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전조 (5)
* * *
엘리어드 가의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이 탁 트여 개방적인 느낌을 주는 홀이었다.
다만, 그 홀에는 귀족들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화려한 색으로 물들인 융단이 아니라 다소 빛바랜 융단이 깔려 있었고, 장식용으로 벽면에 걸어놓은 그림은 관리가 소홀했는지, 나라는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급히 먼지만 털어내 구색만 갖춘 티가 다분했다.
다시 말해, 엘리어드 가의 저택은 화려함과 사치로는 제국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 귀족의 저택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저택이 좀 어수선하죠? 죄송해요. 같이 마차에 타셨던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문을 갑자기 이어받게 되어서…."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고개를 숙이며 준비가 미흡했음을 사과했지만, 나로서는 그 사과가 무척이나 떨떠름했다.
'…쌓지도 않았던 업보가 쌓이는 느낌이야.'
아마 그 마차 사고라는 것은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노린 수수께끼의 조직이 벌인 일이겠지만, 지금은 에일라 넬런이 뒤에서 그 사고를 사주했다고 알려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에일라에게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저택의 관리가 미흡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과하는 그림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그건 분명 에일라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벌써 눈가 꿈틀거리는 것 봐라. 빨리 대답해야겠어.'
셀린의 남자(?)들이 보내는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있자니, '자기네들은 그 죽고 못 사는 셀린 영애의 저택이 이 꼴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했냐?'는 생각에 절로 입가가 비틀리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나는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셀린 영애. 검소함은 길더스텐 님을 모시는 사제라면 응당 갖춰야 할 덕목이니, 호화스러운 준비를 했다면 제가 불편했을 거예요."
"뭐?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검소함은 성직자의 덕목이라는 말을 인용한 내 뻔뻔한 대답에 어이가 없었는지, 아덴츠 위클라인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자, 부외자는 잠시 빠져주시는 검다."
"누가 부외자냐! 크윽, 무슨 힘이…!"
그러나 아덴츠의 난입은 칼린이 아덴츠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것으로 간단히 제지되고 말았다.
"아…그럼 다행이네요! 그럼 부디 편안히 있다 가세요!"
다행이라며 손뼉을 치면서 활짝 웃는 셀린 영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애, 사고 이후로 유아 퇴행도 같이 온 것 같은데.'
그런 셀린 영애의 모습이 내 눈에는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아무리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반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려 지금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의 부모님까지 세상을 떠나게 한 사고의 흑막으로 알려진 에일라를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에 최악의 경우로 예상했던, 깊은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타는 모습이 아닌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었지만, 적의가 아니라 오히려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어떻게 셀린 영애를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악의에는 강하면서 호의에는 약하네요.]
'시끄러워.'
불퉁하게 받아치긴 했지만, 에일라의 평가는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 법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역사 깊은 문구는 에일라의 몸에 빙의하기 전부터 내 삶의 좌우명이었다.
사람이란 간사한 생물이라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우습게 여기지만, 독기를 품고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드는 사람은 두렵게 여기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좌우명을 가지고 살아간 탓에,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덕분에 내 인간관계는 철저한 손익계산에 기반한 관계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고, 진솔하게 내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상대는 가족 말고는 거의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우선 이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어요."
그렇기에 내가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회피'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이 제 악행의 증거라고 제시했던 증거들…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우선, 그 마차 사고부터요."
선의보다는 악의를 마주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익숙하고 편안한 일이었으니까.
*
"하하하."
에일라의 뻔뻔한 요구에 아덴츠 위클라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껏 한다는 말이 고작 이따위 변명인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앞이라 거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최대한 참고 있었지만, 에일라 넬런의 그 발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증거가 의심스럽다는 책임회피냐? 어이가 없군. 더 들을 필요도 없어. 난 돌아가겠어."
아덴츠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주먹을 휘두르거나 에일라의 면전에 장갑을 내던지며 결투를 신청해도 부족했지만, 셀린 엘리어드 영애가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이를 배려하여 최대한 정중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동감이다."
과묵하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필라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덴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황실을 지키는 검으로써 함부로 검을 뽑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군.'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는 다르게 필라스의 속마음 역시 아덴츠 못지않게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에일라 넬런이 셀린 영애에게 사과를 한다 해서 보러 왔건만, 에일라 넬런은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인정하기는커녕 셀린 영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마차 사고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그가 느끼는 분노는 더욱 컸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 정보는 믿을만한 정보원을 통해 입수한 정보였다."
에일라와 거래를 했던 아이셀 오스라드 역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증거는 분명 믿을만한 것이고, 어째서 그것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상하네요. 그 증거대로라면 저는 셀린 엘리어드 영애는 물론이고, 엘리어드 백작가를 통째로 전멸시킬 생각으로 그 마차 사고를 일으켰다는 것이 되지 않나요? 제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었나요? 한 귀족 가문을 통째로 전멸시킬 이유가?"
"네 녀석은 이전에도 멀쩡했던 귀족 가문을 날려버린 전적이 있지 않나!"
일견 냉혹해 보이기까지 하는 에일라의 질문에 아덴츠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네 녀석이 5년 전에 멀쩡하던 밀턴 백작가를 박살 냈다는 소문이 수도에 파다했었는데 뭘 발뺌하는 거냐! 한 번 저질렀던 일이니까 망설임도 없이 행했겠지! 어디서 뻔뻔한 말을 내뱉는 거냐!"
아덴츠의 추궁에 에일라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술과 도박에 빠져서 가산을 모조리 날리는 것도 모자라서, 하나밖에 없는 제 자식을 나이 차이가 서른 살이 넘는 졸부에게 팔아넘기려던 돼지 새끼가 언제부터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버린 거죠?"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아덴츠를 똑바로 바라보는 에일라의 눈은 어느새 평소의 푸른빛이 아닌, 찬란히 빛나는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
[…후후후. 그 사건이 그렇게 알려져 있었군요. 시후, 잠시만 입을 빌릴 수 있을까요.]
아덴츠로부터 '밀턴 백작가'를 몰락시켰다는 말을 듣자, 에일라는 싸늘하게 웃으며 내 입을 빌려 자신이 말을 해도 될지를 물어왔다.
'…애초에 네 입이잖아. 어차피 네 기억을 영화 보듯이 살펴보기만 했던 나보다는 네가 말하는 편이 더 낫겠지.'
에일라가 나를 향한 경계심을 푼 덕에, 나는 에일라가 봉인해 두었던 기억을 비롯하여 에일라의 기억 대부분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라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들을 하였는지는 그저 앞뒤 사정을 살펴서 추측하거나 당사자인 에일라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효율성의 면에서 에일라가 직접 말하는 것이 훨씬 나았기에 나는 에일라에게 바통을 넘겼다.
'…눈동자 색이 바뀌는 건 어쩔 수 없나.'
다만 조금 문제가 있다면, 에일라가 직접 몸을 움직이거나 신성력을 사용할 때 푸른빛에서 금빛으로 변해버리는 눈동자였다.
변해버린 눈동자 색으로 말미암아,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당장 말해!"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분노에 눈이 멀었는지, 아덴츠는 바뀐 눈동자의 색에 반응하지 않았다.
"루카스 밀턴. 다른 상속자가 없었던 탓에 운 좋게 백작가를 잇는 후계자가 되었지만, 그 저열한 성정을 버리지 못한 탓에 수도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쌓았던 밀턴 백작가의 재산을 도박으로 몽땅 날려버린 머저리죠."
"증거도 없는, 네 주장일 뿐이잖아!"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한 에일라의 말에 아덴츠가 끼어들었지만, 에일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덴츠를 노려보았다.
"이야기하는 중에는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으세요. 그에게는 하급 귀족 출신의 부인이 하나 있었지만, 첫 자식인 딸을 낳은 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뭐, 그 1년 사이에 실컷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정부를 만들었던 인간이니 부인이 죽어가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죠. 그나마 딸은 사교계의 평판을 신경 써서 겉으로는 여느 영애들 못지않게 꾸몄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인형의 삶이었죠."
"거짓말, 거짓말이다! 그래서 네가 그 영애를 구하기 위해서 힘을 썼다고? 그렇다면 그 영애는 지금 어디에 있나! 증거를 말해봐라!"
아덴츠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에일라의 말을 부정했지만, 그런 아덴츠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고양이에게서 도망치다 궁지에 몰린 쥐의 발악과 다름이 없었다.
"세이사 밀턴. 공교롭게도 제가 출가한 수녀원과 같은 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더군요. 황실의 궁내부에서 관리하는 귀족의 작위 수여와 박탈에 관한 문서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황실 호위대 소속인 필라스를 흘끗 곁눈질하며 날린 에일라의 마지막 일격에 아덴츠는 이를 악물며 에일라를 노려보았지만, 이 설전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뒤였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셀린 양을 이렇게 만든 마차 사고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시후, 여기서부터는 시후에게 맡기겠어요.]
차마 자존심을 접을 수 없어 끝까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진 아덴츠였지만, 에일라에게서 다시 바통을 넘겨받은 내가 곧바로 입을 열어 반박했다.
"엘리어드 백작가를 전멸시킨 끔찍한 마차 사고, 하지만 그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부자연스러운 점이 존재하죠."
"부자연스러운 점?"
조금 전에 말다툼을 했던 것으로 보아 아덴츠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 아이셀이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아덴츠를 곁눈질하며 내게 판을 깔아주었다.
"우선, 마차 사고로 사망한 엘리어드 백작가의 인물은 다음과 같죠."
엘리어드 백작과 그 부인, 백작가의 재산과 시종, 하인 등을 도맡아 관리하는 집사장, 그 외 여러 시종과 하인 등의 이름을 줄줄이 언급한 뒤, 나는 멈추지 않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망한 이들에게서는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하죠. 모두 엘리어드 가에 충실했던 이들이라는 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제가 속한 가문에 충실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아이셀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모나 담당 시녀처럼 셀린 영애를 보살피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죠. 부모와 돌봐주는 사람을 모두 잃은 셀린 영애를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말이죠. 그렇다면 이 일을 꾸민 사람은…."
─채애앵
아직까진 내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발생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추측을 확신으로 바꾸는 소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