분란을 일으키지 마라."
이번 화해 자리를 주선한 사람으로서, 티롤프가 주변 분위기를 흐리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얼마 안 가 아덴츠와 아이셀 사이에는 주먹다짐이 벌어졌을 것이다.
"쳇."
"흥."
불만스럽다는 듯 서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 아덴츠와 아이셀의 행동은 분명 유치한 모습이었지만, 한 여인을 두고 경쟁하는 연적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이라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에일라 넬런은 언제 오는 건데? 먼저 약속을 잡아놓고 이렇게 늦어도 되는 거야?"
처음부터 에일라 넬런과 셀린 엘리어드가 화해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데다, 에일라 넬런이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는 것에 대한 짜증을 담아 아덴츠가 공연히 에일라를 비난하는 것으로 짜증을 풀고 있을 때.
"역시 위클라인 백작가의 망나니라는 이름은 어디 가질 않는 모양이군요. 무례한 언동을 할 때는 때와 장소를 가리시는 것을 추천드리죠."
"에일라 님의 말이 맞슴다.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검까?"
"왜, 왜 나까지…."
아덴츠에게는 참 타이밍이 나쁘게도, 에일라 넬런 일행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그래서 에일라 넬런은 언제 오는 건데? 먼저 약속을 잡아놓고 이렇게 늦어도 되는 거야?"
'아이셀 오스라드도 그렇고, 티롤프도 그렇고, 왜 셀린 엘리어드 영애에 관심을 가진 남자들은 성격이 왜 다 저 모양이야?'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걱정해서 나름대로 서두른 보람도 없이,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듣게 된 것은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아덴츠의 불평이었다.
"역시 위클라인 백작가의 망나니라는 이름은 어디 가질 않는 모양이군요. 무례한 언동을 할 때는 때와 장소를 가리시는 것을 추천드리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호의에는 호의로, 적의에는 적의로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
나는 아덴츠의 불평에 마찬가지로 독설로 답해주었다.
"에일라 님의 말이 맞슴다.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검까?"
"왜, 왜 나까지…."
…그 뒤에 칼린과 티아라는 쓸데없는 사족이 따라붙긴 했지만 말이다.
"흥, 여전히 그 사악한 혀는 멀쩡한가 보구나. 마음 같아선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주고 싶지만…."
아덴츠가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렸지만, 일단 그는 한발 물러서는 것을 선택했다.
"…셀린의 얼굴을 봐서 참는다."
이번 약속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내가 도착한 것을 알아차리고 저택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마 제가 마음에 둔 여자 앞에서 점수가 깎일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아, 반가워요. 에일라 넬런 영애? 아니, 이게 아닌가…성녀 후보님?"
아무튼, 셀린 엘리어드 영애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은발에 사파이어 빛으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지닌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확실히 저 남자들이 빠질만한 외모긴 하네.'
슬쩍 시선을 돌려,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남자들(?)을 둘러보니 그들 모두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거참, 인사하기 전에 간단히 탐색하는 것도 못 기다려서 저렇게 채근하는 눈빛이라니.'
게다가 잠깐 셀린 엘리어드를 탐색하고 있자니, '셀린 영애는 인사를 했는데 너는 어서 인사하지 않고 뭐하냐?'는 네 명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용하기 편했겠죠. 저 멍청이들에게 에일라 넬런이라는 알아보기 쉬운 적을 보여주어서 공격하게 하기에는.]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향한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남자들의 집착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에일라 역시 한숨을 쉬며 저 저들을 멍청한 남자들이라 평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셀린 엘리어드 영애. 호칭은 편하신 대로 불러도 괜찮아요."
그 시선에 오기가 생겨 '너희들 정말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줄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래봐야 도발밖에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그래도 에일라 넬런 영애…아니 성녀 후보님에게 무례한 말을 할 수는…."
"…그럼 에일라 씨라고 불러주세요."
"헤헤, 네! 에일라 씨!"
해맑다.
내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마주하며 받은 느낌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두운 일과 고난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듯 밝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는 셀린 엘리어드 영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데.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라면 셀린 엘리어드 영애는 에일라 넬런에게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지금 이 태도는 대체 뭐지?'
[동감이에요.]
그리고 나와 에일라는 그런 셀런 엘리어드의 모습에서 무척이나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뒤를 돌아보며 이번 자리를 주선한 티롤프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이전의 마차 사고 이후, 지금의 셀린 영애는 최근 반년간의 기억이 없다."
"뭐라고요?"
[망각의 비술…그 빌어먹을 노인네들이….]
셀린 엘리어드가 최근 반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티롤프의 설명에 나는 놀라 되물었고, 에일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 이를 갈았다.
'저 남자들이 왜 그렇게 에일라를 미워하다 못해 죽이려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자기네들이 마음을 둔 여자가 사고를 당한 것도 모자라서 최근 반년간의 기억까지 잃어버렸다.
거기다 저들은 그 사고의 원흉이 에일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 그만한 적의를 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실은 좀 다르지만…증명할 방법이 없네.'
[그들이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기억을 지워놓으면서 증거를 조작해 놓지 않았을 리가 없죠. 아마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들만 남겨놓았을 거예요.]
나로서도 에일라로서도 무척 억울한 누명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사실은 다르다고 호소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 뻔했다.
'이래서야 단순한 사죄로 끝낼 수는 없겠는걸.'
결국 나는 이 복잡하게 꼬여버린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며,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었다는 엘리어드 가의 저택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광원이라고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조그마한 양초 하나가 전부인 어둑어둑한 방.
"새 세 마리가 모두 둥지로 모였다."
방 안의 어둠에 금방이라도 녹아들 것만 같은 새까만 로브를 두르고 얼굴에는 우는 얼굴을 형상화한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쓴 남자는 마치 신탁을 전하듯 위엄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남자의 앞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새까만 로브를 둘렀지만, 웃는 얼굴을 형상화한 가면을 썼다는 차이점이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채, 남자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새장을 벗어났던 새가 한 마리."
남자가 다시 입을 열자, 남자의 정면에 푸른 머리카락과 다소 사나워 보이는 인상을 주는 푸른 눈동자를 지닌, 수녀복을 걸친 소녀의 영상이 떠올랐다.
"기억을 잃고 둥지를 떠도는 새가 한 마리."
이어서 남자가 입을 열자, 남자의 좌측에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는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해맑고 아름다운 소녀의 영상이 떠올랐다.
"새로이 새장에 집어넣을 새가 한 마리."
또다시 남자가 입을 열자, 이번에는 남자의 우측에 적갈색의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다소 불안해 보이는 기색을 보이는 소녀의 영상이 떠올랐다.
"가라. '진실의 탐구자'들이여. 새들을 새장 안으로 돌려보낼 때가 왔다."
남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웃는 가면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기도하던 자세를 풀며 일제히 남자의 말에 응답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정당한 행동이 될지니."
터무니없는 궤변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대답에는 짙은 광기가 진득하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