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보니 성녀 같다-42화 (42/80)

〈 42화 〉 전조 (6)

* * *

"당신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르한 에나프 부집사장님? 아니, 지금은 집사장님이라 부르는 게 좋을까요?"

"윽!"

나를 호위하기 위해 칼린이 휘두른 검에 맞아 바닥으로 튕겨나간 나이프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중년인, 아르한 에나프는 내 질문에 괴로운 신음으로 화답했다.

"저항하지 마라. 아르한 에나프."

저택 내부로 들어온 이후로 줄곧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했던 티롤프가 아르한의 팔을 걷어차며 그대로 그를 바닥에 무릎 꿇린 탓이었다.

"아르한 집사장님?"

셀린 엘리어드 영애는 갑자기 벌어진 나와 아덴츠 위클라인의 말다툼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직 나이가 어린 자신을 대신하여 사실상 엘리어드 가문을 관리해왔던 아르한 에나프 집사장이 나를 향해 나이프를 던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곧바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동안 백작 놀이는 즐거우셨는지 모르겠군요. 아르한 에나프 남작님."

"잘도 지껄이는구나. 에일라 넬런! 크윽!"

내가 가볍게 도발하자 아르한은 곧바로 분노에 가득 찬 말을 쏟아내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티롤프가 팔에 힘을 주자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

"마차 사고가 있었던 날, 에나프 남작님은 참 '운이 좋게도' 저택에서 업무를 보시는 바람에 사고를 피해가셨죠. 원래 집사장이셨던 미넬 남작님은 마차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분의 충실한 수족이었던 유모와 셀린 엘리어드 영애의 전담 시녀까지 사고로 세상을 떠났죠. 참으로 '운이 좋은' 일이었지요. 안 그렇습니까? 에나프 남작님?"

"……."

에나프 남작은 이어지는 내 추궁에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는 티롤프라는 우리 안에 갇힌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뭐, 거기까진 '운이 좋아서' 벌어진 우연의 일치일 수 있죠. 실제로 이를 의심한 조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남작님은 엘리어드 백작가에 고용된 시종들과 하인들을 재정 부족을 이유로 들며 대거 해고하고 백작가에는 어울리지 않게 질이 떨어지는 이들로 채워 넣었지요. 남작님의 입맛에 맞는 이들로 말이죠."

"……."

이제는 더 이상 내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홱 뒤로 돌려버리는 에나프 남작.

"물론 이것도 심증에 불과할 뿐, 똑똑하신 남작님은 반박할 거리를 준비해 두었겠죠.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죠."

저번에 있었던 티아의 납치.

이단심문관들이 티아를 납치했던 범죄자들을 온갖 방법으로 심문한 결과, 티아의 납치를 뒤에서 사주한 자의 이름으로 아르한 에나프 남작이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좀 더 내밀한 조사가 있은 뒤로, 그들의 졸개 중 일부가 엘리어드 백작가의 사용인으로 들어간 사실도 드러났음은 물론이었다.

"하, 거기서 꼬리를 밟힐 줄이야. 역시 멍청한 범죄자 놈들은 믿을 수 없군."

잘 숨겨왔던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들켜버렸다는 사실에 에나프 남작은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 이제 와서 이런 증거는 아무래도 좋아요. 솔직히 먼저 나이프를 던지면서 이렇게 자백하실 줄은 몰랐죠. 그게 아니면 제 목숨을 거두라고 에나프 남작님의 '후원자'분이 명령이라도 하신 건가요?"

"'후원자'의 명령이라고? 크하하하!"

내가 에나프 남작 뒤에 존재하고 있을 '후원자'를 언급하자, 에나프 남작은 내 추궁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 '후원자'께서 에일라 넬런, 네년을 이 저택으로 끌어들이라고 하셨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내가 네녀석들을 이 저택으로 들였을 것 같나? 네녀석들은 단 한 명도 이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와라!"

에나프 남작의 선언과 함께 저택 곳곳에서 나이프, 부지깽이, 몽둥이 등의 무기로 무장한 엘리어드 백작가의 하인들, 다시 말해 에나프 남작의 수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제기랄, 이 하인들 전부…."

성기사단의 촉망받는 인재 티롤프와 최연소 황실 호위대원이라는 필라스라는 전력, 그리고 나름대로 싸움에는 자신이 있는 아덴츠만 놓고 보면 에나프 남작의 수하들이 그들을 이길 가능성은 작았다.

"그어어어억."

그러나 도저히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초점 없는 시선을 보내오는 하인들의 모습은 분명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셀린은 내가 지키겠어."

"쳇, 검을 들고 오지 않은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필라스는 검을 뽑아 셀린 영애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고, 아덴츠 역시 무기는 없었지만, 셀린 영애를 향해 무언가 날아드는 것이 있다면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막을 각오를 다지며 주위를 경계했다.

"…날 속였었군. 에나프 남작. 그렇다면 내게 넘겼던 정보들 역시 전부…."

"크흐흐. 지금까지는 바깥의 시선을 속일 필요가 있었지만, 후원자께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지. 후계자가 이렇게 멍청해서야, 오스라드 상단이 키니아 제국 제일의 상단이 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나?"

아이셀은 그동안 에나프 남작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로 주먹을 부르르 떨며 에나프 남작을 노려보았지만, 에나프 남작은 뻔뻔하게 웃으며 아이셀을 도발했다.

"자, 공격해라! 자기들이 제일인 줄 아는 저 건방진 천둥벌거숭이 놈들을 죽여버려!"

"그워어어억!"

에나프 남작이 공격 명령을 내리자, 마치 좀비처럼 괴성을 질러대는 에나프 남작의 수하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하하하하! 어서 나를 풀어주지 않으면 너희들이 애지중지하는 셀린 영애가…."

─빠악

"입만 살았군. 저런 수하를 부린다고 네가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나."

티롤프의 주먹이 에나프 남작의 안면을 강타하며 에나프 남작의 협박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크흐흐! 그런다고 내 수하들이 멈출 것 같으냐? 모두 뤼네의 꿈에 푹 절여진 놈들이다. 팔다리 하나 날아간다고 꼼짝할 수…커헉!"

코뼈가 부러졌는지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자기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리던 에나프 남작은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네녀석의 다리가 날아가도 그런지 한 번 보도록 하지."

티롤프가 어느새 자신의 검을 뽑아 에나프 남작의 다리 힘줄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우선은 셀린 영애를 지켜야 하니 일단 이 정도로 멈춰주겠다. 순순히 수하들을 물리고 저항을 포기해라."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미 힘줄이 끊기면서 몰려오는 고통을 버티지 못한 에나프 남작의 정신은 끊긴 지 오래였기에.

'…완전히 미친놈이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는 티롤프라는 인물의 위험도를 상향 조정했다.

[기사의 덕목 중에 여성을 존중하라는 덕목이 없었다면 아마 수녀원으로 찾아와 검을 휘둘렀을 남자예요. 율법에 따르면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를 살해하는 것은 중죄이니 죽이지는 않겠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니까요.]

'굳이 부연 설명 안 해도 알겠어.'

하여간 이번 일이 끝나면 돈을 후원받는 관계인 아이셀 말고 다른 남자들과는 완전히 연을 끊어버리든가 해야지.

*

─빠각

에나프 남작이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에나프 남작의 수하들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필라스와 티롤프의 손에 제압당했다.

약에 취해있던 탓에 검을 휘둘러 이들을 베는 것보다는 칼집째로 머리를 후려쳐서 기절시키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기에, 엘리어드 저택 내부는 삽시간에 쇳덩이로 머리를 후려치는 소리로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저건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소리다…. 절대 사람 대가리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아니다….'

그 광경은 도저히 두 눈 뜨고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기에, 나는 셀린 영애와 티아를 데리고 홀 구석으로 물러나 그 참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야, 이거 손맛 죽이는데?!"

'미친놈들….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야. 진짜 이번 일 끝나면 손절하고 만다.'

아덴츠가 기절한 에나프 남작의 수하가 쥐고 있던 부지깽이를 뺏어 들고 티롤프와 필라스가 진행 중이던 두더지 잡기(?)에 난입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모습은 뭐랄까,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저게 키니아 제국의 귀족인가? 칼라탄의 악마가 아니고?"

'그러는 댁은 마수를 시네티 마을로 불러들여서 날 죽이려 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아덴츠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아이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냉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짓은 별 차이도 없는 주제에 대체 누가 누구더러 악마라는 건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요. 그들이 나선 것 치고는 너무 간단하게 정리되었어요.]

'그래. 아무리 에나프 남작이 버리는 패라고 해도 너무 허술했지.'

티아를 추궁한 끝에 '뤼네의 꿈'을 유통하는 일에 악마가 개입했고, 악마들이 뤼네의 꿈을 상용한 이들을 활용해 무언가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낸 나는 내가 셀린 엘리어드 영애를 만나러 가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악마와 손을 잡은 이단자들이 자신들이 만들었다 실패한 실패작, 지금 눈독을 들이고 자신들의 것으로 길들이는 중인 실험체가 서로 만나는 일이니, 그들은 한꺼번에 실험체들을 수확할 이 일석이조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성녀님을 찾아가서 지원을 요청한 것은 괜히 예민했던 걸까? 아니면 저쪽에서 먼저 눈치채고 철수한 건가?'

성녀님을 찾아가 '뤼네의 꿈'을 유통하는 일에 악마가 연관되었으며, 이를 통해 무언가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받아내는 동시에, 그들을 확실하게 엘리어드 저택으로 끌어내 소탕할 목적으로 자기는 가지 않겠다며 버티던 티아까지 데리고 왔는데, 정작 그물에 걸린 것은 고작 에나프 남작이라는 송사리 한 마리였다.

'뭐, 일단 이것으로 에일라의 무고함을 증명하기도 했고, 위험한 일 없이 이렇게 끝나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

집요하게 신의 힘에 집착하는 그들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다는 찝찝한 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검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기에는 에나프 남작과 그 수하들은 너무나도 쉽게 제압되고 있었다.

"자, 마지막 한 놈!"

아덴츠가 마무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에나프의 수하의 머리를 향해 부지깽이를 내려쳤다.

이제 저 마지막 수하까지 쓰러지면 이들을 바깥에서 대기하던 교단의 이단심문관들에게 넘기면 이번 일은 이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으리라.

"우습군."

그러나 그런 기대를 깨트리듯, 마지막으로 남은 에나프 남작의 수하는 아덴츠가 휘두른 부지깽이를 아주 가볍게 한 손으로 붙잡았다.

"에나프 남작은 본인이 가진 능력은 평범함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제법 쓸모있는 체스 말이었지."

"뭐, 뭐 이런 힘이…!"

부지깽이를 붙잡은 수하의 손아귀에서 나오는 힘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아덴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필라스와 티롤프가 그런 수하를 제압하기 위해 각자 좌우에서 검을 휘둘렀지만, 그 공격 또한 수하는 왼팔과 오른발을 들어 올리는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막아냈다.

"에나프 남작이 지닌 가치는 폰 정도의 가치."

마지막으로 남은 수하는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서, 팔다리를 재차 휘두르는 것으로 세 명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나 체스 말 중에서 가치가 낮은 폰이라도 장기판의 끝에 도달하면 승격하여 그 가치를 드높일 수 있는 법."

여전히 영문 모를 소리를 계속해서 내뱉던 수하의 모습이 잠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이내 새까만 로브에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모습으로 바뀌었다.

"일어나라. 꿈의 노예들아."

─쿠드득

불쾌하면서도 불길한 소리가 저택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아, 아아아악! 사, 살려줘!"

기절했다가 막 정신을 차렸는지 에나프 남작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흉측한 모습으로 변이하기 시작하는 자기 몸을 보며 고통 가득한 비명을 내질렀다.

"내, 내 팔이! 내 다리가!"

그의 양팔은 길쭉하고 예리한 톱날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다리는 악마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발굽이 달린 다리로 변화했다.

"크, 하하, 이거, 끝내주는, 데!"

그러나 고통 가득했던 그의 비명은 변이가 진행되면서 환희와 희열에 가득 찬 목소리로 변했다.

"크, 하하, 다, 죽여…!"

거기에 마지막으로 그의 머리에 길쭉한 뿔이 돋아나는 것으로 그의 정신은 완전히 악마의 것이 되었다.

"에일라 넬런, 셀린 엘리어드, 티아 이글라스. 이 세 명을 제외하곤 모두 죽여도 좋다. 처리가 끝나면 그녀들을 데리고 돌아오도록."

"그, 거, 좋지!"

가면을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명령을 내리며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추자, 완전히 악마로 변해버린 에나프 남작은 무척이나 기꺼워하며 날카롭게 변한 자신의 양팔을 비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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